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05화
그리고 그때부터 아이틀란 행성에 사는 모든 인간들을 향한 그의 악의가 실체를 갖기 시작했다. 이주민과 토착민의 불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토착민들의 열등감을 자극시켜서 극단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게 만들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토착민들을 차별하는 정책이나 법안을 다수 입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만들어진 계기나 책임을 이주민들에게 떠넘겼다.
그 뒤에 몇 가지 소문을 퍼뜨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책과 법안이 입안된 것은 토착민들을 주류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하기 위한 이주민들의 계획적인 음모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소문을.
그 뒤에는 언론을 움직여 토착민이 이주민에게 부당한 경우를 당한 사례들을 기사화하자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알아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식자들도 있었다. 토착민을 차별화 하는 분위기가 잘못됐다며 정부를 성토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금세 사라졌다.
어차피 강단도 없는 것들이다. 약간씩 압박만 줘도 그들의 입을 닥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과정 중에는 불법적인 일이 자행되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처럼 행성 전체가 토착민과 이주민 세력, 이렇게 극단적인 형태로 양극화 된 것도 다 그가 암중에서 조장한 탓이 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도움을 받은 만큼 가면인과 그 배후 세력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로 움직였다.
‘이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는 갈수록 가면인과 그 배후에 대해 의문만 들었다. 자신은 이 행성의 인간들을 증오하기 때문에 멸망하길 원했지만, 이놈들은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아이틀란 행성의 멸망을 부추기는가.
‘어쩌면··· 놈들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지.’
가면인과 그 세력에 대한 그의 추론은 어느덧 인외의 존재에 이르렀다. 이 넓은 우주에서 그런 존재는 딱 하나 있었다.
인베이더.
과연 가면인이 인베이더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와 직간접적인 연관은 있을 거라고 글랙스는 내심 짐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설령 인베이더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증오를 쏟아낼 수만 있다면, 설령 상대가 악마라 해도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놈들도 자신들의 의도를 숨길 생각이 없었는지, 아예 대놓고 인간의 멸망을 부추겼다. 글랙스를 통해 아이틀란 행성은 물론 관리국과 연계된 군사 기밀을 손에 넣고는, 주변 성계에 포진된 절대방위선의 허점을 이용해 인베이더들을 아이틀란 행성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이브는 순식간에 구축되었고, 행성방위군은 제대로 된 대처조차 못했다. 가면인의 세력을 통해 이곳의 정보를 알고 있는 인베이더는 철저히 약점만 공략해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불화와 갈등이 심화되면서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게 된 탓도 컸다.
“그래,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말 그대로 마지막 선까지 넘어섰다. 인베이더를 끌어들인다는 수단까지 사용한 이상, 절대 실패할 수도 실패해서도 안 되는 인생 최대의 마지막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관리국에서 파견한 함대의 사령관 때문이었다. 거듭된 폭탄 테러로 혼란을 부추겨 인베이더에 대한 대응 능력을 저하시키는 데엔 성공했지만, 올레그를 처형함과 동시에 행성정부의 중요 핵심 시설과 인력을 타격할 예정이었던 폭탄 테러는 불발로 끝나버렸다.
“···이진운.”
그는 방공호 구석에 포박된 채, 그 이름을 짓씹듯 되뇌었다. 이제 겨우 마지막 한 걸음만 남았거늘, 고작 한끝 차이로 들통 날 줄이야.
관리국의 개입으로 실패할 변수가 생길까봐 서두른 게 문제였다.
“이대로 실패한 채로 끝낼 순 없어!”
본래대로라면 폭탄 테러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순간, 인베이더의 대군이 들이닥쳐서 모든 것을 끝장냈어야 했다.
하지만 이진운은 인류의 종말로 이어질 최후의 폭탄 테러를 저지해냈고, 행성방위군의 긴급 지휘권까지 손에 넣음으로서 인베이더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손에 넣었다.
물론 피해는 적지 않겠지만, 글랙스가 바라는 아이틀란 행성의 멸망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크으··· 젠장!”
그의 입에서 욕지기가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도망쳐서 다음을 기약할 생각이었는데, 대체 놈이 무슨 수를 쓴 건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혈도를 제압당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글랙스로서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무슨 능력인지 당최 알 수가 없군. 날 포박한 건 그냥 형식이라는 건가?”
그 점이 더 좌절스러웠다. 묶인 포박은 어찌어찌 풀 수 있지만, 몸이 아예 움직이지 않는 건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
그는 갈수록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전투가 끝나고 나면 이진운이 자신을 직접 끌고 갈 게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도망갈 기회조차 없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죽는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복수에 대한 원념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런 거라고?
물론 목숨 따윈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끝장나는 이런 결말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그의 눈앞에 웬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뭔가 싶어서 눈을 움직이자, 그에게 익숙한 가면인의 모습이 보였다.
[꽤 꼴사나운 모습이군. 성공할 수 있다고 그렇게나 자신 있게 말하더니, 결국 이런 꼴인가?]
“시끄러워! 이번 실패는 내 책임만 있는 게 아니야. 바로 네놈들의 책임도 크다고!”
빈정대는 가면인의 말에 짜증스럽게 받아친 글랙스. 하지만 가면인은 계속 입을 놀렸다.
[네 계획은 실패했다. 그냥 실패도 아니고 대실패더군. 네가 세운 인베이더 놈들은 지금 패퇴하고 있는 중이다. 성멸 급 둘은 소멸되었고, 남은 전력도 이젠 얼마 안 남았지.]
