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88화 (89/448)

4권-13화

이제야 모든 게 일목요연해졌다. 이진운의 눈매도 자연 날카로워졌다.

“역시 그랬군.”

리스티가 예상한 게 맞았던가? 메탈 기어의 퇴출로 원한을 품은 군수업체들이 뒤로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더니, 이걸 두고 한 이야기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단정 짓긴 아직 일렀다. 관리국 내에도 독립함대를 요구한 이진운을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이 있었고, 크잔트의 배후에 존재하는 자가 손을 썼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놈들이 다 합심해서 일을 벌였던가.’

허나 그에 대해선 나중에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은 눈앞의 해적 놈부터 제압해놓고 나서 사정 청취를 들어봐야 할 성 싶었다.

이진운의 표정에서 그다지 놀란 기색이 없자, 로일라가 김이 샜다는 듯 투덜거렸다.

“뭐야? 이미 알고 있었던 거냐?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군. 네놈이 죽어주길 바라는 작자들이 꽤 많던데··· 대체 얼마나 원한을 쌓았으면 그렇게 되는 거냐?”

“······.”

“어쨌든 이쯤에서 내 손에 좀 죽어다오. 더 이상 피해가 커지면 손해도 보전 못하니까.”

마치 이진운의 죽음을 확신하는 어투로 내뱉는 로일라. 놈이 내뻗은 손 위로 붉은 광채가 맺혔다. 그것은 불길하고도 강렬한 열기와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이진운이 두 눈을 차갑게 번뜩였다. 놈이 가진 능력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다.

“설마··· 핵인가······?”

위이잉!

손안에 작은 태양을 만들어내는 강대한 폭력! 이것이 지금까지 로일라가 연합의 공격 속에서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장의 힘이었다.

‘일개 개인이 가진 능력 치고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힘인데······.’

약간 경각심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하지 못할 건 없었다. 이진운의 검 끝 위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뚜렷한 형체를 이뤄나가더니 어느덧 눈부신 광채가 되어 검신 위에 맺혔다. 바로 검강이었다.

우우웅!

그렇지만 로일라는 검강이 무엇인지 몰랐다. 단지 영력을 응집시킨 형태의 일종으로 대수롭지 않게 인지했을 뿐이다.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걸로 내 핵융합 탄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 말과 함께 놈의 손 안에 있던 붉은 구체가 이진운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과연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핵융합 에너지인 이상 직접 닿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투웅!

일보를 내딛는 순간, 이진운의 신형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동했다. 허공답보의 수법으로 우주공간을 밟고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은 가히 빛을 연상시키게 하고 있었다.

신형이 마치 쏘아진 빛처럼 길게 늘어지는 가 싶더니, 어느새 놈이 쏘아낸 핵융합 구체의 범위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콰아앙!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핵융합 구체가 작은 데브리에 부딪쳐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작은 태양이 떠오르듯 발생된 핵반응에 주변이 일순간에 뜨겁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뭐야? 이걸 피한다고?”

상상 이상으로 빠른 움직임에 자신의 첫 공격이 빗나가자, 로일라가 인상을 쓰며 또다시 핵융합 구체를 만들어냈다. 이번엔 두 개를 동시에 구현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이진운의 움직임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가 쏘는 핵융합 구체의 속도는 어지간한 빔과 맞먹을 정도였지만, 이진운은 그 모든 것을 가볍게 피해내었다.

괜히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핵융합 구체가 터져나가면서 주변 소행성에 피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해적들의 전함 중 일부가 그에 휘말려 소행성 파편에 좌초되기까지 했다.

“젠장! 쥐새끼처럼 도망만 다니다니! 그럼 이건 어떠냐?”

위이이이잉!

놈의 손앞에서 압축되어 가는 붉은 에너지 구체.

겉보기엔 좀 전과 비슷한 것 같아도, 이번 공격은 종류 자체부터가 달랐다. 지금까지는 핵융합 에너지를 탄환처럼 뭉쳐 쏘아냈다면, 이것은 그 힘을 조사 형태로 가공한 것이다.

바아아앙!

이 일대를 사르는 붉은 파동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어 나왔다. 그것은 좀 전에 로일라 해적단의 모함 디체에서 발사했던 감마 레이 버스트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준대형 전함도 대비 없이는 위험할 정도의 위력!

하지만 이진운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 선 채 검을 허리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검 끝에 어린 검강의 광채가 더욱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신체에서는 전에 없던 막대한 기운이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점창이 가진 위대한 절기들이 이 순간, 그의 몸에서 재현되었다.

시작은 역기충혈대법이었다. 잠력을 사용해 역량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점창의 비전지공.

거기에 외부의 기운을 마음껏 받아들이는 만유원신기가 더해지면서, 잠력을 소모한다는 리스크를 최소화 하였다.

그리고 최근 더해진 태을단목신공이 역기충혈대법에 의해 상해가는 육체를 하나하나 보듬으며 다시 빠른 속도로 회복시키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고양감이 이진운을 들뜨게 만들었다. 물론 역기충혈대법에 의한 고통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신에 기운이 넘치는 충만감만으로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전성기의 5할 수준인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 충분했다. 눈앞의 시건방진 해적의 얼굴을 무참하게 바꾸기에는 말이다.

