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04화 (105/448)

5권-04화

궁핍한 생활 속에서 가족들은 점점 여위어갔다. 병이 걸려도 제대로 치료해 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가족처럼 대했던 직공들은 볼 때마다 그를 경멸하거나 침을 뱉었고, 같은 이주민 출신들도 그렇게나 퍼주더니 꼴좋게 당했다며 손가락질 했다.

자신이 대체 왜 이런 미움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뭘 잘못했기에······.

그의 한탄은 곧 분노가 되었고, 그것은 복수에 대한 갈망으로 피어났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글랙스는 단순히 그들을 원망했을 뿐, 어떻게 해보겠단 생각은 없었다.

점점 병들어가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뛰어다녔다. 하루에 서너 가지 직종을 돌아가면서 일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런 노력에 하늘이 감동이라도 한 것일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에만 열중하던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이능을 각성하게 되었다.

그 이름은 페르소나(Persona). 자기 자신에게 가상의 인격을 가면처럼 덧씌워서 다른 존재로 변화하는 능력이었다.

언뜻 듣기에는 메소드 연기가 능력화 된 것 같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능력이 발동되면 단순히 메소드 연기의 수준을 넘어, 얼굴의 생김새와 체형까지 대상과 똑같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더 대단한 건 자신이 쓰고자 하는 가면이 가상의 존재이든 실존하는 존재든 상관이 없다는 점이었다. 설정만 치밀히 짜고 원하는 얼굴과 생김새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와 똑같이 변했다.

전투와는 전혀 무관한 공능을 가졌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선 가히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능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왜 이런 이능을 얻게 되었나 크게 한탄했다.

지성체와 인베이더가 존망을 건 전쟁을 하고 있는 지금, 가장 최고로 쳐주는 이능은 바로 전투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생산과 개발, 보조 능력들도 죄다 전투나 군수와 관련 있는 것들이 높은 대접을 받았다.

‘대체 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뭐지?’

기껏 해봐야 드라마나 극단의 배역 연기가 전부였다. 하지만 연기를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야 돈만 벌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하겠다는 글랙스를 비중 있는 배역으로 써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의 능력을 신기하게 여겨서 몇 번 그럴듯한 단역도 되어 봤지만, 금세 배제되고 말았다. 아니, 기존의 배역들은 물론 이 계통의 직종에서 완전히 퇴출된 것이다.

이유는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혹시라도 글랙스가 재기할 것을 우려한 자들이 여러 경로로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치를 떨었다. 자신의 공장을 망하게 만든 뒤 서로 나눠 가진 걸로도 모자라, 후환 자체를 남기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좌절과 분노로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선 달려가서 놈들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놈들은 가진 자들이었고, 자신은 하루 벌어 겨우 먹고 사는 하층민이었으니까. 찾아가봐야 복수는커녕 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조차 넘지 못하고 늘씬 얻어맞고 쫓겨날 게 분명했다.

기껏 각성한 능력이 전투적인 이능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때만큼은 미치도록 아쉬웠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글랙스의 아내가 병환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공장이 도산한 이후, 그동안 어떻게든 약값만큼을 벌어서 간신히 연명시켜왔던 아내였다. 허나 놈들에 의해 일자리를 잃은 뒤에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결국 아내를 잃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남은 자식들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보내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또 다른 비보를 전해 들었다. 그를 조금씩이나마 도와주던 친인들조차 여러 사정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글랙스는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서였다.

그는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움직이면서 친인들의 주변을 샅샅이 캐보았다.

전에는 전투용이 아니라 쓸모없다고 여겼던 페르소나 능력이 이럴 때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끔찍한 사실이 밝혀졌다.

놈들은 글랙스의 일가를 핍박한 걸로 모자라 그의 주변 친인들에게까지 손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대충 정황만 봐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놈들!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들에게 복수하고 만다! 언젠가 네놈들의 쓸개를 산채로 끄집어내 씹어 먹어버릴 테다!”

