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10화 (111/448)

5권-10화

이진운이 카멜롯의 공방을 찾았을 때 리스티는 자리에 없었다. 그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듀렌 박사가 이진운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요즘은 많이 바쁜 모양이구먼. 찾아오는 게 뜸한 걸 보니.”

“인베이더 상대하고 그 뒷수습까지 처리하느라 여러모로 바빴지요. 근데 리스티는?”

“잠시 자리를 비웠네. 외부에서 데이터 수집을 할 게 있다고 하더군. 리스티 양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조금 기다려야겠는데? 아니면 나중에 다시 찾아오게나.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모르니 말일세.”

데이터 수집? 그것도 공방 내에서 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무슨 데이터를 수집하려고 공방 바깥에서 하는 거지?’

이진운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 갸웃했지만, 그건 나중에 물어보면 될 일이다. 지금은 자신의 용무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한 가지 분석할 게 있습니다. 얼마 전 적으로 만난 이능력자의 데이터인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한번 확인을 해 보고 싶군요.”

“흐음, 분석 의뢰라. 그것 때문에 리스티 양을 찾아온 건가?”

“예.”

“분석 정도면 내가 해도 되겠구먼. 요즘 이것저것 많이 배워서 말이야. ”

분석만 할 수 있다면 굳이 리스티를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이진운은 듀렌 박사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진운은 자신의 모듈밴더를 끌러 그에게 건넸다.

모듈벤더는 통신을 비롯한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오버러들의 것은 더 특수하다. 인베이더와의 전투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검색할 수 있으며, 오버러들의 전용 장비에 대한 설정과 제어 기능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투 중에 발생하는 각종 상황과 현상들을 블랙박스처럼 데이터화 하여 저장하는 기능도 빼놓을 수 없었다.

모듈 밴더에 저장된 데이터를 분석 시스템과 연동시킨 뒤, 내용을 확인한 듀렌 박사가 조금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응? 이건 일종의 핵반응인데?”

“핵반응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등장에, 이진운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듀렌 박사는 확실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그렇지. 이건 분명 핵반응일세. 검출되는 방사능이 적은 걸 보면 핵분열은 아니고 핵융합에 가깝겠군. 이 자는 그걸 좀 출력을 낮춰서 안정성 있게 다루고 있어. 확실히 이능이란 건 신기하단 말이야. 핵융합 에너지를 이런 식으로 변형시켜 자유롭게 다루다니, 위력은 많이 떨어지지만 이런 식이라면 근접전 형태로도 활용이 가능하겠어. 우주가 넓긴 넓구먼.”

듀렌 박사는 그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이진운의 표정은 더없이 무거웠다.

“핵융합이라니······.”

폭주하던 글랙스가 휘두르던 붉은 기운이 이상하게 낯익다 싶었다. 다루는 방식은 거의 기의 운용과 비슷했지만, 그 안에는 뜨겁고 강렬한 폭발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헌데 그게 핵융합 능력이었다니··· 비로소 모든 게 납득이 되었다.

‘어떻게 로일라의 능력이 글랙스에게 있는 거지?’

글랙스는 별 볼일 없던 하위 이능력자였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핵융합 능력이라니······.

물론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같은 종류의 능력을 각성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글랙스의 경우는 가면인에 의해 새로운 이능력이 부여된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한 가지.

“설마 로일라의 능력을 빼앗아서 글랙스에게 준 건가?”

어디까지나 짐작이긴 했지만, 이진운은 내심 확신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단서와 정황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었다.

로일라를 빼돌린 것도 가면인이었고, 글랙스에게 능력을 부여한 것도 가면인이다. 게다가 그 둘의 능력의 종류까지 같다면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한두 번은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셋 이상이면 결코 우연일 수 없었다.

‘어째 이상하다 싶었지.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도 많이 무뎌졌군.

이진운은 기운의 성질만으로 판단하지 못했던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나 다루는 방식이 예전과 전혀 달라져서 집적 상대하고도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때, 공방 안으로 들어서는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리스티였다.

그녀는 이진운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아저씨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분석할 게 있어서.”

“분석? 뭔데요?”

분석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내 보이는 리스티. 이진운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흐음, 그러니까 로일라가 가진 영능이 지금 글랙스란 자에게 옮겨졌다 이거죠?”

“그래. 딱히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모든 정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잠시 생각하던 리스티가 곧 입을 열었다.

“아저씨 말대로 로일라란 자의 핵융합 능력이 글랙스에게 옮겨간 건 맞는 것 같네요. 밴더의 데이터에도 그렇게 나오고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다. 어떻게든 가능하긴 하니까 글랙스가 그 능력을 사용한 거겠지만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이능을 빼앗거나 옮기는 건 절대 불가능해요. 영력은 일종의 에너지라서 타인의 것을 흡수할 수 있겠지만, 영능 그 자체는 각자의 영혼에 새겨지는 고유의 개성이거든요. 괜히 시스템이 고유스킬이라고 표기하는 게 아니에요.”

순수하게 이능만 빼앗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어 말하는 리스티. 그렇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그때, 뭔가가 떠오른 이진운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설마 로일라의 영혼을 글랙스가 흡수하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리스티는 그가 내놓은 가설도 부정했다.

“타인의 영혼을 흡수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에요. 모든 지성체의 영혼은 고유불변이라 할 수 있죠. 그건 설령 신이라 하더라도 멸할 수 없는 게 바로 영혼이에요.”

“그렇다면 영능학에서 간혹 보이던 영혼을 소멸시켰다든가, 아니면 파괴했다는 그런 내용들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영혼 자체에 담긴 업이나 기록, 기억 등에 대한 걸 그렇게 표현하는 거죠. 만일 아저씨가 지금 죽는다고 해봐요. 그리고 어떤 존재가 영혼을 소멸시켰다? 그건 실제 소멸한 게 아니에요. 영혼은 그대로죠. 다만 아저씨의 근간을 이루던 정신과 기억 등이 상실되는 거라고 해야 할 거예요. 그것도 영혼에 축적 기록되는 또 하나의 업이거든요.”