그의 검 끝이 어느덧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푸른 광채를 뿌렸던 검강의 색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원이 공간 위에 거듭 새겨지면서 더욱더 짙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완성된 거대한 붉은 소용돌이가 우주 공간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점점 기세를 더해나가며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4식. 적룡출하(赤龍出荷)

비의. 적류회선강(積流回旋罡)

그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을 사를 것 같던 핵융합 에너지의 광채가 붉은 소용돌이에 닿자마자 급속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먼지를 빨아올리는 진공청소기 같았다.

“이 무슨!?”

비현실적인 광경에 로일라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도 자신의 능력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 건 아니었다. 위력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막아내는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핵융합 에너지를 집어삼킨 붉은 소용돌이는 더욱 커졌다. 이젠 어지간한 전함마저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였다.

넘실대는 붉은 소용돌이 속에서 이진운이 검을 내질렀다.

“자, 그럼 받은 건 이자까지 보태서 되돌려주지.”

그 순간, 이진운의 제어 안에 수렴되어 있던 붉은 소용돌이가 전면으로 해방되었다. 그것은 우주공간을 나선으로 찢어발기는 파괴의 폭풍이었다.

쿠콰콰콰콰!

이에 닿은 모든 것이 갈리고 찢겨나갔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열기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진운이 가진 힘에 로일라의 핵융합 에너지까지 더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렇게 갈리고 불타오르는 데브리들을 넘어, 어느덧 로일라 앞에까지 이르렀다. 놈은 당황한 얼굴로 그것을 막아나갔다.

“크으으!”

무시무시한 충격에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나마 자신이 발출했던 핵융합 에너지는 어떻게든 상쇄시킬 수 있지만, 이진운의 검식은 막을 수가 없어서였다.

“커헉!”

로일라의 신체가 붉은 소용돌이의 압력에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결국 이진운의 적류회선강을 다 막지 못하고 그 힘에 밀려 우주공간으로 내팽겨진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뻗어나간 적류회선강의 궤도 앞에는 로일라 해적단의 모함인 디체가 있었다. 카멜롯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접근해오던 디체는 그 즉시 배리어를 강화했지만, 이미 붉은 소용돌이는 함체를 직격했다.

콰아아앙!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디체의 거대한 몸을 뒤흔들었다. 어지간한 화력도 거뜬히 견뎌내는 디체의 배리어였지만, 로일라의 핵융합 에너지, 이진운의 전력이 담긴 검강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디··· 디체 중파! 선체가 기울고 있습니다.]

모듈밴더의 통신기능을 통해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우주공간을 수놓는 폭음과 열기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말만으로도 디체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적룡출하의 적류회선강은 흡, 탄, 반, 회, 유, 류 등의 무결이 만들어낸 공방일체의 비의.

원을 그리며 회오리치는 검력이 적이 펼친 기격의 흐름을 파고들어가 오히려 그것을 침식-장악하고, 회전을 통해 완전히 융합-증폭시킨 후 그대로 그 힘을 폭풍처럼 발산하여 역으로 강력한 타격을 입히는 검식인 것이다.

그것이 준대형 전함에게도 통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진운은, 로일라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놈은 이제 반쯤 무력화 된 상태였다.

내상도 극심한데다, 너무 무리하게 능력을 끌어올리는 바람에 영맥에 꽤 큰 무리가 간 듯싶었다.

“괴··· 괴물 같은 놈! 검 한 자루로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중파된 디체의 모습을 목도한 로일라가 경악과 두려움에 젖어 부르짖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진운의 목숨을 주머니 속에 든 것처럼 떠들더니, 그때의 자신감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진운은 놈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하긴··· 능력 하나만 믿고 설친 네놈은 알 턱이 없겠지. 아무튼 이제부터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구나. 네놈이 말한 클라이언트란 녀석들이 어떤 놈들인지 자세히 말해줘야겠어.”

로일라는 푸르르 떨며 이를 악물었다. 그것을 알아내는 과정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측면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을 감지한 이진운은 두 눈을 부릅뜨고는 왼쪽으로 홱 몸을 돌려 즉각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 끝에 실린 검강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궤적을 그렸다. 분광십팔수검의 절초 섬뢰일정이었다.

피이잉!

극쾌의 속도로 우주공간을 가르는 푸른 단선! 소형 전함이라면 단숨에 두 토막을 내고도 남을 위력이었지만, 그것은 이진운의 감각에 걸려들었던 상대를 베지 못했다.

갑자기 측면에서 느껴졌던 기척이 점멸하듯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감지된 기척! 그것은 바로 전면에서 나타났다. 거동조차 제대로 못하는 로일라의 바로 옆자리였다.

또다시 뻗어나가는 검강! 그것은 방금 전 섬뢰일정의 거의 두 배 이상 되는 속도로 출수되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의 쾌검이 만들어낸 궤적은 상대에게 미처 닿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저 먼 곳에 나타나 궤적이 엉뚱한 곳을 갈랐다.

이진운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그 능력의 정체를 작게 읊조렸다.

“공간이동이군.”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진 영능력자의 수는 제법 됐지만, 이렇게 빠르게 전개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자신의 섬뢰일정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활용할 수 있는 자는 더욱 극소수였다.

적어도 연합에서 크게 평가받는 S랭크를 뛰어넘는 강자. 그 정도가 아니면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수법.

하지만 마땅히 집히는 자가 없었다.

이진운은 자신을 방해한 상대를 노려보았다. 정체를 숨길 생각인지, 얼굴에는 흰 가면을 썼고, 검은 색 타이즈로 전신을 완전히 가린 정체불명의 존재.

놈이 로일라를 지키듯 그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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