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91화 (92/448)

4권-16화

그것으로 싸움은 종료되었다. 이진운의 이번 한수는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흐름을 파(破)하고 나아가 상대의 근본을 관통하는 비의. 그리고 창끝에 담아낸 기운으로 상대의 기운과 공명시켜 장악한 뒤 흐름을 비틀어 자멸하게 만드는 것.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게 바로 역상회류멸진도라는 것이다! 너 같은 놈을 멸하기엔 딱 안성맞춤인 비기지!”

쿠우우!

은빛 거인이 경련을 일으키며 기괴한 괴성을 내질렀다. 무생물인 주제에 그래도 상황을 판단할만한 이성은 갖고 있는지,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기현상에 제법 당황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은 더 이상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손끝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그 모든 것이 풍화되듯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빛 거인은 마치 모래와 같은 잔해만 남긴 채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이진운은 싱겁다는 듯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쉬웠어.”

솔직히 말하자면 은빛 거인은 약하지 않았다. 가진 힘과 능력만 보면 세계수를 등에 업었던 레이즈 워커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상성. 은빛 거인의 특성은 전함이나 요새를 상대할 때나 유리한 것이지, 지금과 같은 대인전에서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상대가 어지간한 수준이었다면 끝없는 회복력과 막대한 파괴력을 앞세워 압도했을 테지만, 이진운은 대인전에 있어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스페셜리스트.

시간을 역행하는 듯한 복원력만 어떻게 막을 수 있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상대다.

구우우!

함대의 구동음이 들려왔다. 이제 막 전장을 정리한 인피니티 킹덤의 전함들이 이진운 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몇몇 전함의 외장갑이 약간 손상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멀쩡한 상태였다. 그 정도는 간이 수리만으로도 원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카멜롯에 탑승하자, 아르페인이 해치까지 나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습니다, 사령관님. 관리국의 마이스터 급 오버러 중에서도 성멸 급인 실버 타이탄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나보다는 함장 당신의 지휘야말로 대단했지. 고작 그런 손실만으로 해적들과 인베이더 함대를 물리치다니. 그런데 실버 타이탄? 그 덩치가 그런 이름이었나?”

서로에 대한 칭찬의 말을 주고받은 뒤, 이진운은 은빛 거인의 이름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육 시간 때는 듣지 못했던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자 아르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예, 오래 전에 붙여진 개체명이죠. 강한데다가 계속 회복까지 해서 상대하기 성가신 인베이더로 유명했습니다.”

“흠,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녀석은 아니었어. 재생하는 것만 틀어막으면 아주 쉬웠지. 놈이 가진 특성 자체가 대인전에는 어울리지 않더군.”

“예, 요새나 함대를 상대하는 데에 더 적합했죠. 전함을 상대할 만큼 화력과 기동력도 좋았고요. 사령관님을 상대하게 된 게 놈에겐 최대의 불운이었죠.”

이진운도 그 말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일 이 함대에 자신 대신 다른 오버러가 있었더라면 놈은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실버 타이탄은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불운을 원망해야 할 것이다.

잠시 농담으로 기분을 전환한 이진운은 조금 민감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공교로워. 아르페인 함장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예.”

해적들의 급습에 이어, 해적 두목을 구해간 정체불명의 가면인. 그리고 놈이 도주하는 타이밍에 맞춰 들이닥친 인베이더 함대까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절묘한 이어짐이었다.

“한두 번의 우연은 있을 수 있어도, 세 번씩 이어지는 우연은 절대 없어. 그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조작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진운이 언급이 아니더라도 아르페인은 그 부분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혹에 불과할 뿐,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은 놈들의 해적선을 뒤져보기로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의뢰라도 받았다면 해적선의 데이터베이스에 뭔가 증거라도 남겼겠지요.”

“흐음, 그래서 해적선들을 최대한 멀쩡하게 남겨둔 거였군.”

이진운도 그제야 아르페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디체를 비롯한 해적선들 중 일부는 크게 부서진 부분 없이 건재한 상태였다. 인피니티 킹덤에 의해 제압되면서 제네레이터나 몇몇 부분에 데미지를 입긴 했지만, 대파 수준까지 이르진 않았다.

그리고 인베이더 함대는 실버 타이탄이 당하는 순간, 곧바로 워프를 전개해 줄행랑을 쳤다. 더 싸워봐야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물론 반복된 워프 탓에 빈틈을 허용하느라 피해가 컸지만, 놈들은 결국 인피니티 킹덤의 포화 속에서 어떻게든 도주에 성공했다.

“아까 그 놈들이 바로 아이틀란 성계를 들쑤시던 장본인인가?”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곧 알 수 있겠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멜롯의 메인 센서가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특정 신호가 시스템에 포착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오퍼레이터가 곧 보고를 올려왔다.

[선행 식별신호 확인. 아군입니다. 관리국 소속 오콜로스 함대, 본 함대의 측면으로 워프 아웃합니다.]

우우웅!

우주공간 위로 일렁이는 파문과 함께 십여 척의 전함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이틀란 성계를 비롯한 주변 몇 개의 항성계를 방어한다는 오콜로스 함대였다.

그것을 목도한 이진운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려졌다.

“어디 소문 무성한 불사신 양반 낯짝을 봐야겠지?”

* * *

“오, 반갑네. 자네가 그 신 독립함대의 이진운이었군.”

