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23화
그들에게서 광란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곳은 아버지 대부터 개척해온 우리의 땅이다!”
“우리의 모성으로 기어들어와 더럽히는 것들은 모두 죽어버려!”
“자, 같이 죽자!”
이진운은 그들의 눈빛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광기로 가득 찬 그 모습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정신 착란? 아니면 모종의 수법에 의한 정신조작인가?’
폭탄을 끌어안고 같이 자폭하겠다는 행위는 결코 멀쩡한 정신 갖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마약이나 항정신적 물질을 흡입했을 수도 있지만, 저들의 움직임은 너무도 놀라울 만큼 기민하고 질서정연했다. 결코 약물 따위에 의존한 자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정신을 제압당해 조종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은 제압해 둬야겠지.’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기세가 다변화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출수로 수백 수천 가닥의 지력이 공간을 점유한다는 초유의 절기.
그것이 일양지의 일영한섬지(日映悍閃指)였다.
피피피핑!
손가락 끝을 떠난 무수한 숫자의 지력이 그들의 전신을 강타했다. 혹시라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전신의 혈도를 완전히 제압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그들이 들고 있던 폭탄부터 서둘러 제거해야 했다.
“이건 또 무슨 폭탄이지?”
야구공만한 수십 개의 폭탄들. 이것들이 시한식인지, 아니면 원격 발동식인지는 알아낼 시간이 없었다.
이진운은 폭탄들을 그 자리에서 확실히 제거해 버렸다. 방법은 간단했다. 구 형태로 구현한 강기 안에 폭탄을 가둔 뒤, 그것을 수축시키는 형태로 완벽히 소멸시켜버린 것이다.
강기구 안에서 제법 반발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진기를 불어넣어 강기의 출력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만했다. 어차피 진기야 만유합원신기로 외부에서 필요한 만큼 끌어오면 될 뿐이니까.
이진운은 그 즉시 모듈밴더의 통신회선을 열었다. 그러자 아르페인의 얼굴이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떠올랐다.
“일단 제압은 끝냈다. 폭탄도 전부 제거했고.”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사람을 보내 제압된 자들을 구속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뒤처리를 부탁한다.”
그렇게 짧게 통신을 마친 이진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놈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침입해 들어온 거지?”
지금도 그의 확장된 기감은 이 일대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범들은 어떠한 기척도 없이 이곳까지 무사히 침투해왔다.
뭔가 특수한 능력이라도 가졌다면 모르겠지만, 그가 제압해 둔 테러범들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자신의 기감을 속일 만큼 대단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피니티 킹덤의 함대가 정박해 있는 이곳은 허가된 관계자가 아니면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상시 삼엄한 경계 속에서 지켜지고 있는 특수군사지역.
상식적으로는 이 근방에 다가오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자들이 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더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진운은 눈앞에서 벌어진 이변에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끄으어어!”
“어어어어억!”
포로로 제압해둔 테러범들의 몸이 갑자기 풍선마냥 급격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놈들이 하나같이 괴로운 비명을 쏟아내고 있었다.
“설마, 이건!?”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이진운은 불현듯 깨달았다. 단순히 놈들이 소지하고 있던 폭탄을 제거했다고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손쓸 새조차 없이 이루어졌다. 어느새 팽배하게 부풀어 오른 폭탄 테러범들의 몸이 산산이 터져나가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콰아아아앙! 콰콰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과 굉음! 그리고 충천하는 화염이 그 일대를 지배했다. 얼마나 폭발의 규모가 컸던지, 온 사방이 일순간 태양광을 압도할 만큼 환하게 물들 지경이었다.
충천하던 화염은 곧 사그라졌다. 하지만 그 흔적은 깊게 남아 있었다.
자욱하던 연기 사이를 비집고 곧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이진운이었다. 그런 성대한 폭발 속에서도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격렬한 분노가 떠올랐다.
“내 앞에서 감히 이딴 수작을 벌여줬다 이거냐?”
테러범들의 육체 자체를 하나의 폭탄으로 사용하는 대범함. 이건 어지간한 자가 아니고서는 사용할 수 없는 비인도적인 테러였다.
게다가 그 위력도 대단했다. 이진운이 폭발하던 그 순간, 강기를 일으켜 위력을 어느 정도 억눌렀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작열했더라면 인피니티 킹덤의 전함들 중 상당수가 큰 손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봐야 중파 이상의 피해는 입지 않았겠지만, 출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엄청난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폭발이 일어난 곳을 응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생체폭탄으로 사용된 테러범들의 육체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철저히 심문해서 작은 단서라도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이래서는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군.”
이젠 단서가 될 만한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황. 이 모든 게 그룬키 통합대통령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 계획대로 이루어진 거라면, 놈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주도면밀하다고 봐야 했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던 그때, 아르페인이 모듈밴더를 통해 긴급 통신을 보내왔다.
[사령관님! 지금 큰일이 터졌습니다.]
“무슨 일인데?”
[각종 방송과 언론에서 긴급 속보가 떴습니다.]
