5권-13화
그것으로 끝이었다. 허리어림 부근에 섬뜩한 참흔이 생겨나더니, 잘려나간 상체가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근방에 있던 기간트 파일럿 중 하나가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세상에, 그 많던 그리즐리들을 일격에?]
여기 있던 수십 마리의 그리즐리만으로도 거의 백 단위에 가까운 기간트를 감당해 낼만한 전력이었다. 그걸 어린 소녀가 한순간에 해치우는 지금의 광경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한 수를 선보이고도 아리엔은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멀었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즐리들을 베어낼 때 검기의 제어가 느슨했었다. 필요 이상으로 기가 소모된 데다가, 검기의 간격 조절도 불필요할 만큼 길었다.
검기상인의 경지를 넘어 검기점혈이 가능한 최절정이었다면 이런 섬세한 제어 따윈 숨쉬는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자신의 미숙함을 절감한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현재도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성취였지만, 아리엔은 언제나 자신의 경지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의 비교대상은 언제나 자신의 스승 이진운이었다.
그녀의 두 눈이 하늘을 향했다. 그러자 플로트 윙을 활짝 펼친 채 지상을 향해 화살을 연사하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피피피핑!
수십 수백 개의 화살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퍼부어졌다. 마치 그 하나하나가 레일건의 탄자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인베이더들이 화살에 꿰뚫려 생을 마감했다. 그 중에는 생명체라 할 수 없는 것도 더러 있었으니, 생을 마감했다는 말도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바탕 인베이더들을 학살하고 나자, 인베이더들의 관심도 엘레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를 가장 위협적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인베이더를 보고도 태연스러웠다.
“나한테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맙지만, 난 너희들의 관심 같은 거 필요 없거든?”
그녀의 손이 앞으로 향한 순간, 허공이 일렁이더니 거대한 포구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무장구현의 결과물 중 하나인 주포구현이었다. 전함에서나 볼 법한 대구경 주포만을 자신 앞에 구현시킨 것이다.
콰아아아아!
포구에서 뻗어나간 성대한 빛줄기가 인베이더들이 집중된 지점을 강타했다. 제아무리 인베이더의 무리라 해도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전함의 주포 급 포격을 견뎌낼 순 없었다.
크에엑!
카아아!
다양한 비명과 함께 인베이더 무리 수백 마리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한 순간에 일소되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활약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베이더와 아군이 난전을 벌이는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그녀가 손을 드는 순간, 하늘 위에 수많은 무구가 구현되었다. 그것들 중엔 검이나 창, 도 같은 구식 냉병기들도 있었지만, 소형 레일건이나 빔 건과 같은 첨단병기들도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인베이더들을 타격했다. 냉병기들은 마치 폭우가 내리듯 쏟아져 내려와 아군과 섞여 싸우고 있던 인베이더들의 육신을 정밀하게 꿰뚫어 절명시켰고, 레일건이나 빔 건 같은 무기들은 저격형태로 인베이더들을 확실히 사살하였다.
그 광경을 목도한 아리엔이 일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이지··· 저건 못 이기겠네.”
처음엔 무기를 다루는 방법 따윈 전혀 모르던 아이였다. 그런데 스승에게 배운 지 불과 몇 달 만에 저 정도의 무인이 되었다.
아직 자신보다는 못한 수준이지만, 지금의 발전 추세를 본다면 따라잡히는 것도 머지않을 듯싶었다.
하지만 이능까지 포함한다면 엘레나의 실질적인 전력은 아리엔마저 훌쩍 뛰어넘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대규모 접전 상황에서 이 이상 활약할 수 있는 존재는 연합 내에서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아리엔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떠올렸다.
다시 복원된 웰라우드 가의 무예와 이진운에게 사사받은 점창의 무공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가진 그녀 본연의 고유이능.
고유이능에 생각이 미친 순간, 그녀의 기분도 착 가라앉았다.
그 이름은 만상개화 의검천추(萬象開化 意劍天墜).
하지만 그녀가 아는 건 고작 이능의 명칭뿐이었다. 자신의 고유 이능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발동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다른 사람들은 이능을 자각하자마자 바로 사용법을 저절로 알게 된다고 하던데··· 나는 어째서 예외인 거지?’
지금까지 수많은 방법을 다 동원해 봤지만 이능은 단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다. 아니 이능이 어떤 종류인지, 어떤 특성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었는데, 이럴 때면 자신의 이능이 조금은 아쉬워지곤 했다.
그런데 그때 조금 이상한 장면이 그녀의 눈에 포착되었다. 인베이더 들 중 일부가 어떤 지점에 몰려서 그곳을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거의 난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싸우느라 미처 몰랐었지만, 전장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지금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인베이더들이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아리엔은 그 점에 의아해 하면서도 일단은 카멜롯 쪽으로 통신회선을 열고 간단히 보고부터 올렸다. 아르페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전장에서 발생하는 변수에 대해서는 일단 보고부터 하는 게 우선이었다.
오퍼레이터를 통해 올라간 보고는 아르페인에게 전달되었다. 아르페인은 직접 회선을 열고 아리엔에게 말했다.
[흐음. 이곳에서도 확인했네. 확실히 수상하군. 하이브까지 날아간 판국에 그곳만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다니······. 그곳에 무슨 꿀이라도 숨겨둔 건가? 일단은 병력을 보내지. 그곳을 지키는 인베이더 놈들부터 치우고 봐야겠어. 아리엔 양. 부탁해도 되겠지?]
