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96화 (97/448)

4권-21화

환영 만찬이 끝난 뒤, 이진운은 아이틀란 행성에 대해 따로 간단히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아서였다. 그에 대해선 말을 회피하는 그룬키 통합대통령의 반응만 봐도 그러했다.

개척민과 토착민들 간에 쌓인 앙금이 이젠 의견다툼의 수준을 넘어 거의 증오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이진운의 의견에 아르페인도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나타냈다.

“확실히 일리는 있군요. 자기들 행성을 구해주러 온 이들이 우주에서 내려온다는 데도 그걸 도우려는 개척자 파벌을 방해할 정도면 확실히 심각해 보입니다. 그게 결국 자기들 목숨줄을 위태롭게 만드는 짓인 것을 뻔히 알면서 말입니다. 이젠 미워하는 감정을 이성으로 주체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거겠지요.”

사람은 때론 그럴 때가 있다. 논리나 이성 같은 것을 뛰어 넘어, 내면에서 끓어 넘치는 감정에만 휘둘려 행동하는 경우가.

아마도 이곳의 토착민들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일 테지.

“일단은 양쪽 대표들부터 만나 봐야겠군.”

아이틀란 행성에서 인베이더를 격멸하려면 인피니티 킹덤의 힘만으론 부족했다. 아니 함대의 전력은 충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놈들을 이 행성에서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선 현지 세력인 그들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예, 그럼 우선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보죠.”

아르페인이 그 말을 하고 바쁘게 움직인 끝에 양 측 대표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 세력의 대표와 한 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했다. 개척자 쪽이든 토착민 쪽이든 서로가 한 자리에 같이 앉는 것을 극렬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진운은 그들과 개별적으로 만남을 갖는 걸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진운은 현재 토착민 세력을 대변한다는 대표와 얼굴을 마주한 채 앉게 되었다.

심기 불편해 보이는 중년 사내. 그가 바로 토착민 대표 [올레그 루스페니안]이었다. 그가 앉자마자 대뜸 용건부터 물어왔다.

“무슨 일로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요?”

“앞으로 인베이더를 상대하기 위해선 여러분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흐음···.”

올레그는 잠시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는 곧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인베이더 놈들을 우리의 모성에서 쫓아내기 위해서는 협력할 필요가 있겠지. 협조는 하겠소. 애당초 그럴 생각이었고.”

생각보다 순순히 협력을 언급하는 그 말에, 이진운의 눈빛이 의아하게 변했다. 그룬키 통합대통령이 말한 것하고는 너무도 다른 반응 아닌가?

이진운이 이에 대해 묻자, 그가 얼굴을 붉히며 분노를 토해냈다.

“허튼 소리요! 우린 당신들의 대기권 진입을 방해한 적이 없었소. 개척자 놈들에게 비협조적인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행성을 도와주러 온 분들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은 아니오.”

“그렇다면······?”

“그룬키, 그 작자의 농간일 거요. 그도 결국 개척자 세력에 몸담은 작자 중 하나니까.”

짓씹듯 내뱉는 올레그. 그는 그룬키 통합대통령을 이번 흉계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이래선 어느 한 쪽 말만 들어서는 답이 없겠군. 따로 조사라도 해 봐야 하려나?’

이진운은 양측의 말이 엇갈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울분을 토하는 올레그에게서는 조금도 거짓됨은 보이지 않았다.

“우린 이 행성에 대해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소. 70여 년 전 아무것도 없었던 이 행성에 정착하면서부터 맨주먹으로 시작해 모든 것을 일궈냈었지.”

마치 오래 전 옛 일을 회상이라도 하듯 내뱉는 올레그. 하지만 그는 이내 격앙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우리더러 토착민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우린 토착민이 아니오. 우리야말로 진정한 개척민이었지. 지금 개척자라고 불리는 놈들은 단순한 이주민일 뿐이고. 우리가 개척을 다 마쳐놓은 행성에 발을 들여서는 그 과실만 빨아먹고 있는 기생충 같은 것들!”

그 말을 듣고서야 이진운은 대충 감이 잡혔다. 토착민과 개척민 사이에 쌓인 불신과 증오의 원인을.

그런 와중에도 올레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더 웃긴 건, 뭔지 아시오? 이 행성의 주도권 대부분을 개척자라고 자칭하는 놈들이 쥐고 있다는 거요. 나중에 입주해온 세입자가 집주인을 내쫓은 격이지.”

“어째서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놈들은 높은 분들 앞에 가서 손을 비비고 아부하는 것을 아주 잘하기 때문이오. 여기저기 인맥을 만들어놓고, 그 힘으로 우리가 가졌던 권리와 주도권을 야금야금 빼앗아갔지.”

얼마나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지, 그가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개척민들 중 누구라도 있으면 주먹으로 후려칠 기세였다.

“그리고 그런 놈들의 대표적인 앞잡이가 그룬키요. 우린 그룬키 따윈 통합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아무것도 없던 이곳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모든 걸 일궈냈는데, 그것들을 나중에 이주해온 자들에게 내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억울하고 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행성의 운명이 걸린 이 상황에서, 누가 인피니티 킹덤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느냐 였다.

이진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잘 알겠습니다. 덕분에 토착민 분들의 입장도 알게 되었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강하하는 걸 방해하신 이유는 뭡니까? 당시 토착민과 이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고 하던데.”

“방해?”