아르페인이 언급한 긴급 속보란 단어에 이진운은 일순 심드렁한 표정이 되었다. 폭발을 막지 못한 그 순간부터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속보? 그래, 큰일은 큰일이군. 우리 함대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까지 성대한 폭발이 일어났으니 말이야. 언론이든 방송이던 여기저기서 떠들고 난리가 났겠어.”
그의 입에서 푸념 같은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제때 폭발을 억누른 덕분에 실질적으로 피해는 없었지만, 워낙 폭발의 규모가 컸던 만큼 아이틀란 행성 전체에 심리적 불안이 더욱 가중될 터. 그리고 테러범들과 같은 출신인 토착민들을 향한 편견과 증오도 그만큼 커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르페인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이번 폭발이 관련은 있지만 지금 속보는 전혀 다른 문제에요! 한번 직접 보시죠.]
그러자 아르페인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현재 생방송 중인 뉴스가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떴다. 이진운은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긴급 속보입니다. 현재 관리국에서 본 성으로 파견 나온 함대인 인피니티 킹덤이 정박 중인 특별군사구역 L-109에서 강력한 폭발이 관측되었습니다.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폭발의 원인은 최근 여러 차례 폭탄 테러를 저질렀던 토착민 극단주의자들의 짓인 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진운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내용의 뉴스였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온 내용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행성정부에서는 이번 사태에 관련된 토착민 극단주의자들에 대해 꽤 오래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으며, 최근 이번 테러와 토착민 세력의 대표자인 올레그 씨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물증 단서를 확보했다고 했습니다. 현재 행성정부는 법원을 통해 긴급영장심사를 청구했으며, 불과 몇 분 만에 체포영장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올레그 씨는 출동한 특수 부대원들을 통해 체포되었으며, 중앙 정부 관할 특수유치소로 이송 중인 상태입니다.]
“뭐라고?”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폭탄 테러를 통해 토착민에 대한 사회적인 적대감을 키워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토착민 대표인 올레그를 곧바로 체포하다니!
제아무리 명분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이건 진행 속도가 급해도 너무 급하지 않은가!
“완전히 당했군. 놈들은 단숨에 끝장을 볼 생각이었어.”
이진운은 짓씹듯 내뱉었다. 놈들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과격하고 철저했다. 이쪽에서 뭔가 손을 써보기도 전에 마무리 지을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화면에는 당황한 올레그의 체포 장면이 비쳐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무장병력이 그를 거칠게 제압해서 수송 차량에 싣는 모습이 거듭 재생되었다.
그는 소리 지르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거듭된 폭탄 테러로 토착민에 대한 적대감은 하늘을 찌르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성을 잃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시민들에게 올레그와 토착민은 반드시 처단해야 할 악 그 자체가 된 것이다.
* * *
아아틀란 행성 통합대통령 관저.
자신의 집무실에서 속보 영상을 지켜보고 있던 그룬키의 눈빛은 아주 냉정했다. 이진운과 대면했을 때 보인 속물이면서 소인배 같던 모습은 온데 간데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근접 경호원도 아니었고, 그의 측근도 아니었지만 그룬키는 그 정체불명의 인물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놔두었다.
옆으로 다가와 긴급 속보를 지켜보던 정체불명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전부 계획대로군요.]
“그래, 모든 게 자네들 계획 대로지.”
[과찬이십니다. 저희 계획이 그럴듯하긴 했지만,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그룬키 통합대통령 당신 덕분이죠. 당신이 소인배 흉내를 내준 덕분에 관리국에서 온 자들이 방심해서 이렇게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들 중에 그나마 유일하게 쓸 만한 게 바로 이 표정 연기였지. 대단한 건 아닐세.”
그랬다. 그룬키 대통령은 이진운이 봤던 그런 이기적인 소인배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계획을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요?]
“알겠네. 그럼 나도 그렇게 알고 진행하도록 하지.”
그들은 계획에 대해 자세한 건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논의는 사전에 다 끝마친 상황이었다.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계획의 진행은 예정대로 진행하면 된다.
[그럼 대통령께서도 곧 원하시던 바를 얻길 바랍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너희들이야말로 약속했던 거나 잘 지키도록.”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그룬키. 그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목소리가 조소하듯 울려퍼져왔다.
[물론입니다. 저희들에게 이 아이틀란 행성은 큰 가치가 없거든요. 목적만 달성하면 됩니다.]
“그럼 꺼져라. 너희와 장시간 접촉하는 건 위험해!”
[그럼 이만 사라져 드리죠.]
그 말과 함께 상대는 언제 존재했냐는 듯, 곧 집무실 안에서 소실되듯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 놈의 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그룬키가 불쾌하다는 듯 내뱉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놈들 같으니! 하지만 네놈들하고 같이 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세워진 작은 액자를 들어올렸다. 거기에는 세 사람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한 사람은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그룬키였고, 그 옆에는 아름다운 여인과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년이 함께 서 있는 사진이었다.
그것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진짜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