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09화 (110/448)

5권-09화

행정수도가 인베이더의 급습에 초토화 된 지금, 행성정부는 거의 마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룬키라는 거짓신분으로 활동해왔던 글랙스가 아이틀란 행성의 멸망을 기도한 배신자였음이 밝혀지면서 정부의 흔들림은 더욱 컸다. 그냥 평범한 인물도 아니고 이 행성정부의 최고 수반이었던 자가 배신자였다니, 누가 정부를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그 덕분에 군부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도가 예전에 비할 수 없이 높아졌다.

물론 이진운이 긴급조치를 내세워 군권을 장악한 덕분이긴 했지만, 그나마 인베이더가 쳐들어온 상황에서 유일하게 신속 대처한 것은 군부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했던 데다, 위기를 벗어난 지금도 그때의 혼란을 미처 다 수습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시민들이 군부를 지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덕분에 군부가 정부의 대부분의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차라리 지금과 같은 전시 상황에서는 언제든 일사불란하게 대처할 수 있는 군부가 주도권을 쥐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다.

물론 군부 중심의 정부가 만들어지면 그게 철통독재로 이어지는 사례들도 있긴 했지만, 이곳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아이틀란은 엄연히 연합의 관리 하에 있는 행성이었고, 그런 독재자가 설치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건 연합이 아니더라도 내가 가만 안 있지.’

이진운은 자신 앞에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드는 행성방위군의 장성들을 바라보았다. 관리국의 독립 라이선스를 가진 자신이 상당한 현장 지휘권한을 쥐고 있다는 걸 알기에 다들 저렇게 아부를 하고 있었다.

아마 저들은 이진운이 젊고 혈기 넘치는 나이니만큼, 자신들에게 유리할 수 있도록 적당히 구슬려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어림도 없는 수작이었다.

전생을 통해 별의별 경험을 다해 본 만큼, 그런 말장난에 넘어갈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이렇게 군부 인사들의 본성이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그동안 불순한 속내를 숨겨온 작자들을 모두 파악해서 나중에 대거 경질할 생각이었다.

이진운은 군부의 인사들을 한차례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고는 말했다.

“그럼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하이브 공략은 지금으로부터 이틀 뒤, 정확히 정오 12시! 이번에야말로 아이틀란 행성을 인베이더의 마수로부터 완전히 해방하는 겁니다.”

“오오!”

여기저기서 터지는 환호성. 이미 아이틀란 행성이 인베이더에게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인베이더의 전력은 예전의 반 토막도 안 되는 상황. 가장 두려웠던 인베이더의 대함대와 성멸 급 둘은 이진운과 인피니티 킹덤에게 박살난 상태였고, 하이브에 남아 있는 전력은 그와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물론 하이브의 대공방어 체계가 꽤 강력하긴 하지만, 인피니티 킹덤과 행성방위군의 화력을 쏟아 붓는다면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싸우기도 전부터 다 이긴 기분을 내고 있다니··· 정말 한심한 작자들이로군.’

그렇게 작전회의를 마친 이진운은 어떤 사람을 찾아갔다. 그는 다름 아닌, 토착민 대표이자, 이번 사태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올레그였다.

글랙스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올레그는 예전의 당당함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이진운이 직접 찾아가보니 얼굴도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글랙스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말에 잠시 멈칫한 올레그.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들어오시오.”

이진운은 올레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꽤나 작고 조촐한 편이었다. 내부의 가구도 필요한 것들만 갖춰져 있을 뿐, 화려함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토착민들의 대표라고 하더니, 이건 검소해도 너무 검소한 것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이진운의 기색을 눈치 챈 건지, 올레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게 볼 것 없소. 따로 가족도 없는 몸이라서 그렇게 화려하게 꾸미고 살 필요가 없어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니 말이오.”

“그렇군요.”

그가 가족이 없다는 건 이진운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혼자 산다고 해도, 높은 직책을 맡은 자가 이렇게 검소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응접실로 안내된 이진운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올레그와 마주 앉게 되었다. 가벼운 차와 다과를 내온 올레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무를 물어왔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뭐요?”

“글랙스하고 아는 사이 같던데, 어떤 사이였습니까.”

글랙스와의 관계를 묻는 그 말에 올레그가 쓰게 웃었다.

“역시 그 질문이 나오는군. 그게 알고 싶었던 거요?”

“사태의 원인을 짚어는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큰 실례가 아니라면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이번 사태가 워낙 커서 조사가 필요합니다.”

질문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올레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당시 난 글랙스가 운영하던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소.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 있던 노조원들을 대표하는 노조위원장이었지.”

“노조위원장이라면··· 혹시 글랙스가 노조와 많이 부딪쳤습니까?”

“천만에. 당시의 글랙스는 참 좋은 사람이었소. 많은 걸 가졌음에도 우리에게 베풀 줄 알았고, 가족처럼 대해줬다오. 임금도 다른 곳에 비해 월등히 많았고. 노조가 있긴 했지만 거의 형식적이었지, 굳이 협상하겠다고 싸울 이유조차 없었소.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

“그렇군요. 그럼 글랙스가 당신에게 원한을 품은 건 왜였습니까?”

