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06화
피처럼 붉은 기운이 광포한 기세로 번져나갔다. 그 성질이 어찌나 거칠고 사납던지 기운이 번져나갈 때마다 이 일대의 모든 게 초토화 되고 있었다.
쿠릉! 콰콰콰!
이에 휩쓸린 건물들이 도미노처럼 허물어지면서 무수한 잔해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그 잔해들조차 다시 기운의 여파에 휩쓸리면서 이젠 옛 흔적조차 알아보기 힘들 만큼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의 세기말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사령관 님!]
“아아, 걱정하지 마. 함장은 인베이더 잔당 소탕이나 신경 써.”
이쪽의 상황을 감지한 건지, 인베이더 함대를 정리하고 있던 아르페인이 통신을 보내왔다.
이진운은 아르페인이 괜한 걱정을 할 것 같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얼버무렸지만, 사실 그렇게 가볍게 볼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붉은 기운에 의해 도시 자체가 완전히 갈려나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인베이더의 공격으로 거의 기능 마비 상태에 가까웠던 행정수도는 이제 재기 불능마저 넘어 폐허나 다름없이 변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붉은 기운의 주체인 글랙스가 있었다.
고오오!
말 그대로 인간 형상을 한 재해. 그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기운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짙고 강렬해졌다.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이런 힘을 갖게 된 거지? 이 작자, 좀 전만 해도 삼류 수준도 못되는 기운만 보유하고 있었던 건 확실한데 말이야.”
호신강기로 붉은 기운의 접근을 원천 차단한 이진운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까지 달라질 순 없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어떤 각성이나 깨달음에 의해 변할 순 있지만, 고작 삼류 수준에서 절대고수를 웃도는 단계까지 단번에 뛰어오를 순 없는 일이다.
물론 글랙스가 그동안 자신의 힘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는 가정도 해 볼 수 있었지만, 그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진운 앞에선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가정이었다.
아직 전생의 경지는 다 회복하지 못했지만, 그의 안목과 격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분명 삼류 수준이었어. 무공이 아닌 이능이니 정확한 평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수준은 예전의 클레브보다 더 밑이었지. 그런 녀석이 이런 힘을 발휘해? 인베이더와 싸우던 잠깐 사이에 뭔가 야료가 있었군.’
“크어어어!”
아니나 다를까. 글랙스의 입에서 돌연 괴성이 터져 나왔다. 두 눈은 이성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진운은 그제야 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렇군. 폭주상태였나? 갑자기 얻은 힘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무공으로 친다면 주화입마 상태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제압하는 게 좋겠군.”
이진운이 천천히 다가서자, 폭주 상태인 글랙스도 드디어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다. 현재 뭔가를 판단할만한 이성은 없었지만 그가 가진 본능이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크어어!”
느닷없는 괴성과 함께 글랙스가 이진운을 향해 오른손을 활짝 펼치며 뻗어보였다. 그러자 단순히 전신으로 뿜어대던 붉은 기운이 한데 응집되면서 성대한 빛줄기가 되어 날아들었다.
이건 호신강기만으로 막아낼 만한 위력이 아니었다.
쿠릉, 콰우우!
도시 하나를 그대로 밀어버릴 것 같은 주홍빛 빛기둥.
그 순간, 수직으로 그어진 이진운의 검세가 공간을 찢었다. 그것은 마치 한 줄기 벼락같았다.
쩌저정!
천룡대라삼검(天龍大羅三劍) 제 2식. 천룡전광(天龍電光)
찌르르 울리는 한 줄기 뇌성!
글랙스의 붉은 빛기둥에 비한다면 매우 가냘픈 궤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깃든 의념은 그 어떤 것도 베어낼 수 있는 개념에 가까운 힘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촤아아악!
비단폭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붉은 섬광기둥이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면서 이진운의 양 옆을 스쳐지나갔다.
“음, 꽤 센데?”
이진운은 짤막하게 감상을 토해냈다.
천룡무상검의 원형이 되는 점창의 절학인 천룡대라삼검. 그 중 2식인 천룡전광은 세상 그 무엇보다 빠르고 강한 극쾌극강의 한수였다.
그런데도 완전히 베어내질 못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기운만 베어내어 상쇄하는 것이 전부였다.
제대로 베어냈다면 일부분만 갈라지는 게 아니라 적색 빛 너머에 있던 글랙스마저 베어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아직 아무런 짓도 안 했는데도 대뜸 공격부터 날려 오다니··· 내가 자기한테 위협이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건가?”
현재 이진운은 글랙스를 쉽게 제압하기 위해 기척은 물론 기운까지 내부로 갈무리한 상황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그가 바로 눈앞에 서 있어도 있는 줄도 모르는 게 정상인데, 놈은 보자마자 위협요소라 판단하고는 즉각 공격부터 날려 왔다.
그렇다면 본능적인 직감만큼은 거의 야생짐승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크어어!”
이진운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것에 더 위협을 느낀 것일까? 글랙스가 더욱 흉험한 기세를 일으키면서 이진운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맹수가 사냥감이나 대적을 만났을 때 상대를 탐색하면서 보이는 반응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뿐, 곧 전투에 돌입하는 맹수마냥 달려들었다.
콰앙!
전신에 어린 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치솟는 순간, 글랙스의 신형이 마치 한 줄기 빛이 되어 날아들었다.
어지간한 실력자들도 일순 한 줄기 빛이 지나간 정도로 인지할 만큼 엄청난 속도였다.
콰아앙!
