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00화 (101/448)

4권-25화

* * *

극단주의로 치닫고 있는 토착민들을 성토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졌다. 아이틀란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곤 하지만, 이번 폭탄 테러는 앞으로도 길이 남을 만한 대참사였다.

분노한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 아이틀란 행성정부는 절차 대부분을 생략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 올레그는 이번 폭탄 테러를 주도한 인물로 낙점 찍힌 채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황당함과 분노가 얼룩진 표정으로 항변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소! 불과 일주일 만에 판결이라고? 그것도 사형?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증거와 증인이 너무 명백합니다. 피고는 이만 받아들이세요.”

“증거와 증인? 고작 조작하고 날조한 것들을 들이민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어 제대로 된 수사도 없이 불과 일주일 만에 날 테러범들의 수괴로 몰다니! 이젠 법과 절차도 깡그리 무시하겠다는 거냐!”

“이건 긴급 조치입니다.”

“뭐···!?”

그 말에 올레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긴급 조치. 아이틀란 행성이 존망의 위기에 몰렸다고 여겼을 때 내릴 수 있는 통합대통령의 몇 가지 초법적인 권한 중 하나였다.

헌데 폭탄 테러 문제를 단기간에 봉합하기 위해 긴급 조치까지 사용해가면서 이런 막무가내 판결을 진행하다니!

이건 그가 상상했던 바를 훨씬 초월했다.

“그룬키! 그 미친놈이 이번엔 단단히 작정했구나! 테러를 핑계로 우리 토착민들을 확실히 뭉개버리겠단 거겠지? 나를 시작으로 말이야.”

올레그가 판사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판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다.

“사형 집행은 지금으로부터 이틀 뒤에 진행하겠습니다. 피고는 그 이틀의 시간동안 자신이 저지른 테러에 대해 참회하시지요. 그럼 이만 재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걸로 재판이 종결되었다. 올레그는 올 때와 같이 강제로 끌려 나가 호송차량에 실려 이송되었다. 그가 다시 바깥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이틀 뒤, 바로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 모든 걸 방송을 통해 지켜본 이진운은 짤막하게 감상평을 내놓았다.

“말 그대로 촌극이군. 짜고 치는 도박판도 이것보다 형편없지 않겠어.”

그러자 옆에 있던 아르페인도 동감을 표했다.

“예, 정말 심각하군요.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일을 진행해 나가다니. 당장은 시민들의 감정이 폭발한 상태라 그냥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이건 나중에 분명 문제가 될 소지가 큽니다.”

“그런 걸 세세히 고려할 것 같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이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냉소적으로 내뱉은 이진운은 호송되어가는 올레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방송을 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진행속도야. 덕분에 아이틀란 행성은 완전히 둘로 분열되었고. 이런 와중에 인베이더들이 공격이라도 해오면 진짜 답이 없겠어.’

누가 본다 해도 말도 안 되는 재판이었지만, 그것을 뒤엎는 건 불가능했다. 이진운은 외부인이었고, 내정간섭 할 만한 권한도 없었다.

‘혼란과 분열이라··· 이 모든 걸 획책한 게 바로 그놈이겠지?’

이번 일을 배후에 조장했을 거라 짐작되는 가면인의 존재가 목에 걸린 가시마냥 마음에 걸렸다. 자유롭게 공간을 제어할 줄 아는 만큼 그 어떤 상대보다 껄끄러웠다.

정면에서 직접 맞붙는다면 크게 걱정할 것 없겠지만, 놈은 그 능력을 활용해 뒤통수를 쳐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폭탄 테러범들을 공간이동으로 흔적조차 없이 목표 제점에 던져 넣은 놈이다. 이번 사형 집행 때도 그와 비슷한 짓을 할지 몰라.’

그리고 아직까지 잠잠한 인베이더의 존재도 마음에 걸렸다.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번 혼란을 주시하고 있을 터. 과연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진운이 곧 입을 열었다.

“아르페인.”

“예. 사령관님.”

“이번 사형집행식 날 우리 인피니티 킹덤은 1종 전투태세 상태에 들어간다. 언제든 곧바로 전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대비를 해놓도록.”

