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22화
이렇게까지 말을 해 뒀으니, 섣불리 경거망동 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난동에 대한 원인을 조사하라고 했으니 어떻게든 결과를 내놓을 터.
하지만 과연 이번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지에 대해선 의문이었다.
‘어쩌면 그 일의 배후에 그룬키가 있을지도 모르지. 벌써부터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일단 두 세력 간의 갈등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허나 그건 이진운의 큰 오산이었다.
바로 그날 밤의 늦은 시각, 그룬키 통합대통력에 대한 피습 소식이 긴급 속보로 대서특필되었다.
* * *
홀로그램 스크린에 떠오르는 긴급 속보에 이진운은 일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설마 토착민과 이주민 대표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고 했다. 그룬키는 오버러들의 주 장비 중 하나인 고 레벨의 배틀 슈트를 착용한 덕분에 무사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테러를 저지른 자는 토착민 중에서도 상당히 극단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고 방송에서 추가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폭 테러라니······.”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제아무리 오랫동안 쌓여온 앙금이 있다곤 하지만, 인베이더가 행성을 침공한 상황에서 이런 극단적인 테러를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이건 뭔가 누군가에 의해 잘 짜인 판 같은 기분이군.’
이렇게 된 이상 이진운도 더 이상 그룬키 통합대통령을 압박하기 어려워졌다. 그조차도 토착민 극단주의자에게 폭탄테러를 당했는데, 토착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란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일단 명분이 없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이진운은 퍼뜩 놀랐다.
‘설마 이걸 노렸던 건가?’
누구의 계획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꽤 치밀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폭탄 테러로 이주민 세력은 토착민들을 응징할 명분을 얻었다.
물론 테러와는 무관한 죄 없는 자들까지 처벌할 수는 없겠지만, 토착민은 위험하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갈 것이고 그것은 곧 정책적인 불이익으로 이어질 터.
그리고 앞으로 아이틀란 행성의 모든 이권과 고위직 진출에서도 토착민은 배제될 확률이 높았다.
‘토착민이 이 행성의 모두에게 지탄받을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었군.’
만일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테러를 저지른 극단주의자들에게만 화살을 돌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이틀란 행성 전체가 인베이더에게 멸망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인 상황이었다. 모두가 힘을 하나로 모아도 부족한 판국에, 폭탄 테러까지 저질러 혼란을 조장했으니 이건 만인의 공분을 사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부터 그룬키 통합대통령의 성명이 이어졌다. 큰 부상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색이 창백해진 그룬키는 이번 폭탄 테러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이번 일과 연관된 자들을 끝까지 색출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분란을 일으켜 왔던 극단주의자들을 감시하고, 치안유지를 위해 다수의 병력을 각 요지에 파병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모든 정관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건 계엄령이나 다름없는 선포였다.
어차피 인베이더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만큼 행성 각지에서 군 병력이 활동 중이긴 했지만, 그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그룬키의 오늘 선포는 같은 행성의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토착민에 대한 비난을 퍼붓던 자들도 그룬키 대통령의 대규모 병력 동원에 대해서는 강한 경계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독재자가 성립했던 옛 역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냐, 그룬키.”
반복적으로 뉴스에 등장하고 있는 그룬키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내뱉은 이진운은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신과 인피니티 킹덤은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었다. 아이틀란 행성이 연합의 일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리국에게 일일이 통제를 받는 하부 세력도 아니었다.
특별한 명분이 있지 않는 한, 그가 이곳 행성정부의 정책에 개입하는 건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했다.
현재 아이틀란 행성 시민들의 여론은 대체적으로 반반이었다. 그룬키 통합대통령이 폭탄테러를 당한 것은 유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민을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한 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고, 반대로 토착민들의 행태가 너무 지나쳤는데 이번 기회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극단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다.
“과반수도 아니고 반반이라. 이런 상황에서 이 사태를 조장한 배후자가 쓸 수 있는 방법은 하나지.”
이진운은 다음에 이어질 음모를 예상했다.
그룬키가 폭탄테러를 당한 일이 큰 사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민들이 직접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시민들 개개인이 폭탄테러의 위협을 직접 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진운은 즉시 모듈밴더로 통신회선을 열었다. 연락 대상은 인베이더와의 전투에 대비해 함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아르페인이었다.
갑작스런 연락에 그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사령관 님이시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
“아무래도 아이틀란 행성 각지를 감시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감시요?]
이진운은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바를 설명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예측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 듣고 난 아르페인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음··· 그렇군요. 저도 조금 심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역시 사령관님 말씀처럼 음모가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그룬키 같지는 않아. 놈은 전형적인 소인배. 음모의 주재자는 결코 될 수 없는 작자지.”