지축이 뒤흔들리면서 사방으로 충격파가 번져나갔다. 그것은 이진운이 글랙스가 뻗어낸 주먹을 검으로 받아내며 발생한 여파였다.
반경 수백 미터의 지표면이 깊게 내려앉았다. 이진운이 상대의 공격을 이화접목의 수법을 사용해 자신이 발을 딛고 있던 땅으로 흘려보낸 결과물이었다.
허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첫 격돌을 시작으로 글랙스의 무자비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콰르릉! 콰앙! 쿠쿠쿠!
붉은 섬광과 검의 궤적이 부딪치면서 무수한 폭발이 일어났다.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운석이 떨어졌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거대한 크레이터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었다.
특히 글랙스의 공격은 빛이 번뜩인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만큼 빠르고 강했다. 붉은 기운 자체를 마치 부스트처럼 사용해 순간적인 속도와 힘을 크게 증대시킨 것이다.
이진운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힘을 휘두르는 방식은 마구잡이지만, 그 크기만큼은 압도적으로 커. 적어도 내 몇 배는 된다.’
이건 인간이라기보다는 거의 고위 인베이더에 가까웠다. 고위 인베이더들이 인간을 압도하는 괴물인 것은 바로 같은 동급의 격을 가진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스펙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관리국에서도 비슷한 등급의 고위 인베이더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둘 이상, 서너 명의 적정인원이 함께 공격할 것을 권장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진운에겐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힘이나 스펙의 차이 따윈 극고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무리(武理)만으로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운, 어딘가 익숙하군.’
글랙스가 공방에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붉은 기운! 그 정체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분명 이 기운을 어딘가에서 접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글랙스에게서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괴리감이 들어서였다.
‘일단은 제압해서 잡아가야겠어.’
당장 뭘 해보려 해도 놈은 지금 일말의 이성조차 없는 상태. 어떻게 된 건지 자초지종이라도 캐내려면 일단은 멀쩡한 상태로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이진운의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일까? 글랙스를 상대하는 그의 움직임도 보다 압박적으로 변했다.
지금까지는 공격을 받아주면서 상대를 탐색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제대로 제압할 생각으로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잘 싸우던 글랙스의 손발이 금세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글랙스는 애당초 전투와는 무관한 능력을 가진 자였다. 제대로 된 무예를 배운 적이 없었고, 전투경험이라곤 더더욱 전무했다. 지금까지 이진운을 상대로 분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본능에 몸을 맡긴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었다면 오히려 싸울 생각조차 못한 채 순식간에 제압당했을 것이다.
“크우우!”
글랙스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사나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적의 강함에 압도된 짐승이 억지로 강한 척 하느라 내뱉는 울부짖음이었다.
“본능대로 움직인다고 해서 잘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면, 중원의 무인들은 전부 감각류 무공만 사용했겠지.”
그랬다. 중원에도 그와 비슷한 의도로 창안된 무공들은 여럿 있었다. 정해진 투로나 체계를 없애고 본능적인 전투감각만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낭인들의 감각검이나, 중원에서도 잘 알려진 맹수의 야성을 본떠 만든 남만 야수궁의 무공이 그러했다. 괴이신랄 하면서도 정해진 투로와 형태가 없는 만큼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무공들을 사용한 무인이나 문파 중 단 한 번도 천하제일인을 배출한 곳은 없었다. 아니 천하제일인은 고사하고, 중원 서열 10위 권 내에 든 적조차 전무할 정도였다.
그것은 모든 감각류 무공들이 가진 실질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무(武) 단순히 무의식적 본능에 맡기는 것만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익힌 무공은 본능이자 이성이었고, 논리이자 감성이었다.
그 둘이 온전히 하나로 완성될 때에 비로소 무의 궁극을 향한 시작점이 열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인 현경이었다.
그리고 이진운은 그런 현경마저 넘어 인간을 초월한 반선지경에 발을 들였던 절대자. 지금은 환생을 거치며 절대고수로 올라서는 문턱에 머무르고 있다지만, 고작 어쩌다가 큰 힘을 얻어 폭주하는 글랙스 따윌 제압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검 끝에서 시작된 폭포수 같은 검기가 수많은 흐름을 그려냈다. 그것은 다채롭고 현란해서 단순히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정도로는 막을 수 없었다.
제아무리 야성적인 감각 운운한다 해도 본능은 어디까지나 본능일 뿐, 무수한 변화의 핵심을 읽고 대응할 능력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막아내다가 손발이 꼬이는가 싶더니, 곧 검 끝에서 쏟아진 검기 앞에 전신의 혈도를 제압당하고 말았다. 검기점혈의 수법이었다.
글랙스는 그 즉시 굳어진 석상마냥 정지해 버렸다.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당황한 듯 성난 소리를 터뜨렸지만, 그런다고 해서 제압된 혈도가 풀리는 건 아니었다.
“제압도 끝났겠다. 이제 데려가기만 하면 되겠군. 정신을 차리고 나면 뭐라고 하는지 어디 들어나 봐야겠어.”
묻고 싶은 건 많았다. 그가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지게 됐는지, 그리고 그와 연관된 배후는 어떤 자들인지도 알아봐야 했다.
카멜롯으로 돌아가기 위해 놈을 어깨에 들쳐 메려 하던 그때였다.
갑자기 시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공간 자체가 뒤틀리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그가 어깨에 들쳐 메서 데려가려 했던 글랙스의 신형도 손이 닿을 수 없을 만큼 점점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마치 공간과 공간을 강제로 잡아 당겨서 그 사이의 거리를 한없이 늘리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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