“뭐? 성멸 급이 둘이나 되는데도?”
믿기지 않는 소식에 글랙스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게 다 이진운이란 놈의 짓이지. 그야말로 괴물 같은 검술 실력으로 성멸 급 인베이더 둘을 한순간에 해치웠다. 인베이더 함대도 놈의 인피니티 킹덤에게 농락당하다시피 했고.]
“성멸 급 둘을 상대할 실력자였다니···.”
듣고서도 실감이 가질 않았다. 성멸 급은 말 그대로 함대가 뒷받침해줄 경우 어지간한 별 하나를 초토화 할 수 있는 고위 인베이더를 나타내는 단어였다.
그런 괴물 둘을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워낙 위험한 작자라서 성멸 급 둘을 보냈는데도 당했다. 놈의 전력을 좀 더 상향 평가하기로 했다.]
“위험한 작자라고? 전부터 그 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나 보군.”
[잘 알지. 그 자 덕분에 우리 계획들이 하나하나 좌초되고 있으니까. 하긴 아이틀란이 워낙 변방 행성이라서 아직까지 안 알려진 건가? 이진운은 요즘 들어 꽤 유명해진 자다. 특히 관리국 본성에서는 핫한 유명인사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글랙스는 가면인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럼 네놈들이 도대체 한 게 뭐냐? 관리국에도 손을 쓴다고 하더니, 어디서 저런 성가신 작자를 지원 오게 만든 거지? 감당 못할 자였으면 아예 오지 못하게 막았어야지. 관리국 안에도 네놈들과 뜻을 함께 하는 고위층들이 있다며?”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놈이 보유한 전투능력도 다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었지. 그런데 놈이 숨기고 있던 전투능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놈은 로일라 해적단을 제압하고도 모자라 성멸 급 둘을 제압해냈어. 이건 우리에게도 계산 밖의 일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런 무지막지한 작자가 아직까지 알려진 것조차 없다니···”
이젠 더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자가 로일라 해적단에 이어 성멸 급 둘까지 상대했다고 하니, 가면인들이 놈의 전력을 오판한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어서였다.
“그럼 앞으로 어쩔 셈이냐? 이진운이란 작자를 감당 못할 거라면 계획은 좌초된 거나 다름없는데.”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네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지만]
“뭐지?”
조건이란 단어기 조금 걸리긴 했지만, 방법이 있다는 말에 절로 귀가 솔깃해졌다.
[일단 너에게 새로운 힘을 주겠다.]
“그게 무슨 뜻이지? 힘을··· 주겠다니?”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글랙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였다.
[그 말 그대로다. 네가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힘을 부여해 준다는 말이지.]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정말로 그런 게 가능하다고?”
가면인이 말한 힘이라는 게 단순히 어떤 지원이나 병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글랙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불가능하진 않다. 그러자면 약간 준비물이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이미 다 갖춰 놓았지. 우린 네가 가진 페르소나하고는 전혀 다른 힘을 부여해줄 수 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가 아는 영능이란 건 누군가에게 주거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영능이란 건 본디 각자가 타고난 영적 자질이 구체화 된 것을 뜻한다. 학습을 통해 습득하는 이능조차 결국은 개인의 천부적인 자질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이능을 타인에게 인위적으로 부여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면인이 자신에게 허튼 소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좋은 방식은 아니지. 이건 타인이 갖고 있던 이능을 네게 주입하는 것이니까. 수시로 고통도 따를 테고, 종종 자기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괴리감도 생기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다면 ]
“그 힘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지?”
[흐음··· 일단은 이 행성을 엉망으로 만들던 성멸 급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라 해두겠네. 더 재밌는 점은 자네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할 여지도 있다는 것이고.]
이진운에게 당한 성멸 급과 동급이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글랙스는 곧 생각을 달리하였다.
애당초 전투 능력이 전무했던 자신이었다. 그런 힘이 주어진다면 활용하기에 따라선 그 효용이 무궁무진할 수도 있었다.
‘그래, 전투능력을 얻는다고 해서 직접 나서서 싸울 필요는 없지. 그 힘을 내 페르소나와 연계시키면 놈들의 본진으로 숨어들어가 초토화 시켜버릴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노력하기에 따라 더 성장할 수도 있다고 하니 기대해 볼만도 했다.
[그럼 결정은 했겠지?]
“······.”
글랙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새롭게 이능을 얻게 된다고 하니 긴장이 되어서였다.
그런 글랙스를 내려다보던 가면인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일종의 보석처럼 보이는 작은 결정체였다. 영혼을 빨아들일 듯한 칠흑빛으로 빛나는 보석은 얼핏 봐도 무척이나 불길해 보였다.
“혹시, 그 보석이 내게 준다는 이능인가?”
[그래. 이게 바로 네게 줄 이능을 결정화한 것이지. 예전에는 누군가의 이능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네 것이 될 것이다.]
가면인은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그 보석을 글랙스의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입에 들어간 그 보석은 저절로 녹아서 삼킬 새조차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갑자기 보석을 삼킨 것에 대해 잠시 얼떨떨해 하던 글랙스가 곧 비명을 내질렀다.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격통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끄아아아아!”
그렇게 괴로워하는 글랙스를 내려다보면서 가면인이 조소를 흘렸다.
[축하하네. 오늘 부로 인간의 탈을 벗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을 말이야.]
가면인은 내심 즐거워졌다. 과연 글랙스가 오늘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 아니면 그 힘으로 예전처럼 복수에만 미친 괴물로 날뛰게 될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통으로 부르짖는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 높아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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