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07화
이변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건 공간제어에 의한 공간 왜곡 현상!
글랙스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앞에서 거리만 멀어진 게 아니다. 길게 확장된 공간이 다시 왜곡, 격리 변화를 일으킴으로서 더 이상 물리적인 거리로 환산할 수 없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젠장, 이미 늦었어.’
이진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글랙스는 자신의 손을 완전히 떠나 버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 물론 지금이라도 손을 쓴다면 어찌어찌 잡을 수도 있겠지만, 이 현상을 일으킨 원흉이 그때까지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기척이 나타났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음성은 조금은 귀에 익은 변조된 음성이었다.
[네놈에겐 조금 안타깝게 됐구나. 하지만 글랙스는 우리 소유라서 말이야. 이쪽에서 회수해 간다.]
“역시 네놈이 배후에 있었나?”
이진운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예상했던 대로의 인물이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내. 놈은 글랙스를 무사히 빼돌렸다는 조금 고무된 탓인지, 이진운이 던진 물음에 순순히 인정하였다.
[그래, 네놈 말처럼 글랙스 뒤에는 내가 있었지. 녀석을 통합대통령 자리까지 끌어올린 것도 우리의 힘이 컸고.]
“그렇다면 글랙스가 저렇게 된 것도 너희 때문이냐?”
[어느 정도는. 다만 이렇게 날뛰도록 의도한 건 아니었다. 놈에게 힘을 주기로 했는데, 그걸 감당 못하고 일시간 폭주를 일으킨 결과가 이거였지.]
제법 흔쾌하게 대답까지 해주는 가면인.
‘그렇군. 역시 글랙스의 폭주는 놈들이 의도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어찌 됐든 놈들이 영능 방면으론 별 볼일 없던 글랙스에게 놀라울 만큼의 이능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었다.
과연 그게 어떤 특수한 조건 하에서만 가능한 건지, 아니면 고위 이능력자를 특별한 제한 없이 양산할 수 있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나타난 걸 보면 글랙스 그 작자를 어지간히도 애지중지 하나 보지?”
[우리의 중요한 협력자이자 실험체니까. 그리 쉽게 포기할 순 없지.]
“실험체라.”
이진운은 그 단어를 곱씹듯 중얼거렸다.
놈은 실험체란 표현을 썼다. 그렇다면 글랙스처럼 이능을 부여하는 방법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서 불완전한 실험 단계에 머무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글랙스는 아이틀란 행성을 멸망으로 이끌려 하던 악인이지만, 자신들의 협력자마저 실험체 취급하는 가면인과 그 배후에 대해선 불쾌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한데 말이야. 그런데 내가 확보해둔 글랙스를 네놈이 빼돌려 버렸지. 그에 대한 책임을 좀 져 줘야 할 것 같은데, 네놈 생각은 어떻지?”
이진운이 던진 그 말에 가면인이 가당찮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꽤 재밌는 농담을 하는군. 그래서 지금 날 붙잡겠다고? 글랙스 대신?]
“농담일 것 같나, 내 말이?”
[네놈도 내 능력을 봤을 텐데. 내가 너보다 더 강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래도 도망갈 마음만 먹으면 그 대단하다는 천외오천이라 해도 날 붙잡진 못해.]
놈이 이렇게 자신만만해 할만도 했다. 공간제어능력은 활용하기에 따라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능력이었다.
딱히 상성을 타지 않아서 공방 모두 안정적인데다. 공간 자체를 주무르는 특성인 만큼 상대가 대응하기도 까다로웠다. 특히 이런 상대가 가장 골치 아플 때가 도망칠 때였다. 공간이동이나 공간 왜곡이 발동되고 나면 물리적으로는 따라잡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진운의 눈빛은 가면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의 검 끝이 이윽고 가면인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래, 공간제어능력은 확실히 대단하지. 하지만 내 검 앞에서도 그게 통할 것 같나?”
그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검 끝을 겨누는 이진운.
하지만 가면인은 조금도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물론 나도 네놈을 얕보는 건 아니야. 공간을 벴던 검의 무서움은 아주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난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이미 이곳에 온 목적도 반쯤은 달성했고.]
가면인에게 있어 이진운은 조금 껄끄러운 상대였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검 한 자루로 시공간을 베어내는 것을 똑똑히 목도했으니까.
물론 싸워서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싸울 필요가 없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진운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글랙스는 놓쳤지만, 눈앞에 있는 가면인까지 순순히 놔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도망을 가시겠다? 누구 마음대로!”
쿵!
벼락 같이 일갈하며 내딛는 이진운의 일보! 그러자 묵직한 진각에서 일어난 파장이 이 일대를 한바탕 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파장은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다. 공격인 줄 알고 대비했던 가면인도 조금 의아해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반응도 곧 달라졌다. 어떤 이변을 깨달은 건지 가면인의 목소리가 일순 경색되었다.
[이건··· 설마, 공간 봉쇄? 설마 네놈에게 또 다른 이능이 있었던 거냐?]
공간제어능력 자체가 완전히 봉인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 비해 확실히 제어하는 것이 몇 배로 힘들어졌다. 특히 장거리 공간이동 같은 수법은 거의 사용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이곳에서 도주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졌다.
낭패스럽다는 기색을 보이는 가면인에게 이진운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다른 이능 따윈 없었다. 단지 네놈이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 몇 가지 대비를 해두고 있었을 뿐이지.”