“설마, 사령관님. 무력으로 사형집행을 막을 생각이신 건 아니겠죠?”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묻는 아르페인.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내 아무리 저 꼴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내정간섭까지 할 생각은 없어.”

“그러면?”

“사형 집행식 날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왠지 그런 감이 들어.”

그렇게 말한 이진운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이번 사태는 모든 게 정상이 아니야. 테러 자체도 처음부터 뭔가 인위적이었지. 테러범들이 내 감각조차 속일 수 있는 공간이동으로 전송된 것부터가 그랬고.”

“······.”

“이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주도한 놈들이 있다면, 이번 사형 집행일이야말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가 되겠지. 나는 그걸 막을 생각이다.”

“그렇군요.”

아르페인도 그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령관님의 뜻대로 지시는 해 두겠습니다.”

“혹시라도 사형집행일 날 우리가 전투대비태세에 돌입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승무원들이나 전투요원들에게는 절대 함구하라고 해.

“예, 그에 관련된 일에 대해선 철저히 극비로 붙이겠습니다.”

“그런데 아르페인 함장. 내 판단은 이런데··· 당신의 생각은 어땠지?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군.”

이진운은 혹시나 하는 얼굴로 아르페인에게 물었다. 로베르타인 함장이 장담하던 그의 직감은 거의 미래예지에 가깝다고 했었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저도 사령관님의 생각과 마찬가지였습니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예고했던 대로 사형집행식이 시작되었다. 사형은 전형적인 총살이었다. 예전에는 목을 매다는 사형집행도 있었지만, 죄인에게 죽는 순간에 긴 고통을 준다고 해서 총살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번 사형집행 형태는 다른 때와 달리 조금 특별하게 진행되었다. 본래 비공개가 원칙이었지만, 이번 폭탄 테러로 인해 슬퍼하고 분개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사형집행을 공개적으로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사형을 집행하는 장소는 아이틀란 행성정부의 총사 건물 앞쪽에 있는 커다란 광장.

시민들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따지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지 이곳에서 시위 할 수 있는 곳이라 해서, 항쟁의 광장이라 이름 붙은 장소였다.

사형집행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새벽부터 몰려와 자리를 잡은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아이틀란 행성 전체의 관심사가 이번 사형 집행에 쏠리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광장에 가득 찬 사람의 숫자만 해도 수십만 명을 훌쩍 넘었다. 경찰 측의 추정으로는 이곳에 모인 사람만 150만 명을 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것도 이 광장의 면적 때문에 다 모이지 못해서 그렇지, 행성 각지에 존재하고 있는 다수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만 해도 거의 5천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모여서 외쳤다.

“죽여라! 죽여라!”

“내 가족과 친인을 죽인 저 괴물을 죽여!”

“토착민들만 이곳 사람이냐? 우리도 이 행성의 주민이다! 극단주의자들은 모두 없애버려!”

“토착민이란 단어 자체를 못 쓰게 해야 해! 아니 그놈들이 이런 끔찍한 참사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따로 특별히 관리해야해!”

인피니티 킹덤의 메인 브릿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진운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무시무시하군.”

“정말 그렇군요. 이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휩싸여 이 난리라니. 어리석은 군중의 전형이지요.

“하긴 군중심리라는 게 다 그렇지. 뭐 한 가지에 공분하면 논리고 뭐고 없어지니까. 개인은 현명하고 이성적일 수 있어도 집단은 어리석어진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지.”

그렇게 아르페인과 말을 주고받는 동안, 광장으로 호송차량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형수인 올레그를 실은 호송차량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시민들의 눈은 더욱 광기로 타올랐다.

계란 투척은 물론, 심지어 어떤 자들은 호송차량에 달려들어 올레그를 직접 때려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중도에 차단되었다. 제아무리 사형수라 하더라도, 정식 사형집행이 아닌 이상 시민들의 손에 해를 입게 뇌둘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호송 차량에 장치된 배리어가 그들의 접근과 공격을 모두 막아내었다. 사람들은 몸으로 차량의 진로를 막으려 했지만, 그것은 광장을 지키는 경찰들에 의해 모두 저지되었다.

