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08화 (109/448)

5권-08화

그렇지만 이진운은 그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쪽 방면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말이야. 시공간 자체를 베고 부수는 건 몰라도 간섭 같은 건 어렵지.”

만일 평범한 북광진암이었다면 가면인도 이렇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격리된 공간 안으로 파고들 수조차 없었겠지.

하지만 이진운의 이번 수는 특별했다. 이건 설령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 해도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격리 공간 안에 있던 날 해할 수 있었던 거냐? 평범한 물리 공격은 이 격리공간을 뛰어넘을 수 없는데······.]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가면인은 그렇게 물었다. 자신의 치명상보다는 의문해소가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마음의 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설령 그게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는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지. 공간 격리? 그런 잔재주로 내 검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라고 해두마.”

[마음의 검이라니? 설마 정말로 마음이 검이 되었다는 건가? 그게 말이 돼?]

이진운의 대답을 듣고 의문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마음의 검이라니!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놈의 말대로라면 상대를 베고 싶다고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공간의 격차를 얼마든지 뛰어넘어 벨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가면인의 의심을 읽은 이진운이 비웃듯 내뱉었다.

“믿고 안 믿고는 내 알바 아니지. 하지만 지금 네가 겪고 있는 건 분명한 현실일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꿰뚫린 가슴팍의 고통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상대는 격리공간을 뛰어넘은 공격을 성공시켰다. 그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그 수법이 자신에게 위협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쿨럭···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무예라는 게 워낙 마이너 한 분야라서 말이야.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군. 앞으로는 이것도 염두에 두지.]

“염두에 두겠다고?”

이진운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그건 마치 이곳에서 살아나갈 자신이 있으니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말투였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네놈은 여기서 도망갈 수 없어.”

[그래. 도망갈 수 없겠지. 나는 이미 회복하기 힘든 치명상을 입었다. 게다가 네가 말한 진법이란 것도 공간이동을 방해하겠지. 영락없이 함정에 걸려든 쥐새끼 꼴이 되었군.]

마치 희극 배우마냥 주절주절 떠드는 가면인.

이진운으로서는 더더욱 이해가 안 되었다. 자신의 처한 위기상황을 마치 남의 일처럼 떠들다니.

“무슨 꿍꿍이속이지?”

[그건 나중에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다. 이야기해줘도 상관은 없겠지만 나중을 위한 즐거움으로 남겨두지. 아무튼 이번만큼은 인정하겠다. 이번 수 싸움은 네가 이겼다는 것을. 하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될 거라 생각하진 마라.]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는 가면인.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이진운이 결국 손을 쓰고 말았다.

그가 손짓하는 순간, 가면을 꿰뚫고 있던 의형검강이 놈의 상체를 비스듬하게 내리 그으며 절단한 것이다.

촤아악!

잘려나간 상체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면서 붉은 선혈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놈이 무슨 불사신이라도 되지 않는 한 다시 살아난다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가면인은 제멋대로 지껄여대고 있었다.

[결국 손을··· 썼나?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다. 그때는··· 이번과는 좀 다를······.]

그 말을 끝으로 가면인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다. 하지만 글랙스의 배후에 있던 가면인을 해치우고도 이진운의 표정은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놈이 죽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한 가지 사실을 겨우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여기 있는 건 가짜였어. 분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랬다. 여기서 죽은 가면인은 진짜가 아니었다. 애당초 영혼조차 없는 텅 빈 육신에 불과했다.

‘이래서 녀석이 죽는 순간까지 태연했던 거겠지.’

놈은 인위적으로 제조한 육신을 분신으로 삼아 아주 먼 곳에서 조종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원거리 공간이동이 봉쇄당하고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그토록 태연할 수 있었겠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대하기 성가신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번처럼 또 분신만 앞세워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먼 곳에서 분신을 운영하는 방식이 비교적 안전한 편이긴 하지만, 그게 본체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건 아니다. 중원에서도 그와 비슷한 술수를 쓰는 자들은 여럿 있었고, 나름 파훼법도 존재했다. 만일 놈이 또다시 똑같은 수를 사용해 자신 앞에 분신을 내놓는다면, 그때야말로 놈의 최후의 날이 될 것이다.

고오오오!

가면인이 쓰러진 시간으로부터 몇 분 뒤, 카멜롯을 비롯한 인피니티 킹덤의 함대가 그의 머리 위에 당도했다. 행정 수도로 들이닥쳤던 인베이더 함대를 이제야 전부 전멸시킨 것이다.

이진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대거 강하하고 있는 함대의 전투요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뒷마무리를 하고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그곳은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었다.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내부는 강력한 역장과 술식으로 덮여져 있었고, 어느 누구도 이 안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 밀실 안에 존재하는 것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좌정하고 있는 갈색머리의 한 사내.

겉으로 드러난 생김새는 무척이나 유약해 보였지만, 그가 지금까지 저지른 행태들을 생각하면 유약함하고는 결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것이다.

헌데 그때, 누군가가 밀실 안에 발을 들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밀실 안으로 공간을 뛰어넘어 이동해 왔다는 게 옳을 것이다.