“예, 그래서 행성방위군의 대응이 늦어졌다고 하더군요. 전 그렇게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 짓는 올레그. 그는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그때의 일에 대해 변론을 시작했다.

“누군가가 헛소리를 한 것 같은데··· 오해는 마시구려. 우린 분명 협조하려 했었소. 당신들이 아이틀란 행성에 오는 걸 반대하지도 않았었고.”

“그런데 그때 양동 대응이 늦어진 건 어떻게 된 겁니까?”

“휴··· 그건 뭐라 말하기가 어렵소.”

“그룬키 통합대통령 말처럼 양 측의 의견충돌 때문이었습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 당시 좀 이상한 점이 있었소.”

“이상한 점? 뭔가 아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이진운이 거듭해 묻자, 올레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입을 열고 말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숨겨서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개척자라고 자칭하는 이주민 놈들과 우리 토착민이 서로 앙숙지간이나 다름없는 건 사실이오. 하지만 인피니티 킹덤의 강하 문제는 행성 전체의 문제였지. 당신들 같은 강력한 전력이 온다는데 괜한 훼방을 놓을 이유가 없잖소? 제아무리 이주민 놈들이 미워도, 이곳은 우리의 고향이 된 지 오래요. 고향을 인베이더로부터 해방해 주겠다는데 무슨 방해를 하겠소?”

“그렇겠군요.”

논리적으로 보면 납득 가는 이야기였다. 제아무리 이주민들이 밉다 해도, 고향 땅을 포기할 순 없을 테니 토착민들에게 인피니티 킹덤의 강하를 방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룬키 놈이 도와달라길래 우리도 최대한 협력하기로 했었지. 그런데 당신들이 강하하던 그 시점에서 문제가 발생한 거요.”

그 대목에서 잠시 숨을 멈춘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었소.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몇몇 소수가 벌인 다툼이 순식간에 확산되어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대규모 난투로 발전되었던 거요.”

“음······.”

“당신이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소? 물론 작은 다툼이 폭동으로 발전되는 사례는 여럿 있지만, 그것이 떨어진 장소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질 수는 없는 일이잖소. 게다가 인베이더 놈들과 붙기 직전인 상황인데, 그 상황에서 다툼이 벌어진다? 이것도 결코 정상적인 일이 아니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의심이 가는 이야기다. 미치지 않고서야 인베이더와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같은 우군끼리 싸움을 일으킨다는 건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을 의심하고 있소. 지금도 따로 조사는 해 보고 있지만, 확인할수록 마치 누가 의도적으로 선동해서 벌인 일 같았거든.”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겠군요.”

“아직은. 하지만 어떻게든 찾아낼 거요. 반드시!”

올레그는 그렇게 내뱉으면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번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주민들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 뒤에는 이주민 대표를 만나보았다. 이주민 대표는 놀랍게도 그룬키 통합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가 나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토착민 대표와는 이야기 잘 나눠 보셨습니까?”

“예, 어느 정도는.”

이진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룬키가 예상이 된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무슨 말이 나왔을지 짐작이 갑니다. 저희에 대해 온갖 악의로 가득 찬 내용이었겠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별로 좋은 말은 안나오더군요.”

“그는 우리 개척자들에 대한 불신과 편견으로 가득한 잡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아집 안에 사로잡혀 언제나 저희를 적대하곤 했지요.”

“하지만 아주 근거 없는 악의 같지는 않더군요.”

이진운이 그들 편을 슬쩍 들어주자, 그룬키 통합대통령의 안색이 조금 변하더니 곧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주류에서 밀려난 자들입니다. 이제 우주는 무한경쟁의 시대인데, 경쟁에서 뒤쳐진 자들은 언제나 잘 나가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마련이지요. 그들은 먼저 이 행성에 자리를 잡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독점하길 원했습니다. 나중에 이주해온 우리를 배제하려 했지요. 결국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그들이지만 말입니다. 덕분에 미움은 한껏 받고 있지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앞으로 차차 시간을 두고 그들을 이해시키면 될 테니까요. 경쟁에서 뒤처지는 그들에 대한 보완 정책도 하나하나 마련해 가고 있고요. 서로 이해하고 하나가 되려면 앞으로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요.”

거기까지 말한 그룬키는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자신들을 미워하긴 해도, 그것을 대범하게 받아줄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작자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속에서 진심은 보이지 않았다. 가면에 익숙한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쪽에서 한번 찔러보기로 했다.

“그럼 이번 강하 작전 때 발생한 문제는 어떻게 된 겁니까? 조사는 해 보셨겠지요?”

이진운이 날카롭게 묻자, 그룬키가 조금 당황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건··· 개척민들과 토착민들 사이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이견다툼이라고 전에 말씀 드렸을 텐데요?”

“우발적이라··· 그 정도 규모의 다툼이 우발적으로 벌어질 수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작전에 지장을 줄 정도의 분쟁이 말입니다. 그것도 우군끼리!”

“······.”

언성을 높인 이진운의 기세에, 그룬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황한데다, 뭐라 답변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아직 확실한 건 없습니다만, 현재 조사 중입니다. 곧 결과가 올라올 겁니다.”

“그렇다면 좀 서둘러 줬으면 좋겠군요. 조만간 대규모 작전을 시행할 겁니다.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 원인을 확실히 파악해 제거했으면 합니다.”

이진운이 일부러 상대에게 압박적으로 말을 하자, 그룬키 통합대통령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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