그는 홀로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복수를 하고자 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가진 것은 없었고, 믿을 만한 동료도 전무한 상태. 말 그대로 가진 거라곤 맨 주먹 뿐이었다.

자신의 목숨 따윈 아깝지 않았지만, 제대로 원한도 갚지 못하고 헛되이 죽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때부터 글랙스는 암흑가 쪽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위험천만한 곳이긴 했지만, 이곳에서라면 다방면으로 음지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은 자신이 표적으로 삼은 원수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만한 입지와 힘이 필요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페르소나의 능력으로 사람을 속이고, 계략을 꾸며 적들을 함정에 빠뜨리면서 점점 역량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나름대로 제법 성장했다고 여기고 있는 지금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가면 갈수록 원수들에 대한 정보는 오리무중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공장을 노린 작자들의 수작질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알면 알수록 그런 단순한 게 아닌 것 같아서였다. 뭔가 더 큰 게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기약조차 없는 복수로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가던 그때, 누군가가 그를 찾아왔다.

지금까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자였다. 처음에는 만나 볼 생각조차 없었지만, 전해들은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내 진짜 신분을 알고 있다니···이 자, 대체 정체가 뭐지?’

글랙스는 심각하게 반응했다. 상대는 그의 진짜 이름과 내력을 알고 있었다. 뒷세계에 몸담은 이후, 그의 정체를 알아낸 자는 단 한명도 없었거늘··· 대체 무슨 수로 알아낸 거지?

거기까지였다면 그냥 몸을 감추거나 상대를 경계했을 테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글랙스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같이 해왔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가면을 쓴 사내. 그가 던진 첫 말은 충격적이었다.

[당신이 바라는 원수들의 정보를 알려주지. 그 뒤에 숨겨진 실체까지 모조리 말이야. 아니, 원한다면 원한을 갚는 것도 도와줄 요량도 있다.]

“대체··· 뭐냐, 너희들은? 내게 바라는 게 뭔데 그런 제안을?”

전혀 예상 못했던 제안에 글랙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너의 그 능력, 꽤 쓸 만하더군.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계획에 네 능력이 필요하다.]

“내 능력에 대해 알고 왔나 보군. 하지만 이런 게 다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거지? 전투력이라고는 전무한, 남을 속일 뿐인 이 능력이.”

[첩보나, 정보교란 등에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능력이지. 경우에 따라선 내부 혼란을 조장할 수도 있고.]

“그 말은··· 날 꽤 위험한 일에 이용할 생각이군.”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던 것 같던데? 안 그런가?]

“······.”

글랙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이 사실 틀리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위험을 감수할 각오 따윈 이미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글랙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때부터 가면의 사내는 그에게 원수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복합 군수업체라니 그게 무슨?”

깜짝 놀라 되묻는 그에게 가면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해주었다.

[당신네 공장에서 꽤 성능 좋은 센서를 개발했더군. 이걸 약간만 군사적인 용도로 유용하면 색적 능력을 상당부분 향상시킬 수 있어. 종래의 것에 비한다면 거의 12%정도의 향상이지.]

말이 12%지, 그 정도면 가히 파격적인 수준의 성능향상이었다. 고작 5%를 크게 밑도는 성능향상을 위해 매년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는 것이 군수업체들이다. 12%라면 그들이 수십 년을 연구해도 닿을지조차 의문스러운 성과물인 것이다.

글랙스가 아연한 표정으로 뇌아렸다.

“난 그저 모듈밴더에 들어갈 반응센서를 개발했을 뿐인데······.”

[그래, 당신은 그 센서를 개발하고도 그 가능성에 대해선 제대로 몰랐었지. 애당초 개발 할 때부터 병기용으론 고려도 안 해봤을 테니까. 하지만 다른 자들은 아니야. 그 가치를 알아보고 어떻게든 손에 넣겠다고 작정을 한 거지.]