“당시 글랙스가 가진 것을 노리는 자들이 있었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자들은 바로 복합군수업체들이었지. 그들은 글랙스가 개발한 센서가 군수용으로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뒤에서 수작을 부렸고, 노조원들은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소.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올레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부터 모든 게 최악이 되었소. 노조가 대놓고 파업을 일삼으니 공장 운영은 자연히 악화되었고, 심지어 놈들에게 매수당한 작자들에 의해 주요기술이 유출되기까지 했지. 그러니 건실하게 운영해온 글랙스라 해도 더는 버틸 수가 없었소. 그렇게 이중삼중으로 흉계를 꾸몄는데 공장이 망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아마 그때부터일 거요. 글랙스가 이 행성 사람들을 증오하시 시작한 게······.”

“어째서입니까?”

“당시 노동자들 대부분은 토착민이었소. 그는 이주민들의 토착민에 대한 차별이 마음에 안 들어 많은 걸 베풀어주었는데 졸지에 배신당하게 되었지. 심지어 같은 이주민들에게까지 온갖 멸시를 당했는데 오죽하겠소? 글랙스가 지금과 같은 증오의 화신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오. 나라도 같은 처지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유독 당신을 더 미워하는 건 왜 그런 겁니까?”

이진운은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시 37년 전을 언급하면서 올레그를 노려보던 글랙스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증오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겁쟁이였소. 당시 돌아가는 내막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도 나서지 못했소. 노조원들이 그들의 매수에 넘어가 공장의 운영을 악화시켰을 때도, 기술이 유출될 때도 막지 못했지. 그냥 무섭고 두려웠던 거요. 비정상적으로 삐뚤어져버린 인간의 악의가.”

인간이 가진 악의는 참으로 지독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것을 경험한 올레그는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글랙스는 토착민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지만, 정작 그것을 받은 토착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받을 당시에는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 가슴 한편에는 열등감과 증오가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올레그는 당시를 떠올리면서 몸서리쳤다. 노조원들은 그가 베풀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잊고 배은망덕이란 단어를 몸으로 실천하였다. 심지어 어떤 작자들은 글랙스가 자신들 같은 토착민에게 착취한 것으로 부를 누리고 있다고 하는 자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것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곧 군중심리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았다.

“그게 올바르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소. 그리고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 하지만 일단 선동되어 넘어간 사람들을 되돌릴 수가 없었소. 더 했다간 오히려 내가 맞아 죽을 것 같아서 더 이상 나서지 못한 거요.”

그는 그때 군중의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했다. 제아무리 논리를 들먹여도,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일개 개인이 손 쓸 방법 따윈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글랙스는 그때 내게 도움을 청했었소. 노조위원장으로서 그들을 어떻게든 설득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끝내 외면하고 말았지. 그의 편을 들었다간 죽을 것 같아서··· 결국 나는 그가 베푼 은혜를 원수로 갚은 거요.”

“그랬었군요.”

솔직히 말한다면 그건 올레그의 잘못이라 하긴 어려웠다. 그 상황에서 나설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정신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겁을 상실했거나 아니면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된 사람뿐이다.

“그래서 정치에 나서게 된 거요. 그때의 일을 겪으면서 이주민과 토착민과의 갈등을 이대로 놔둘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었지. 언제 또 37년 전의 그 일이 다시 반복될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토착민들을 그 전에 제어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대표 자리를 떠맡게 되었지만··· 역시 난 또 실패한 모양이오. 이런 일이 터져버리다니··· 게다가 글랙스까지 그런 증오의 화신이 되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소.”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좌절감을 토해내는 올레그.

이진운이라 해도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울 자신은 없었다. 그건 마음의 문제인 만큼 스스로 극복하는 게 답이었으니까. 자신이 뭐라 위로하더라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일단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이진운은 그의 집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왠지 기분이 씁쓸해졌다.

타인에게 많은 것을 베풀던 선인이, 불합리한 질시와 미움을 받아 모든 것을 멸망하길 바라는 증오의 화신으로 탈바꿈되었다.

‘글랙스, 당신도 알고 보니 참 딱한 사람이었군.’

그리고 그때의 일로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는 올레그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외면했던 일의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동정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글랙스가 가면인의 배후와 한패가 되어 아이틀란의 멸망을 바라고 있는 지금, 그는 명백한 적이었다.

얼마 전에는 갑작스럽게 힘을 손에 얻는 바람에 폭주했었지만, 아마 다음에는 분명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없었던 힘까지 손에 넣었으니 더 위험천만한 짓을 저지를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때 글랙스가 사용하던 그 힘, 분명 내가 어디선가 경험해 봤던 거였는데······.’

당시 글랙스가 휘두르던 붉은 기운을 떠올리면서 이진운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어디서 접해봤던 기운이 분명한데, 잘 떠오르질 않아서였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군. 리스티하고 한번 분석을 해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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