“그렇군.”

“좀 더 알기 쉽게 비유하면 영혼은 절대 망가지지 않는 하드웨어고. 거기에 새겨지는 업은 소프트웨어라고 보시면 돼요. 영혼의 소멸이란 건 그 하드웨어를 포맷시켜 초기화 한 것과 같고요.”

리스티의 설명을 듣고서야 어째서 다수의 영능학들이 그런 사례들을 영혼의 소멸이라고 표현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성과 자아를 가진 지성체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확립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그 토대를 이루는 기억과 정신이 완전히 소거된다면, 그것을 예전의 자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지워진 뒤에 만들어진 새로운 기억과 새로운 자아··· 그건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글랙스란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이능을 얻었는지는, 대충 짐작 가는 게 한 가지 있긴 하네요.”

“그래?”

“로일라 라는 해적의 영혼을 글랙스란 자가 자신 안에 품었을 가능성이죠. 영혼은 완전히 흡수할 수는 없지만, 그걸 자기 자신 안에 가두고 착취하는 형태로 이능을 다룰 수는 있거든요. 이것도 어디까지나 가설에 가까운 이론적인 거라서 실제로 실현 단계까지 가려면 꽤나 불법적인 실험을 오랫동안 거쳐야 가능할 거예요.”

“하긴 그렇겠지.”

글랙스에게 적용된 시술법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 놈들은 이런 방식으로 힘과 세력을 키워서 더 위험한 짓을 저지를 거란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이에 대한 대비책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리스티라고 해도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이진운이 슬쩍 운을 띄웠지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쉽지 않을 걸요. 타인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 안에 가두고 착취하는 방식은 일단 완성되기만 하면 생각보다 안정적이에요. 외부에서 간섭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죠. 물론 시술 당사자가 겪는 부작용은 적지 않겠지만요.”

“그래도 앞으로 나올 적들은 이런 식으로 다수의 영능을 얻은 작자들일 게 분명한데, 뭔가 대비책이 있어야 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네크로맨시나 영혼 쪽은 저도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요. 어지간한 사람들보다는 잘 알지만···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전 공학 쪽이 전문이란 걸.”

리스티도 하기 싫어서 거부하는 게 아니었다. 그쪽 방면은 자신이 없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이진운도 확실한 반대급부를 제공하기로 했다. 리스티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종류의 것으로.

“그 대신 나도 알고 있는 지식을 더 풀지. 네게 부족하다는 영혼이나 혼백 같은 걸 다루는 쪽으로. 내가 아는 것들 중에서도 제법 고급 축에 속하는 지식들이지. 지금까지 네게 가르쳐준 기초와는 전혀 달라.”

“저··· 정말요? 거짓말 아니죠?”

이진운의 제안에 리스티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진운이 가진 지식들은 아르탈 행성연합이 보유하고 있던 수많은 지식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 성립된 지식들이었다.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는 그런 지식들이라면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조차 없었다.

그동안 이진운은 리스티에게 기초 지식들만 전해줬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켰다. 그걸로 기간트란 희대의 발명품이 탄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고등 지식이 더해진다면, 후에 무엇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진운이 진짜라며 확답을 주자, 리스티는 서슴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아저씨 말대로 한번 연구해 볼게요. 하지만 시간은 좀 걸릴 거예요. 저라도 만능은 아니라서요.”

“그래,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 그러니까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과만 내도록 해.”

“재촉하지 않아서 좋네요.”

연구라는 건 옆에서 계속 재촉한다고 해서 결과가 더 빨리 나오는 게 아니었다. 필요한 환경과 자금만 제공해주면 결과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물론 돈이야 리스티가 더 많았고, 이진운의 경우에는 지식을 제공해준다는 게 조금 다르지만··· 아무튼 결과는 기대해 볼만 했다.

“그런데 리스티. 좀 전엔 뭘 분석하느라 나간 거였지? 분석에 필요한 관측 장비는 다 공방에 있는 걸로 아는데 말이야.”

이진운이 좀 전에 왜 나갔었냐고 묻자, 리스티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해주었다.

“아, 그거요? 아르페인 씨 때문에요. 그 아저씨가 가진 능력이 참 좋잖아요. 그 원리만 알아내면 기간트의 증폭 능력을 좀 더 다듬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근데 그 아저씨가 워낙 바빠서 말이죠. 공방에 들를 새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직접 갔죠.”

“아르페인의 능력을? 분석한다고 그게 가능해?”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이진운에게, 리스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히 흉내는 못 내도 비슷하게는 될 거에요. 다만 이 경우에는 양산은 불가능할 것 같더라고요. 물론 효율이나 구현 수준도 상당히 하향될 거고요. 아르페인 씨의 본래 능력에 비하면 진짜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에요.”

“그래도 가능하다는 게 더 신기하군.”

이진운은 그녀의 천재성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아르페인의 능력이 가진 전술-전략적인 가치는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분석해서 유사하게 구현할 수 있다니.

양산이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을 듣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말았다.

“전함 한 대에 적용하려면 적어도 준대형 전함 서너 척 만드는 비용이 들어가요. 이러니 양산은 절대 무리죠. 심지어 적용할 전함의 등급이 높아질수록 비용도 그만큼 크게 상승하고요.”

“······.”

말 그대로 돈지랄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리스티에게 돈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으니 상관없겠지만, 과연 관리국에서도 그럴까?

비용대비 효율을 생각한다면 이 기술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관리국은 그다지 많은 전함에 적용할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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