“예, 기간트 100기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아리엔은 문제없다는 듯 즉각 대답했다.
그 지점에는 인베이더들이 득실대고 있긴 하지만, 고위 급 인베이더의 수는 몇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양산형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정도면 기간트 부대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 그럼 아리엔 양. 부탁하겠어.]
그 말을 끝으로 아리엔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이미 백여 기의 기간트가 따르고 있었다.
쿠어어!
자신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아리엔의 존재를 발견한 인베이더들이 크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지점에 접근하는 것들은 뭐든 배제하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아리엔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비켜!”
그녀의 손에서 점창의 검학들이 뭉게뭉게 풀려나왔다. 분광십팔수검을 시작으로 급풍쾌검과 백금검 등 빠르면서도 맹렬한 기세로 유명한 검공들이었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광풍같은 기세로 인베이더의 전열을 사납게 훑어버렸다. 양산형의 수준에서는 미처 대응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거의 학살에 가까운 광경이 펼쳐졌다. 뒤따라가던 기간트 파일럿들도 그 장면을 보고는 경악해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말이 안 나오는군.]
[검 한 자루로 저게 말이 돼?]
[내가 알기로 무예는 오버러들이 주특기로 삼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마이너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강력한 거였어?]
[우린 기간트까지 타고 있어도 저렇게는 못하겠다.]
그러자 기간트 파일럿 중에서 선임자가 그들을 크게 다그쳤다.
[잡담 그만하고 인베이더나 공격해! 언제까지 저 소녀에게만 맡겨둘 거야? 다들 집중하도록!]
[예.]
그제야 기간트 파일럿들도 인베이더들을 상대로 학살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미 아리엔에 의해 전열이 흔들린 상황이라서 놈들을 격파하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침공급 인베이더 몇이 튀어나와 기간트들을 위협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리엔이 먼저 검기를 길게 뻗어내 놈들을 일찌감치 제거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무려 수천에 이르는 인베이더들이 불과 10여분 만에 일소되었다. 그 중 반 이상은 아리엔이 쓰러뜨린 거나 다름없었다.
일일이 숫자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그녀가 해치운 인베이더의 수는 100여 기의 기간트가 쓰러뜨린 인베이더보다 더 많았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고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기간트 파일럿들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버러 ···오버러 하더니 진짜 왜 오버러라 불리는 건지 알겠네요.]
지금까지 오버러 하면 그냥 특출한 영능을 보유한 초능력자라는 인상이 강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그녀의 전투를 보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단순히 강력한 이능을 다뤄서 오버러인게 아니라, 정말로 범인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힘을 다루기에 오버러(초월자)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의 경지는 실제 초월의 경지와는 아득할 만큼 거리가 멀었지만, 그녀가 보여준 무위만으로도 범인에게는 가히 초월자처럼 비쳐질 터였다.
[오버러라고 해서 다 그런 게 아니야. 저 어린 아가씨 정도의 실력자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라고. 적어도 B랭크 이상은 되겠어.]
[그 정도라고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선임 파일럿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곧바로 아리엔의 뒤를 따랐다. 인베이더들을 일소한 그녀는 지금 인베이더들이 지키던 어떤 지점을 살피고 있었다.
“여긴가?”
아리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상 인베이더들을 치워버리긴 했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단지 다른 지역보다 조금 높은 언덕진 장소라는 것이 다를 뿐, 그 외에 특별히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리엔은 그 근방을 차분하게 살폈다. 인베이더들은 방금 전 끈질기도록 이곳을 사수하려 했었다. 그 말은 그만한 가치를 가진 무언가가 이곳에 있다는 의미였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뭔가 다른 조치가 되어 있다는 건가?’
눈에 진기를 집중할 경우 대기에 떠도는 먼지 하나까지 볼 수 있는 게 아리엔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만큼 철저히 숨겨져 있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네.”
물리적으로 감춰진 건지, 아니면 자신이 찾을 수 없도록 환상이나 인식을 방해하는 뭔가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찾은 해결책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숨겨진 것이 드러날 때까지 이 부근을 검기로 빈틈없이 헤집는 것이었다.
아리엔은 즉시 같이 온 기간트 파일럿들에게 경고를 던졌다.
“다들 물러서요! 지금부터 이 부근을 검으로 한번 싹 다 훑을 거니까. 다치지 않게 멀리 떨어져요.”
[예?]
[뭐라고요?]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물러서자고! 뭔가를 할 모양인데 말이야.]
그들은 아리엔의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 말에 따라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검으로 한번 주변을 훑는다고 하니, 괜히 옆에 있다가 휘말릴 수도 있었다.
휘오오오!
검에서 시작된 검기의 회전이 맹렬하게 휘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회풍무류 사십팔검의 절초 회풍구도(回風九導)였다. 검 끝으로 아홉 개의 원을 그리는 순간, 거기서 시작된 경기의 회오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사방을 쓸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단순히 쓸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지표면 자체를 아예 일 미터 가까이 깎아내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게 경기의 회오리가 구릉을 쓸고 지나가던 중 뭔가 반응이 왔다. 거암으로 이루어진 구릉에서 들릴 리 없는 금속음이었다.
“빙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