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18화
그를 돌아본 아르페인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무슨,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당연하다는 투로 내뱉은 이진운은 곧바로 해치 쪽으로 향했다. 격납고의 해치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아리엔과 엘레나, 그리고 클레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왜?”
이진운이 의이한 듯 묻자, 아리엔이 대표로 나와 말했다.
“스승님! 이번 싸움, 저희들도 돕게 해주세요. 그래서 이렇게 준비해 왔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이진운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어째서요? 지금까지 저희도 함께 싸워왔잖아요. 어째서 이번엔 안 된다는 거죠?”
거듭된 요청에 이진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한 손 거들겠다는 제자들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이건 아니었다.
무조건 강하게 말해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은 그는 차분하게 설득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동안 너희의 실력이 많이 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같은 열악한 전투 상황에선 너희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어. 너무 위험해.”
“그건 스승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내 경신공부라면 크게 어렵지 않아. 대기권에 돌입하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너희들, 공중전 경험은 얼마나 있지?”
“예. 많지는 않지만 조금은요.”
“예전에 몇 번 해 봤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아리엔과 클레브. 반면 지구 출신인 엘레나는 공중전과 같은 경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처럼 대기권으로 돌입하는 상황은?”
“···그런 경우는 없었죠.”
재차 이어진 질문에 결국 아리엔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경험 있는 오버러들도 쉽지 않은 게 대기권 돌입 전투다. 하물며 경험조차 없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오히려 방해만 돼.”
“저희는 별 도움이 안 되는군요.”
이쯤 되니 아리엔도 체념한 모양이었다. 시무룩한 얼굴이 된 그녀에게 이진운은 다가가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너희의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양보해 줬으면 좋겠구나.”
“예, 어쩔 수 없죠. 저희가 스승님의 짐이 될 순 없으니까요.”
수긍한 듯 물러서는 아리엔. 그리고 옆에 있던 클레브와 엘레나는 애당초 아리엔 만큼 강한 참전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별 말 없이 물러나 주었다.
때문에 이진운은 새삼스런 눈으로 아리엔을 바라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강화병들의 대장 노릇을 하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꽤 의젓한 태도를 보여줬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찾아와 억지를 부리는 걸 보면, 다시 그 나이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진운이 생각하기엔,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된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하긴··· 가문의 숙원도 이뤘고, 아버지도 회복됐으니 그럴 만도 한가?’
그는 그것이 결코 나쁘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녀석이 벌써부터 어른인 척 하는 것도 별로 좋은 게 아니었다.
이진운은 아리엔과 엘레나를 돌려보내면서, 클레브에게만 은근히 당부해 두었다.
“클레브, 이 녀석들 데려가라. 괜히 나선다고 하지 못하도록 잘 달래고.”
“예,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현재 나이만 따진다면 이진운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바로 클레브였다. 이렇게까지 말해 뒀으니 클레브가 알아서 잘 다독거려 줄 것이다.
“그럼 이제 가 볼까?”
모든 준비는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이제 나가서 싸울 일만 남았다.
위이잉!
곧 해치가 개방되었다. 해치 밖으로는 대기권으로 진입하면서 발생한 열기로 주변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천 도의 열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끓었지만, 이진운은 함 바깥으로 서슴없이 몸을 던졌다.
그러자 배틀 슈트의 생존기능이 발동되었다. 배틀 슈트는 오버러가 우주공간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방호구였다.
물론 수천 도 쯤 되는 열기라면 배틀 슈트도 다 막아주진 못하지만, 이진운은 몸 주변에 호신진기를 두르는 것으로 완벽히 차단해냈다. 나중에 정 필요하다면 호신강기도 전개할 생각이었다.
그는 카멜롯의 상단 갑판 위에 발을 디딘 채 상황을 주시하였다. 지상에서 퍼부어지고 있는 포화는 배리어가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좀 전과 같은 중력자 병기가 또 한 번 작열한다면, 이젠 더미 방패도 없어진 함대가 직접 얻어맞게 될 터.
그 전에 어떻게든 강하를 마쳐야 했다.
헌데 그때였다. 하늘 저편으로부터 제법 강렬한 기운들이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그가 감지하자마자, 모듈 밴더를 통해 오퍼레이터의 통신이 뒤이어 전해져 왔다.
[옵니다. 종류는 비행 타입! 수는 45! B+진멸 급인 철갑조입니다!]
철갑조. 그 이름은 이진운도 몇 차례 들어는 봤었다.
무생의 군단에 속한 악명 높은 비행 타입. 이름처럼 전신이 단단한 금속성 외골격으로 뒤덮인 탓에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타격을 주기 힘들뿐더러, 엄청난 기동성 때문에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인베이더였다.
쉐에에엑!
날카롭게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지간한 전투기 정도 크기 되는 새들이 함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크기만 좀 작았지, 생김새는 영락없이 비룡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어디 한번 싸워 볼까?”
그렇게 내뱉은 이진운이 사전 준비 동작도 없이 순식간에 갑판으로부터 높이 뛰어올랐다. 응조칠식경공(鷹鳥七式輕功)의 한 수인 비응등천(飛鷹登天)이었다.
함대를 향해 날아오던 철갑조들이 허공으로 치솟는 이진운을 발견하자마자 즉시 달려들었다. 놈들에게는 함대보다 이진운이 더 위험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이진운의 검 끝에서 시작된 검기가 어느새 무수한 반월형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삼절검(三絶劍)제 1식. 섬진쾌(閃震快)
연식(連式). 월영광(月影光)
키잉! 키키키키!
그 순간, 요란한 금속성이 잇따라 울렸다. 이진운의 반월형 검기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 놈들의 목덜미를 정확히 벤 것이다.
