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01화
온 사방에 화광이 충천하고 있었다. 폭발에서 시작된 불씨는 번져나가 광장 인근의 시가지를 태우기 시작했고, 이젠 하늘마저 붉게 물들 지경이 되었다.
공포와 혼란에 빠진 거리의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개미떼처럼 흩어지고 있었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경찰들마저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 광경을 향해 시선을 주던 그룬키, 아니 지금은 예전의 본명으로 돌아간 글랙스가 비웃듯 말했다.
“참으로 볼만한 모습이야. 안 그런가? 이게 바로 인간의 본성이지. 나 먼저 살기 위해 도망가겠다고 서로를 짓밟는 저 모습. 저 추악한 모습이 인간들의 진면목이야.”
그의 입가에 떠오른 잔인한 미소에 올레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설마 37년 전의 그 일로 우리 토착민들에게 원한이 생겨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거냐?”
“그럴 리가. 당시 내가 원한을 갖게 된 것은 단순히 토착민 하나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나와 내 가족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건 은혜도 모르는 토착민 놈들이었지만, 이주민들도 만만치 않았지. 아니, 그보다 더 악질적이었어.”
거기까지 말한 글랙스가 올레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광기에 찬 시선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나도 간신히 깨닫고 말았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라는 것을. 있어봐야 돌이킬 수 없는 해악만 끼칠 뿐 아무 존재 가치가 없어. 차라리 깨끗이 없어지는 게 바로 진정한 친환경이지. 그래서 결심했다. 이 땅에서 토착민과 이주민 모두를 쓸어버리기로.”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물론 네놈이 사주한 테러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긴 했지만, 그 정도로 이 행성의 인간이 모두 멸절될 것 같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뱉는 올레그. 폭탄 테러에 휩쓸려 죽은 사람이 많긴 했지만, 이 행성의 전체 인구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테러로 잠시간 혼란은 빚어질지 몰라도, 금세 질서를 되찾을 것이다.
아니, 그 점에 대해선 오히려 통합 대통령까지 한 글랙스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아, 그거야 나도 잘 알지. 인간의 끈질김이 잡초보다 더하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극약처방을 하기로 했다.”
“극약처방이라니··· 또 무슨 짓을?”
그 섬뜩한 단어에 놀라 되묻는 올레그. 글랙스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뭣 때문에 이렇게 테러로 혼란을 조장하고, 세상의 이목을 네놈에게 집중시켰다고 생각하나? 너도 알다시피 인간의 혼란을 바라고 있을만한 존재가 있을 텐데.”
글랙스가 던진 말 속에서 무언가를 눈치 챈 올레그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럴 리가! 설마 네놈, 인베이더를?”
“그래, 바로 맞췄군. 인베이더 놈들 때문이지. 놈들이라면 이 혼란의 틈을 놓치지 않을 터. 놈들이라면 내가 바라는 바를 이뤄 주겠지.”
“이 미친 놈! 네놈의 개인적인 원한을 이 행성의 인간 전체에게 풀겠다는 거냐? 그런 짓을 왜!”
“하하하··· 그래, 나는 미쳤지. 정상이 아니야. 그때 그 일을 겪었던 내가 정상일 것 같나?”
글랙스는 올레그의 앞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광기로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순순히 긍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욱 광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복수심에 미쳐서 살아왔다. 나와 내 가족, 친인들을 궁지에 몰았던 인간들도··· 그것을 방조하거나 그 뒤에서 조장했던 자들도 다 마찬가지야. 그래서 내가 얻은 결론이 바로 이거였다.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거. 이런 이기적인 생물이 존재해봐야 이 행성은 물론 저 넓은 우주에까지도 영원히 해악만 끼치겠지. 없어지는 게 나아.”
거기까지 말한 글랙스의 얼굴이 올레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멀리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대뜸 내뱉었다.
“이제 때가 되었군. 놈들이 말한 대로라면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었을 텐데.”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인간의 멸망을 바라는 글랙스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인간들에게 결코 이롭지는 못할 게 틀림없었다.
“역시 그런 거였나?”
그때였다. 글랙스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섬뜩하고도 차가웠다.
글랙스가 놀라 황급히 등 뒤를 돌아본 순간, 낯익은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넌? 관리국에서 왔던!”
“그래, 이진운이다.”
그러자 글랙스의 얼굴이 낭패함으로 물들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설마, 지금까지 다 듣고 있었나?”
“그래, 다 듣고 있었지. 최근부터는 네놈 주변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넌 이번 폭탄 테러 사태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으니까.”
“역시··· 그렇게 됐었나?”
글랙스도 이런 경우를 아주 예상 못했던 건 아니었다. 워낙 계획을 서두르는 바람에, 자신에게 어느 정도 혐의가 향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으니까.
잠시 쓰게 웃은 글랙스가 이진운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체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이미 내 계획은 본격화 되었다. 네놈들 관리국이 손을 쓰려 해도 늦었어!”
애당초 글랙스는 자신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을 수 있는 복수귀였으니까.
그렇기에 자신을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이진운 앞에서 이렇게 악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과연 그럴까?”