본래라면 이 밀실은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곳이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 바로 이곳 밀실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은 자들이었다.

밀실 안으로 들어선 사내, 흑의복면인이 갈색머리 사내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됐지?”

그제야 갈색머리 사내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곧 조용히 말했다.

“글쎄, 반쪽짜리 성공이라고 해야겠군. 아이틀란 행성에서 준비하던 공작은 실패했지만, 글랙스에게 시도하려고 했던 실험은 성공적이었으니까.”

“결국 그렇게 됐나? 어째서 그렇게 된 거냐?”

흑의복면인이 무덤덤하게 다시 묻자, 갈색머리 사내는 조금 굳은 안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진운, 그 자··· 듣던 것보다 더 무서운 자였다. 가진 패도 만만치 않았지. 시공간을 베 것으로도 모자라, 격리 공간 너머에 있던 나를 한번 죽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진법이라는 알 수 없는 수단으로 내 능력을 반절 쯤 봉쇄하기도 했고. 숨겨진 게 더 많은 작자야. 앞으로 상대할 때 조심하는 게 좋겠어.”

그 말에 흑의복면인이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어지간해서는 조심하라고 경고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렇게까지 경각심을 드러내는 걸 보니 역시 보통 상대가 아닌 듯 보였다.

더군다나 놈이 공간제어 능력을 무시하고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의해야 할 이유로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그런가?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고는 느꼈지만, 그 자 하나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군. 전체적인 계획의 진행엔 변함없다지만··· 이런 식으로 자꾸 차질이 빚어지면 곤란해.”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직 우리의 존재를 드러낼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대놓고 나선다면 그런 놈 하나 없애는 건 크게 어렵지 않겠지만, 관리국과 연합만큼은 조심해야 해. 게다가 교단 놈들도 최근 들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고. 여러모로 시기가 좋지 않아.”

그들이 속한 세력이 가진 힘은 막강했다. 그 힘을 일부 드러낸다면 지금 마음껏 날뛰고 있는 이진운 하나 없애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의 세력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주는 넓고 그에 비견되는 세력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이진운은 연합과 관리국에게 많은 관심과 비호를 받고 있어서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손을 쓰는 게 더 어려웠다.

“그래서 놈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해적 놈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기기 전까지는 당분간 놔둘 수밖에.”

“뭐, 그게 상부의 판단이라면 어쩔 수 없지.”

흑의복면인의 말에, 체념한 투로 내뱉은 갈색머리 사내. 하지만 이대로 이진운을 포기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표정이었다.

헌데 그때였다. 갈색 머리 사내가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입가로 선혈을 흘리기 시작했다.

“컥, 커으···.”

“이··· 이봐!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피를 토해!?”

갑자기 맹렬하게 토혈하는 동료의 모습에 흑의복면이 놀라 외쳤다. 아무 조짐도 없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다니, 이게 무슨 증상이란 말인가?

한 바탕 피를 토한 나머지 창백한 얼굴이 된 갈색 사내가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설마 인형과 연결된 라인을 역류해 들어와 본체인 내게까지 타격을 줬다고.”

“뭐? 그게 사실이야?”

“그래, 분명 내 분신은 이진운 그 자에게 죽었어. 그런데 그때 당한 데미지가 지금 본체인 내게 전달되었어. 그렇지 않고선 지금의 증상을 설명하기 어려워.”

“말도 안 되는 일이군. 거기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수십 광년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그 충격이 전해졌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린 흑의복면인은 즉시 갈색머리 사내의 몸부터 살폈다. 뭐가 어떻게 되어서 데미지를 입게 된 건지, 그 원인을 확실히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곧 무언가를 찾아내게 되었다. 그것은 죽어버린 인형과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실낱같은 라인을 통해 남은 흔적을 통해서였다.

“이건 분명··· 그래, 틀림없어! 사상에 의한 반응 현상이다.”

“사상이라고?”

사상이란 단어에 갈색 사내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결코 나와선 안 되는 단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흑의 복면인은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놈이 사용했다는 공격수법은 일종의 사상기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렇지 않고선 물리법칙을 넘어선 이런 현상은 불가능해.”

“그럴 리가. 그 자가 강하긴 해도, 분명 그랜드 급에는 이르지 못했어. 이제 소환된 지 불과 1년도 안된 작자가 사상기라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며, 부정적인 표정을 짓는 갈색 머리 사내. 흑의복면인은 그런 동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겁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진운, 그 자에 대한 위험평가 등급을 좀 더 상향시켜야겠군. 이런 비약적인 성장세라면 어쩌면 천외오천 급으로 격상해야할지도 모르겠어.”

“천외오천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높게 잡은 거 아닌가?”

“아니,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그렇게 여기는 게 더 나아. 놈을 낮춰 봤다가 괜히 더 계획이 틀어지는 수가 있어.”

이진운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에 갈색 머리 사내는 조금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흑의복면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 결정은 자신과 옆에 있는 동료가 내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그 분께 연락을 드려야겠군.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는 그 분이 정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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