결국 그의 기술을 빼앗기 위해 움직인 사양 군수업체들이 움직였고, 그것이 글랙스 일가의 비극을 초래할 각종 흉계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해가 안가. 놈들이 내 기술을 탐내서 수작을 부린 건 그렇다 쳐. 하지만 내가 망한 뒤에도 이토록 집요하게 압박한 건 대체 왜지? 놈들이 원하는 기술은 이미 손에 넣은 상태였는데?”

[당신의 기술을 빼돌려 얻은 건 맞는데, 그걸 완전히 재현하는 데엔 실패했거든. 그래서 계속해서 당신을 노렸지. 일부로 궁지로 몬 다음, 손을 내미는 척 기술을 전부 털어놓게 만들 생각으로.]

“···그랬던가? 하지만 난 그놈들에게 어떤 제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아무 일도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바람에 병든 내 아내와 자식들만 세상을 떠났지.”

그때만 생각하면 살기가 치솟는지, 이를 악무는 글랙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가면인의 말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전에 당신에게 제안이 갔어야 했지. 그런데 놈들은 그러질 못했어, 왜냐고? 하필이면 그 가치를 알아본 자들이 또 있었거든.]

“그게 무슨?”

[당신 하나를 두고 서로 다투었다는 말이지.]

“아······.”

무슨 뜻인지 깨달은 글랙스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 자신을 노렸던 군수업체들 외에도 다른 군수업체들까지 후발주자로 끼어들면서 난전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견제와 견제··· 결국 자네는 어느 누구도 먹지 못하는 계륵이 되었지. 그래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상황에서 당신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아마 당신이 이런 특이한 능력을 사용해 뒷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녀석은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을 거야.]

“···그랬군. 그랬었나? 말 그대로 촌극이었군. 그리고 나와 내 가족들은···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런 촌극에 희생된 거였단 말이지?”

그의 입술을 비집고 작은 실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내막을 알고 나자, 참으로 기가 막혔다. 고작 그런 이유로 희생된 자신과 가족, 친인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새삼 뇌리로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가족처럼 대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기술을 빼돌리고, 파업을 일삼으며 공장을 도산하게 만든 주범 중 하나인 토착민 출신 직공들이었다.

그들만 생각하면 쓰디쓴 배신감과 분노에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토착민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비슷한 업종의 다른 업체를 운영하던 이주민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공장이 도산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광경을 보면서도 오히려 꼴좋다는 듯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다. 그리고 그가 망하면서 남긴 자산들을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결국 토착민이든 이주민이든 다를 게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인간들이 다 악성의 종자들인 것 같았다.

그나마 나은 자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켜보려던 노조위원장이었지만, 그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을 외면해 버렸으니까.

이젠 원수들뿐만 아니라 이 행성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인간들이 증오스러웠다.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절제 없는 짐승마냥 탐욕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추악하고 혐오스러웠다.

그의 극렬한 분노를 읽은 가면인이 입을 열었다.

[꽤 무서운 얼굴이군. 원수들의 정체를 알게 되어서인가?]

“그래. 모든 게 명확해졌으니까.”

[그럼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지, 당신은?]

“일단은 원수부터 갚아야지. 그리고 이 행성의 인간들을 모두 지옥으로 떨어뜨려 주겠어.”

[흐음, 좋은 마음가짐이군. 생각보다 스케일이 커졌지만, 자네의 목표라면 우리의 목적과 아주 잘 맞겠어.]

서로의 목적이 일치함을 알게 된 뒤, 글랙스는 서슴없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 뒤, 글랙스는 새로운 위장신분부터 만들었다. 대외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선 글랙스의 이름과 얼굴로는 불가능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게 그룬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 신분을 앞세워 거짓 웃음을 짓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과 세력이 필요했지만, 그것들은 전부 가면인이 지원해 주었다.

그 결과, 글랙스는 아이틀란 행성을 대표하는 통합대통력의 직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 온갖 더러운 일들이 암중에서 벌어졌지만,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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