이진운의 입가에 맺힌 조소를 읽은 글랙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된 상황이었다. 세상의 이목은 올레그와 테러 쪽으로 집중된 상황이었고, 사형집행 순간 터진 폭탄 테러로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행성 각지에 배치해놓은, 세뇌된 극단주의자들은 군사지역에 또 한 번 테러를 저지름으로서 행성방위군의 병력운용에 큰 혼선과 차질을 빚게 만들 것이다.
그렇지만 이진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그 모든 것들을 가볍게 부정해 버렸다.
“네놈을 용의자로 가정하고 생각하니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뻔해지더군. 그래서 대비를 해뒀지? 폭탄 테러? 그건 이미 제압해 두었다. 테러범들로 군사지역에 타격을 줄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그걸 파악한 이상 막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네놈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그리고 이 광장에서 있었던 폭탄은 말이지? 실제로 터진 게 아니었다. 그냥 네놈을 속이기 위한 성대한 폭죽이었지. 바로 몇 시간 전에 내가 바꿔치기 했다. 영화촬영을 위해 만들어진 폭죽이라고 하던가? 폭발 씬을 찍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라던데, 진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아서 아주 감쪽같더군. 여기에 약간의 환상마법을 가미해 줬더니 정말로 실제로 폭탄 테러가 벌어진 것 같았지. 바로 네놈조차 속을 정도로 말이야.”
이미 모든 계획은 파탄되었고, 심지어 이곳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조차 무위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글래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 말을 듣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넋 나간 표정으로 이진운의 말을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네놈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 분명 그럴 거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현실부정이라니.”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복수의 칼을 갈아가면서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그것이 자신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으니 정신이 나갈 만도 했다.
이진운은 놈의 전신을 제압했다. 어차피 전투적인 이능은 전혀 갖추지 못한 글랙스였다. 몇 군데 혈도를 제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37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번 사태는 너무 지나쳤어. 앞으로 그에 대한 죗값은 확실히 치를 거다.”
그렇게 내뱉고는 글랙스를 한 구석에 처박았다. 이제 함대에서 몇 사람이 나와 놈을 구속해 데려갈 것이다.
이진운은 더 이상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올레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를 구속하고 있는 것들을 풀어주었다.
“고생하셨군요.”
“···고생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네. 세상에··· 이 행성을 멸망시킬 생각을 하다니! 원한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실감하게 됐어.”
맥없는 목소리로 화답하는 올레그. 이번 일로 그가 받은 충격도 상당했을 것이다.
“본래 모든 걸 잃은 사람은 무서운 게 없는 법입니다.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되지요.”
“그건 그렇고··· 인베이더는 어떻게 된 거지? 글랙스의 말대로라면 놈들이 곧 쳐들어올 텐데.”
“이미 대비하고 있지요.”
이진운은 그렇게 말하면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인피니티 킹덤의 전함들이 그동안 유지하고 있던 비가시 모드를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오오오!
그 위용 찬 모습을 올레그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놀랍군. 이 사태를 예견한 걸로도 모자라, 함대까지 준비시켜 놨다니.”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인베이더는 지성체들을 위협하는 적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이진운은 그에게 종용했다.
“이만 대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제 인베이더와 전투가 시작될 겁니다. 이미 행성 전체에 대피발령도 내려졌고요.”
“거기까지 손을 써 두었나?”
“행성의 명운이 달린 전시 상황 땐 관리국이 이 행성의 모든 지휘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협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권한을 이용했을 뿐이지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진운도 쉽지 않았던 일이었다. 행성이 독자적으로 갖는 지휘권을 이쪽에서 확보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상황이나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랙스가 본색을 드러낸 덕분에 상관없어졌지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문제를 두고 행성방위군과 분위기가 좋지 않았었다.
그래도 억지를 써서 어떻게든 통합지휘권을 손에 넣긴 했지만, 만일 인베이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인피니티 킹덤과 이진운은 나중에 여러모로 정치적 후폭풍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대략 짐작한 올레그가 이진운 앞에 허리를 숙였다.
“아무튼 부탁하겠네. 이 행성을 부디 좀 구해주게.”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저와 함대가 온 이유가 그거니까요.”
“고맙네.”
아이틀란 행성을 구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떠안아가면서 나선 이진운. 올레그로서는 그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얼마 뒤, 올레그는 이곳을 찾아온 토착민들과 함께 서둘러 이곳을 떠나갔다.
이미 글랙스의 음모는 아이틀란 행성의 상층부에게 전부 알려진 상황이었다. 올레그에게 혐의가 없는 이상 그를 구속할 만한 것은 더 존재하지 않았다.
구우우우!
그때였다. 하늘 저편으로부터 강렬한 울림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아주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이진운은 그것의 정체를 분명히 알아챘다.
“이제야 오는군. 인베이더 놈들 같으니!”
인간이 혼란한 틈을 타 쳐들어온 인베이더의 함대. 그 모습은 마치 하이에나 같았다.
하지만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이를 대비해 몇 가지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마침 그의 모듈밴더로 통신이 들어왔다. 아르페인이 보낸 통신이었다.
[사령관 님, 준비 됐습니다.]
“좋아, 그럼 첫 전투 개시를 성대하게 알려주지. 놈들에게 우선 큰 것을 먹여준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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