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14화
무작정 공격해봐야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이기지 못할 건 아니지만, 로일라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공간이동을 사용해 잽싸게 도망갈 듯 보였다.
일단은 상대부터 파악해보기 위해 이진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솜씨가 좋군. 내 쾌검을 피해낸 것도 모자라, 두 번째 검은 아예 공간이동 시켜 버리다니. 두 번째 출수 때는 나름 신경을 썼는데 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목덜미를 스쳐지나갈 것 같은 공격은 처음이더군. 아주 오싹했지. 조금만 늦었더라면 오히려 내 목이 달아날 뻔했어.]
이진운이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을 줄 알았더니, 곧바로 화답을 해올 줄이야.
목소리는 변조된 탓에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대꾸를 한다는 게 중요했다. 이진운은 일단 슬쩍 떠 보듯 다시 말을 걸었다.
“네놈의 정체를 물으면 당연히 대답을 안 할 테지. 그 대신 한 가지만 묻자. 네놈이 바로 로일라 녀석에게 일을 맡긴 클라이언트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애매한 답이군. 어쨌든 네놈도 관련은 있다는 이야기겠지?”
[후후후···.]
아주 부정한 것도 아니고, 긍정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실력자가 개입되어 있다면 그냥 어중간하게 발을 담근 건 아닐 것이다.
“아무튼 잘 만났다. 그 해적 놈을 조져서 토설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네놈도 제압해서 하나하나 캐물어야겠어.”
이진운의 검 끝이 가면인을 향했다. 일단 배후에 대한 확실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라도 놈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가면인이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런이런, 이럴 것 같아서 되도록 나서고 싶지 않았는데······. 이 멍청이가 능력만 믿고 날뛰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귀찮게 되었군.]
그렇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이진운과의 만남 때문에 일이 성가셔졌다는 투가 역력했다.
그것이 이진운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날 앞에 두고 고작 한다는 말이 귀찮아졌다고?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는 네 안위를 걱정해야 할 거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좀 전과는 차원이 다른 삼엄한 기세가 일어나 사방을 장악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세지도가 아니었다.
이미 심검지도(心劍之道)의 단계에 가까워진 무형지기의 극치였다.
이래서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이진운의 검을 피해낸다 하더라도, 이 주변을 장악해버린 무형지기가 즉시 형상화 되어 놈을 난자할 테니까.
그렇지만 가면인은 그 사실을 이미 알아채고도 태연자약했다.
[이진운, 네가 강하다는 건 잘 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날 붙잡을 수 있다는 건 아니야. 그거와 이건 완전히 별개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거군. 그렇지만 말이야. 일단 내 눈앞에 나타난 이상 쉽게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물론 당신 같은 실력자와 싸우는 건 껄끄러운 일이지. 일반적인 경우라면 도망가기도 힘들게야. 하지만 난 좀 달라. 특별하지.]
이진운의 실력은 인정하면서도, 언제든 도망갈 수 있다는 투로 말하는 가면인.
확실히 공간이동을 이능으로 가진 자라면 자신감을 가질 만 했다. 심지어 이진운의 쾌검을 피해낼 정도로 빠른 발동이 가능한 능력이라면 어지간한 상대가 아닌 이상 피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
그렇지만··· 이진운은 놈을 붙잡을 자신이 있었다.
일순, 그의 검 끝에서 차가운 빛이 번뜩인 순간, 수백 수천 줄기의 검광이 나타나 전면을 장악했다.
헤아릴 수 없는 검영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분광십팔수검(分光十八手劍)
섬전분광(閃電分光)
우주공간을 수놓는 무시무시한 쾌검의 향연! 이 수많은 검영들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허(虛)이자 실(實)이었다. 이진운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실히 허가 될 수 있고, 허가 실로 바뀔 수 있는 변화무쌍한 검초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 주변은 이진운의 무형지기가 장악한 상태. 설령 놈이 공간이동을 사용해 피한다 해도, 그 즉시 그의 무형지기가 반응해 놈을 제압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측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예상 밖의 결과에 이진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내 검이 닿질 않아?’
믿기지 않았다. 이진운의 쾌검은 가히 빛과 같아서, 발출 즉시 상대를 관통할 수 있었다.
헌데도 그의 검은 여전히 뻗어나가는 중인 상태. 보기에는 당장이라도 닿을 수 있는 지척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닿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진운과 가면인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공간의 간격이 무한히 확장하는 것처럼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그것을 본 순간 이진운은 깨달았다.
‘설마··· 그냥 공간이동이 아니었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 제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놈은 단순히 공간을 이동한 게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공간을 제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면인의 입에서 옅은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 검, 언제쯤 내가 닿을 수 있을까? 궁금한데?]
이진운은 전개하던 검식을 중단한 채 가면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공간을 접거나 늘리는 등의 조작을 해서 특정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것이 공간이동과 흡사하게 나타났을 뿐이었다.
‘예상보다 더 까다로운 놈이었군. 하긴 이래서 언제든 도망갈 수 있다고 내 앞에서 자신만만해 한 건가?’
이래서는 단순 제압이 힘들게 생겼다. 연합에서도 공간제어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능력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물론 이진운이 가진 무공 중에는 공간 계통에 대해 먹힐만한 것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하기 성가신 것은 사실이었다.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 너 같은 녀석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말이야.”
이진운이 상대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하자, 가면인은 그 말을 거꾸로 되돌려 주었다.