[대비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대비한다고 해서 내 능력을 이렇게까지 억제할 수 있다고?]
“충분히 가능하지. 우리 고향에서는 이걸 진법이라고 하는데··· 아마 네놈은 말해도 모를 거다.”
[진법이라니! 이건 마법도 아니고··· 대체 뭐지?]
이진운의 전생에 대해 알 리 없는 가면인에겐 그 말 자체가 수수께끼 같았다. 마법도 아니면서 마법과 흡사한 효과를 내는 새로운 수법이라니!
[네놈은 정말 위험하구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것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이런 알 수 없는 능력까지 들고 나올 줄이야.]
가면인의 살의가 점점 짙어져 갔다. 진법에 의해 도주할 방도조차 막힌 지금, 가면인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한 가지였다.
이 자리에서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상대를 없애는 것.
이진운도 살기에 묻어 나오는 가면인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가볍게 빈정거렸다.
“제법 그럴듯한 살기군. 그래, 이제야 날 죽일 마음이 든 모양이지?”
[그래. 이제 확실히 알았다. 전에도 위험하다고 여기긴 했지만, 네놈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위험한 녀석이구나. 잘 하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오산임을 깨달았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확실히 없애주마.]
더없이 진지한 가면인의 선언과 함께 공간이 크게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그냥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게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빨래처럼 강하게 쥐어짜서 그 안에 든 모든 것을 파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대로 공간 속에 매장해주마!]
끄그그긋!
공간이 이지러지며 나는 괴이한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려 퍼졌다.
이대로라면 이진운의 신형은 일그러지는 공간 왜곡에 휩싸여 분쇄기에 돌린 것처럼 박살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진운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 기다렸다는 듯 외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공간을 다스린다고? 그걸 할 줄 아는 게 너 뿐이라고 생각하냐! 내 검은 시공간을 베고 허문다! 이 정도의 장난질은 웃을 가치도 없다!”
그 순간 그의 검 끝에서 짙은 묵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검기도 아니고 검강도 아니었다. 마치 빛마저 빨아들일 듯 깊고 공허한 어둠 그 자체였다.
거듭 압축되고 압축되면서 그의 검에 서린 어둠은 그가 존재하고 있던 시공간 자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게 되었다.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5식. 묵룡천중세(墨龍天重勢)
이윽고 그의 검이 수평으로 휘둘러졌다. 평범하게 보이는 횡소천군의 한 수! 하지만 그것이 낳은 결과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이진운을 옥죄어오던 공간의 일그러짐이 단숨에 부서져 나간 것이다.
끄가가가강!
[이 무슨!? 검에 공간을 압축해 담아낸다고!?]
그것을 본 가면인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간제어능력을 가진 그는 이진운의 검식에 담긴 힘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럴 리가! 검술로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 공간 능력도 없는 네놈이 대체 어떻게!?]
가면인의 상식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공간을 베는 건 압도적인 속도와 극한까지 압축된 힘으로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공간 자체를 제어해 압축하다니! 이건 검술의 카테고리를 넘어선 영역 아닌가!
그렇지만 이진운에게선 지금도 공간 계통에 대한 이능이 감지되지 않았다. 만일 있었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진운은 일그러지던 공간을 완전히 부수고 뛰쳐나오면서 외쳤다.
“확실히 네 말처럼 내겐 공간을 다스리는 이능 따윈 없지. 하지만 무예라는 것은 자신의 몸 하나로 대우주의 섭리를 체현하는 것! 공간제어라고 해서 예외일 것 같으냐?”
[우웃!]
신음을 터뜨리며 물러서는 가면인. 하지만 그의 이능은 이미 이진운의 진법에 의해 저하된 상태.
공간을 주물러 간격을 벌릴 수 있는 거리도 그만큼 제한되어 있었다. 불과 몇 걸음 떼는 순간 이진운의 신형이 무려 수천 미터를 단축해왔다.
공간이동이나 다를 바 없는 축지성촌의 한수였다. 그리고 뒤이은 한 수가 가면인의 전신을 노렸다.
급풍쾌검(急風快劍) 제 3식. 노상전폭(怒商傳爆)
검신을 타고 맹렬히 휘도는 검경!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를 연상케 하던 강렬한 바람은 일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하듯 바로 가면인의 코앞에서 그 위세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콰우우우!
[웃기지 마라!]
가면인이 악을 쓰며 즉각 방어에 나섰다. 눈앞의 공간을 격리해서 노상전폭의 검풍을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가면인이 이렇게 대응할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검을 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오른손 검지로 가면인을 정면으로 가리켰다.
“이걸로 끝이다!”
상대의 최후를 고한 그 순간, 그가 준비한 절초가 상대를 꿰뚫었다.
분광십팔수검 절초. 북광진암(北光鎭暗)
그것은 어떠한 기척도 흔적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돌연 출현한 의형강기가 순식간에 가면인의 가슴팍을 관통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북광진암. 검의 기척과 존재감을 죽인 채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 한 수였다.
[컥! 커으··· 대체 이게 어떤?]
가면인이 낮은 신음을 터뜨리며 경악했다. 분명 자신이 있는 이곳과 외부의 공간은 서로 유리되어 있는 상태. 그런데 상대의 공격이 격리된 공간 안에서 출현해 자신을 꿰뚫다니···당하고 나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네놈··· 설마 내 공간제어에 간섭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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