처음 보자마자 가식적인 웃음을 흘리며 맞이하는 오콜로스. 생긴 것만 봐도 옛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 제가 독립함대 인피니티 킹덤의 사령관 이진운입니다. 명망 높으신 오콜로스 사령관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넨 이진운. 일단은 상대에게 존댓말을 해 주었다. 자신보다 더 오랫동안 사령관 노릇을 해온데다, 나이도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광은 무슨. 아무튼 잘 왔네. 처음부터 고생이 많았어. 자네 함대는 첫 출항부터 다사다난하구먼. 지휘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던가?”

“처음이긴 한데 생각보단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두목 놈이 도망가긴 했지만 로일라 해적단은 전부 제압해 두었고, 인베이더 함대도 일단 격퇴했지요. 앞으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크게 어렵진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관리국에서 밀어주는 능력 있는 사령관이라 확실히 다르구먼.”

오콜로스는 이진운의 눈치를 살피면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설득해서 함대의 지휘권을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이렇듯 번듯한 성과를 내고 있으니 말을 꺼내기 어려워진 것이다.

‘···역시 소문대로 이기적이고 음흉한 작자군.’

이진운은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그도 오콜로스의 속내를 알고 일부러 자신의 전공을 부각시킨 것이다.

물론 오콜로스에게는 독립 라이선스를 가진 인피니티 킹덤의 지휘권을 빼앗을 권한 따윈 없었지만, 놈에게 괜한 명분을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응? 뭔가?”

“좀 전에 저희가 싸웠던 인베이더 함대가 혹시 이 주역에서 날뛴다는 그놈들 맞습니까?”

“흐음, 일단 데이터를 줘 보게. 확인을 해 봐야겠군. 본 함의 라이브러리 데이터와 대조해서 확인해 주겠네.”

별거 아닌 부탁이었기에 오콜로스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는 함대의 메인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모듈밴더를 통해 데이터를 확인했다. 이진운이 보낸 인베이더 데이터와 비교해본 그는 낮게 침음성을 삼켰다.

“으음··· 아닐세. 이놈들은 다른 녀석들이야.”

“그렇다면 새로운 지원군이겠군요.”

“그럴지도···. 생각했던 것보다 갈수록 위험해지는데?”

이진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오콜로스는 겁먹은 안색이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인베이더와 싸워 온 역전의 함장이라 보기에는 너무도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이진운은 내심 혀를 끌끌 찼다.

‘겁이 많고 자기보신에는 철저하다더니, 새로운 인베이더 함대가 확인되자마자 저 꼴인가?’

아무래도 아이틀란 성계 수복에 대해선 오콜로스 함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아마도 자기 목숨 보전하기 위해 도망 다니느라 바쁠 테니까.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이진운은 그와의 대면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어차피 더 할 이야기도 없었다.

“그럼 일단 저희는 목적지인 아이틀란 성계로 향하겠습니다. 곧 수복 작전을 시작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 수고 하도록 하게. 무슨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하고.”

새로운 인베이더 함대의 출현에 온통 신경이 쏠린 탓인지, 오콜로스는 인사 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반응해왔다. 도와준다는 말을 의례적으로 던지긴 했지만, 그 말에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움이라··· 과연 도울 수나 있을까? 방해만 안하면 다행이겠군.”

그로부터 조금 멀어진 뒤에야 이진운은 조소를 흘렸다.

* * *

이진운이 다시 카멜롯으로 복귀하자, 아르페인이 몇 가지 정보를 들고 왔다. 그동안 해적선을 수색하면서 몇 가지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디체의 데이터 베이스에서 찾아냈다고 하던데, 그 중에는 클라이언트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것을 읽어 내린 이진운이 옆에 있던 아르페인에게 물었다.

“[루이트 알베르그]라. 이게 누구지?”

“메탈 기어를 주력으로 하는 군수업체연합의 총괄 사무장입니다. 그 자가 연합체의 실무를 도맡고 있죠.”

“그러니까··· 이놈이 바로 해적들에게 날 해치워 달라고 의뢰한 녀석이라 이거지?”

“예. 아마도 그렇겠지요.”

루이트 알베르그라는 이름으로 입금된 거액. 그것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갔다. 물론 놈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차명으로 돈을 건넸겠지만, 의뢰를 받은 로일라도 그것을 그냥 받을 바보는 아니었다.

만약을 대비해 따로 데이터베이스에 놈의 이름과 단서를 기입해 둔 것이다.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이걸 증거로 삼아서 대응할 생각이었을 테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루이트 알베르그와 군수업체들을 박살내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일단은 구체적인 연관성을 확보해야 할 텐데··· 루이트 알베르그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놈들을 족치기엔 증거가 부족해.”

“아직 데이터베이스를 다 뒤져 본 건 아니니까 좀 더 기다려 보시지요. 분명 뭔가 더 나올 겁니다.”

준대형 전함 정도 되면 데이터베이스 규모만 해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하긴 드넓은 우주의 항법 데이터와 온갖 정보들이 저장되어 있을 테니, 그것들을 일일이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꽤 오래 걸릴 것이다.

납득했다며 고개를 끄덕인 이진운은 이번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루이트 알베르그라는 녀석은 어떤 사람이지?”

“어떤 사람이라니···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입니까?”

“그러니까 놈에 대한 평가나 소문에 대한 거 말이야.”

그제야 질문의 요지를 알아챈 아르페인이 자신이 아는 대로 말했다.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닙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냉혹한이라 하더군요. 덕분에 수년 간 메탈 기어 산업이 꽤 흥했지요.”

“그렇다면 이런 짓을 얼마든지 저지르고도 남을 녀석이란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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