[누군가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을 거라 이 말이시군요.]
“그래.”
[알겠습니다. 저희 함대가 보유하고 있는 탐색 위성을 추가로 몇 기 쏘아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지상에 대한 감시망도 지금보단 좀 더 엄밀해지겠지요. ]
“그럼 부탁하겠네.”
그렇게 말하고는 통신을 중단하였다. 이제부터는 아르페인을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추가적인 테러라··· 부디 내 짐작이 틀렸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르페인에게 부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아이틀란 행성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테러였다.
그 결과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었다. 테러가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주로 벌어진 탓이었다.
추산되는 인명 피해는 27만. 허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산일 뿐, 정확히 집계한다면 희생자 수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게 고작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참사였다.
“···지독하군. 이렇게까지 하다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지른 아우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대체 이 많은 희생을 통해 뭘 얻으려 한단 말인가!
이진운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사태를 주시했다. 이런 참사를 의도적으로 일으킨 이상, 뭔가 노리는 것이 있을 터.
지금은 어떻게든 그것을 알아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아르페인이 면목 없다는 듯 사과해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테러로 희생되고 나니, 그도 나름대로 죄책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자네 탓이 아니야. 이번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 그 짧은 시간 안에 감시망을 만들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야.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도 제가 조금이라도 서둘러 찾아냈다면 조금이라도 희생이 줄어들지 않았을까요?]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지. 모든 게 그렇게 뜻대로만 된다면 이 세상에 불행이란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니 지나간 일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다음을 대비하도록. 아직 테러를 저지른 진짜 원흉은 찾지 못했어.”
[알겠습니다. 철저히 색출해 내겠습니다.]
그제야 기운을 찾은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르페인. 그걸로 통신은 마무리 되었다.
“철저히 계획된 작전이군. 첫 테러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고, 민간에 대한 동시다발적 대규모 테러로 명분을 확고히 만들었어.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뻔하군.”
이진운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다. 그도 나름대로 계략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전생 시절 천마신교와 전쟁을 벌이면서 온갖 흉계를 경험해 봤었고, 그도 놈들 못지않게 계략을 짜서 전황을 뒤집기도 했다. 이 정도 예측은 그에게 당연한 것이다.
“놈들은 분명 이번엔 우리를 노리겠지. 거의 90% 확률로.”
물론 제대로 공격을 할 생각이 있는지, 아니면 비슷한 흉내만 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테러는 반드시 벌어질 것이다.
아이틀란 행성을 인베이더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온 관리국 소속의 함대를 공격한 토착민! 그것보다 더 훌륭한 명분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토착민들을 탄압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것 이상 가는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르페인에게도 이미 당부해 두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대비하고 있으라고.
승무원들과 전투 요원들도 그가 철저히 통제하고 있으니, 테러로 입을 피해는 최대한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주변을 좀 둘러봐야겠군.”
이진운은 자신의 숙소를 나섰다. 그는 현재 함내의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아이틀란 정부에서 따로 화려한 숙소를 배정해 주었지만, 그는 그들의 배려를 거부했다. 지금은 이곳을 지켜야 할 때였으니까.
현재 그의 기감은 넓게 퍼져나가 함대 주변을 샅샅이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이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든, 그 전에 감각에 걸려들 터.
어떻게든 놈들을 무사히 사로잡아서 그 배후를 캐내야 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폭탄 테러를 저지른 놈들은 단 한 놈도 살아남은 경우가 없었다. 폭탄이 터지면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사망했다.
‘어떻게든 테러범 녀석들을 무사히 살려서 잡아야 해.’
놈들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방법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있던 그때, 난데없이 큰 진동이 울려왔다. 그것은 분명 폭발에 의한 진동이었다. 거대한 카멜롯이 이 정도로 흔들릴 정도면 상당한 규모의 폭발임이 분명했다.
이진운은 깜짝 놀라 외쳤다.
“뭐? 폭발이 어떻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조짐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헌데 갑작스런 폭발이라니! 대체 무슨 수로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제야 그의 기감에 수상쩍은 기척들이 잡혔다. 다수의 기척들이 인피니티 킹덤의 전함을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진운은 서둘러 외부로 향했다. 함내는 완전히 비상 상황이었다. 폭발에 의한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상대를 전혀 감지 못한 상황에서 기습을 당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해치를 열자마자 곧바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폭탄을 들고 함을 향해 달려드는 다수의 인원들이 그의 시야에 즉시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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