하지만 별달리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보였다. 놀랍게도 철갑조의 외갑에는 깊지 않은 검흔만 남아 있을 뿐, 그 이상의 피해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진운도 이번 결과에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생각보다 더 단단하군.’
그가 구사한 월영광의 검기는 마음만 먹는다면 고층빌딩도 무 썰듯 베어낼 수 있는 위력이었다. 헌데도 그걸 무사히 버텨냈다면 어지간한 중소형 전함 수준의 방어력을 가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진운이 볼 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단순히 단단하다고 해서 검기를 멀쩡히 버텨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진운은 검기가 적중하던 순간, 놈들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파장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마도 그것이 검기의 위력을 일시적으로 저하시킨 원인으로 짐작되었다.
‘그래, 분명 영력의 응집을 순간적으로 흐트러지게 하는 것 같군.’
그것이 바로 철갑조의 단단한 방어력이 가진 비밀일 터. 외갑 자체도 단단한 편이지만, 상대의 공격에 실린 영력의 응집이나 배열을 흔들어서 받는 공격의 위력을 반감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봐야 잔재주지!”
그 순간부터 검기의 밀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강기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 후, 이진운의 검에서 시작된 폭발적인 검기가 철갑조들을 향해 다채로운 형태로 쏟아져 나왔다. 그가 지금까지 습득해왔던 수많은 절기들의 향연이었다.
삼절검과 타루검 같은 기초 검공으로 시작된 그의 무공은 곧 낙영비화검, 적룡십팔도 같은 절정무공으로 이어졌고, 그 뒤에는 분광십팔수검이나 회풍무류사십팔검 같은 점창의 대표 검학에 이르렀다.
빠르고도 치명적이며 변화무쌍한 그의 검공 앞에선 철갑조들조차 어찌 대항할 수가 없었다.
물론 비행 타입인 만큼 빠르고 놀라운 기동성을 자랑했지만, 그것은 이진운도 만만치 않았다. 본디 점창의 경신절학은 표홀하고 날렵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런 경신보법이 모든 무공들을 뒷받침하기 때문에 점창의 무학이 빠르고 날카롭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진운은 허공에서 말 그대로 종횡무진했다. 철갑조들이 그의 공격을 피하려 해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점창이 자랑하는 창응칠식(蒼鷹七式)의 하나인 현란비조(眩亂飛鳥). 무엇 하나 디딜 것 없는 허공에서도 마치 순간이동 하듯 현란하게 이동하면서 적들을 유린할 수 있는 이형환위의 비기였다.
무수한 검기의 향연 속에 남은 것은 산산이 조각난 철갑조들의 잔해 뿐. 그것들은 곧 지상을 향해 떨어지면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세상에··· 그 많던 철갑조들이 순식간에······!]
오퍼레이터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던 모듈 밴더를 통해 들려왔지만, 이진운은 그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상대한 철갑조 따윈 말 그대로 싸움의 서막일 뿐. 이제야말로 진짜 적이 다가오고 있었다.
구오오오!
대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편으로부터 울려오는 굉음과 함께, 지금까지 상대완 전혀 다른 개체가 이진운의 눈앞에 등장했다. 오퍼레이터가 다급히 소리쳤다.
[언노운 출현! 라이브러리 데이터에 없는 개체입니다.]
센서 범위 바깥으로부터 순식간에 접근해온 속도! 그것만 봐도 상대의 격을 알 수가 있었다.
적어도 A랭크 이상. 아니 S랭크가 분명했다. 피부로 와 닿는 기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진운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무려 성멸 급이라 이거지? 우리한테 알려진 하이브의 등급이 완전히 잘못 됐었나 보군. 정보국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기에 더더욱 의문이 들었다. 무려 성멸 급이 출현했다면, 아이틀란 행성은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
행성 방위군의 전력만으로는 성멸 급과 고위 인베이더의 침공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대도 아직까지 그럭저럭 건재해 왔다면 둘 중 하나다.
인베이더들이 아이틀란 행성에 대한 공격을 일부러 늦췄거나, 아니면 이제 막 하이브의 등급이 성멸 급을 불러낼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미일 것이다.
‘후자라면 타이밍이 좀 기가 막힌 거고··· 전자라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겠군.’
상념은 길었지만, 그가 생각에 잠겼던 실제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눈앞에 다가온 성멸 급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공격해 오고 있었다.
일반적인 비행타입과 달리 인간형 타입인 언노운은 한 자루의 긴 창과 등 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을 달고 있었다.
비교적 생김새는 날렵해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파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놈이 내뻗은 창이 공간을 관통하면서 날아들고 있었다.
정직하게 한 점을 관통하는 일로의 창격!
이진운은 검으로 비스듬하게 흘리는 동작으로 그것을 옆으로 빗겨냈다.
지잉!
그 순간, 검을 쥔 손아귀가 저릿해 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창격에 엄청난 힘과 속도가 담겨 있었다.
‘완벽한 찌르기군. 속도와, 동작, 타이밍, 그리고 전사까지 모든 게 완벽했어! 이런 인베이더가 있었나?’
이진운은 내심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상대해온 인베이더들의 기교는 사실 형편 없는 수준이었다. 압도적인 육체적 스펙이나 특수한 이능들을 앞세워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은 달랐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놈은 제대로 된 무예, 즉 창술을 높은 수준까지 익힌 녀석이었다.
그것이 이진운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했다. 오래간만에 가슴이 뛰는 느낌이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호승심이라니······.’
이진운은 울렁거리는 자신의 감정에 일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완전히 다른 시대에 환생하고 이젠 이런 우주까지 나오게 되었지만, 무인으로서의 타고난 본능은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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