유유히 광장의 중심으로 이동한 호송차량에서 드디어 올레그가 내려섰다. 그의 얼굴은 온통 절망과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자 양 옆에 붙은 특수대원들이 그의 팔을 강제로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렇게 단상 위로 끌려올라간 올레그의 모습이 시민들에게 노출 된 순간이었다.

시민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 더러운 테러범!”

“어디서 그런 더러운 낯짝을 하고 있는 거냐? 우리의 가족, 우리의 친구들을 죽인 네놈이 어째서 억울하다는 표정이지!”

“저놈뿐만이 아니야. 토착민 놈들은 죄다 그래. 전부 도륙을 내버려야 할 놈들 같으니!”

“당장 죽여라!”

“총살을 하지 말고 더 괴로운 방법을 쓰라고! 놈을 편히 죽이지 마!”

당장이라도 난동을 부릴 것 같은 시민들의 모습에 경찰들은 이를 막느라 곤욕이었다.

그때였다. 통합대통령인 그룬키의 의전차량이 드디어 당도했다. 그가 내려서자마자 사람들의 흥분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차량에서 내려선 그가 곧장 연설에 들어갔다.

“우리는 최근 너무 비극적인 일을 겪었습니다. 절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그런 참사였지요.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저질러진 폭탄 테러라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하고 슬퍼했습니다! 어째서 이런 참담한 일을 겪어야 했을까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는데, 어째서 이런 슬픈 비극이 벌어진 것일까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그룬키가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이 향한 곳에는 올레그가 있었다. 그룬키는 그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저런 자들 때문입니다. 사회 그 자체에 불만을 품는 자들. 그리고 그것을 테러라는 극단적인 행위로밖에 내놓지 못하는 사회부적응자들 때문입니다.”

“오오! 역시 그룬키 대통령!”

“맞다. 저놈들 때문이야! 사회부적응자들!”

“토착민? 웃기고 있네! 그냥 시대에 뒤쳐져 열등감에 빠진 쓰레기들이지!”

그 말에 공감하면서 더욱 흥분하는 시민들. 그룬키는 거기에 더욱 불을 질러버렸다.

“저들은 처음부터 토착민과 이주민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 행성의 부흥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주장하지요. 물론 어느 정도 기여한 바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헌데 말입니다. 오늘날 이 아이틀란이 이렇게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토착민의 노력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토착민들이 개척을 통해 사람이 살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면, 그 뒤에 온 이주민들은 각종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 행성의 발전 계기를 마련했지요. 어느 누가 더 대단한 것도 없고, 누가 더 못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항상 주장해왔죠. 이 땅을 개척한 것은 우리인데, 뒤에 온 이주민들에게 그 대가를 빼앗겼다고!

참으로 이기적인 말입니다. 왜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 행성을 개척했기에 행성에서 이룬 모든 결과물과 결실은 자신들이 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논리적으로 봐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요.”

토착민들의 노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주민들의 공도 적지 않다고 언급하는 그룬키. 덕분에 토착민들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들은 전부 이기적인 행태로 전락해 버렸다.

그것을 듣고 있던 올레그가 격분해 소리쳤다!

“이 가증스러운 위선자! 감히 네놈이 그딴 말을 하느냐!? 이 모든 게 다 네놈이 꾸민 짓 아니냐!”

하지만 그룬키는 올레그의 분노마저 이용했다.

“자, 여러분들도 지금 잘 보셨을 겁니다. 모든 허물을 상대에게 떠넘기면서 원망하는 저 모습을. 저게 바로 토착민들의 진면목입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의 전형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저런 자들이야말로 사회를 좀먹고 파탄시키게 만드는 주범! 언제나 잘 살피고 배제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겪은 폭탄 테러라는 무참한 결과가 또 반복될지도 모릅니다.”