[그건 오히려 내가 더 묻고 싶군. 소환된 지 불과 1년도 안된 지구인 출신이면서 벌써부터 S랭크를 넘어서는 실력이라니. 대체 네놈 정체가 뭐냐? 세계수마저 베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역시··· 정보가 새고 있었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입맛이 너무 썼다. 오베른 행성에서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었지만, 그가 세계수를 베었다는 정보는 관리국의 핵심인사들 외에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놈이 언급했다는 건, 내부의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더욱 네놈을 놓쳐선 안 되겠군.”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는 가면인을 향해 이진운은 하나의 검식을 준비했다.
그것은 상대의 공간제어마저도 넘어설 수 있는 그러한 절기였다.
검 끝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더욱 가늘고 예리해졌다. 그것은 마치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난자될 듯한 그러한 기세였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군. 그런 기세를 내뿜다니, 뭘 하려는 거지.]
“잠자코 잘 봐라. 그 잘난 능력으로 과연 어디까지 피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내뱉듯 말한 이진운은 조용히 한 걸음 내딛었다. 오른발이 허공답보의 묘리로 내딛어진 순간, 무시무시한 가속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왼 발이 두 번째로 뻗어진 순간, 그의 신형은 한 차례 더 가속되면서 마치 빛과 같은 속도의 영역에 이르렀다.
시계의 모든 것이 느려졌다. 디체와 포격을 주고받고 있는 카멜롯도, 해적들을 소탕하고 있는 인피니티 킹덤의 전함들의 모습도 모두 느린 모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우주 공간 속에서 오로지 이진운만 가속해 나갔다. 가면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놈에게서 분명 당황한 기색이 비쳐졌다.
[이건!?]
하지만 그의 질주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은 그가 전개할 다음 검초의 밑바탕이었다.
고오오오!
가속에 가속을 거듭한 속도가 그의 검 끝에 온전히 실렸다. 그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빠른 속도로 뻗어나가 시간의 개념을 넘어 가면인이 서 있는 공간을 베어나갔다.
분광십필수검(分光十八手劍)
극의. 단혼여의(斷魂如意)
단 한 번의 번뜩임. 그것은 소리조차 없었다. 검로를 따라 그려진 하나의 궤적은 검은 우주공간 위에 선명한 상흔을 그려내었다.
끄그그긋!
그 뒤, 무언가 뒤틀리는 듯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베어진 공간의 단면이 어긋나는 소리였다.
가면인의 입에서 경악이 흘러나왔다.
[거··· 검을 휘둘러서 공간을 벤다고!?]
단혼여의가 펼쳐진 순간, 놈의 상체 위에 선명한 상흔이 그려졌다.
허나 그뿐이었다. 놈을 베긴 했어도, 이건 치명상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이진운이 믿기지 않는다며 한숨지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분명 공간 채로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네놈이 어떻게 무사한 거지?”
그가 펼친 단혼여의는 아직 완벽한 게 아니었다. 완벽하려면 적어도 절대지경의 끝에 도달해 심검지도를 자유롭게 다뤄야 가능했다.
그래도 어쭙잖은 공간제어 따윈 무시하고 베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자신이 너무 놈을 얕보았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결과에 놀란 건 이진운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건 가면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검 한 자루로 차원방벽을 베다니···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믿을 수가 없군. 이진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서운 놈이었구나.]
“차원?”
가면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이진운이 작게 읊조렸지만,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좀 전의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경계심 가득한 모습으로 말했다.
[아무튼··· 이제 분명히 알았다. 네놈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구나.]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놈은 싸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로일라를 챙겨들고는 곧장 도망갈 태세였다.
“도망갈 생각이냐? 그렇다면 이번에는 더 확실히 베어주지.”
이진운이 일갈하면서 재차 출수하려 했지만, 놈은 이미 공간을 뛰어넘어 먼 거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재차 공간을 접어 이동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이진운이 전력을 다해 우주공간을 가로지른다 해도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점점 멀어져가던 가면인에게서 냉소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날 잡을 생각은 마라. 이제부터 널 상대해줄 녀석들이 올 테니까.]
우우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편에서 워프 아웃 반응이 일어났다. 그것도 어중간한 규모가 아니라, 거의 함대 급의 이동에서나 볼 법한 규모였다.
우주공간이 물결치며 일렁이는 가 싶더니, 곧 거대한 형체의 선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이진운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인베이더!? 하필 이 타이밍에!”
인베이더의 전함 중 하나인 가란드(중형)급이었다. 그것을 필두로 인베이더의 전함 다수가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란드 급 13척에, 준대형인 가루다 급 한 척!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이진운은 일순간 크게 갈등했다. 이대로 놈을 놔 줘야 할지, 아니면 인베이더의 공격을 무시하고서라도 놈을 어떻게든 쫓아야 할지 선택할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뿐. 이진운은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지. 놈을 포기하고 인베이더를 상대한다!’
아직은 무리였다. 가면인과 싸운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겠지만, 도망가는 가면인을 붙잡아 제압하기에는 능력이 모자랐다. 어차피 이대로 쫓아간다 해도 붙잡을 가능성은 3할 미만에 불과했다.
그런 이진운의 선택을 읽은 가면인이 우주공간 저편으로 점점 멀어져가면서 외쳤다.
[네 상대는 나중에 내가 직접 해주지. 그러니 오늘은 일단 그놈들하고 놀고 있어라.]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주제에 잘도 떠드는구나. 그래,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놔주지. 하지만 다음에는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은 마라.”
이진운은 이를 갈면서 등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갑자기 들이닥친 인베이더 놈들을 상대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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