시민들은 그 말에 깊게 공감하면서 분노했다. 그게 선동인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잃은 가족과 친인들에 대한 상실감에 휘둘려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테러의 주동자 올레그의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본보기가 되어 앞으로 다시는 끔찍한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걸로 그룬키의 연설이 모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사형의 집행이 진행되었다.

사형대로 끌어올려진 올레그가 성난 얼굴로 반항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를 단상 위의 사형대에 고정시킨 순간, 사형을 집행하기 위한 총구가 겨눠졌다.

그것을 똑똑히 노려보던 올레그가 악을 쓰며 외쳤다.

“내 오늘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그룬키 네놈과, 이 행성의 이주민들을 저주하마!”

“귀신 따윈 믿지 않으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저주? 저주가 뭘 어쨌다고?”

그렇게 비웃음으로 받아친 그룬키는 가볍게 손짓했다. 바로 사형을 집행시키라는 말이었다.

그 명을 받은 사형집행인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것이 끝까지 도달해 총구에서 탄환이 발사되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보다 먼저 성대한 굉음이 일어났다. 그것은 총구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쾅! 콰아아앙!

땅을 크게 진동시킬 정도의 성대한 폭발! 충천하는 화광과 함께 광장의 일각이 무너져 내렸다.

거기에 휘말린 사람들이 폭발에 휩쓸려 죽거나 무너진 잔해에 깔려 비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설마 폭탄 테러!?”

“사··· 살려줘!”

항쟁의 광장 이곳저곳에서 벌어진 사태에 시민들은 말 그대로 패닉에 빠졌다. 안 그래도 거듭된 폭탄 테러 때문에 공포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이날조차 폭탄 테러가 벌어지자, 이젠 수습할 수 없을 만큼 혼란이 빚어졌다.

심지어 사태를 진압해야 할 경찰들까지 혼란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으니, 이 사태를 수습한다는 건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이게··· 대체!?”

사형을 집행당할 뻔했던 올레그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사방은 이미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대체 이 상황에서까지 폭탄 테러라니!

그때였다. 어느새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룬키 통합대통령이 그에게 물었다.

“하하하··· 아주 재밌지 않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지금? 재미있다니!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네놈이 이 행성의 통합대통령이라면 당장 수습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 네 말대로지. 하지만 말이야. 난 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 없다. 아니, 그럴 이유가 있을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지금?”

올레그의 두 눈동자가 그룬키를 응시했다. 토착민의 대표로서 오래 전부터 그룬키를 봐 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마치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올레그는 더 이상 분노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너무도 달라진 그룬키의 모습에 불길함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룬키가 조소하듯 말했다.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군. 나는 이제 대통령이 아니야. 지금까지 목적이 있어서 대통령 역을 해 왔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여기 있는 그룬키는 시민들을 위하는 대표가 아닌, 그저 복수귀일 뿐이지.”

“복수귀라니······?”

“아직도 모르겠나?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시시하다는 듯 혀를 찬 그룬키가 말을 이어나갔다.

“37년 전이었지. 토착민들과 이주민들 사이에 벌어졌던 그날의 일 기억하고 있나?”

“37년 전!? 설마···!?”

37년이란 말이 나온 순간, 올레그의 전신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크게 떨렸다. 아주 오래 전에 기억 속에 묻혔던 그때의 일이 생상하게 떠오른 것이다.

그 반응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면서 그룬키가 말했다.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군. 내 이름은 그룬키가 아니야. 내 진짜 이름은 글랙스 오스번드.”

“글랙스 오스번드? 당신··· 살아 있었나?”

“그래, 살아 있었지. 원통하고 분해서 어떻게 죽을 수 있겠나?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남았지. 이제는 모습도 달라지고, 이름도 바뀌었지만. 나는 그 참혹함을 겪었던 그날 이후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가 느껴졌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억눌러 쌓아온 증오의 표출이었다. 올레그는 그 앞에서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잘 들어라! 이 추악한 쓰레기들아. 네놈들에게 모든 걸 잃었던 내가 이제야 돌아왔다.”

무려 37년이란 긴 세월을 복수의 감정만 가다듬으며 살아온 복수귀의 귀환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