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12화
우주공간이 광활한 만큼 해적들도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선 행성 정부조차 무시 못 할 놈들도 존재했다.
그 중 하나가 로일라 해적단이었다. 어지간한 함대보다 더 큰 전력을 가진데다, 워낙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다 보니 연합에서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놈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그놈들이 하필 연합의 기밀 중 하나인 워프 아웃 구역을 정확히 파악한 것도 모자라, 워프 아웃 순간을 정확히 노리고 포격을 해왔다고?
아르페인은 지금 상황을 누구보다 냉정히 판단하였다.
‘놈들은 분명 우리 인피니티 킹덤을 정확한 타이밍에 노렸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야.’
단순히 상선이나 털려고 노리다가 자신들이 우연히 걸려든 게 아니었다.
놈들은 연합의 기밀 중 하나인 워프 아웃 포인트를 정확하게 찾아낸 데다, 인피니티 킹덤이 워프 아웃 하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춰 포격을 가해왔다.
이건 어디선가 기밀이 유출되지 않고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관리국 내에도 우릴 견제하거니 적대하는 작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지만 일단 그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눈앞의 해적들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로일라 해적단에서는 계속해서 포격을 가해 왔지만, 그 어떤 것도 인피니티 킹덤 함대의 디스토션 필드의 역장을 뚫지 못했다.
그렇지만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습적으로 쏟아낸 포격이었을 뿐, 놈들의 모든 것을 쥐어짜낸 최대 화력이라 볼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오퍼레이터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일라 해적단의 모함, ‘디체’로부터 고에너지 반응!]
[디체의 주포 크리에나입니다.]
디체의 크리에나라면 아주 잘 알려진 무장 중 하나였다. 해적질을 하기에는 수준에 맞지 않는 강적을 만났을 때 사용하는 로일라 해적단의 비장의 무기 중 하나였으니까.
아르페인이 화난 표정으로 내뱉었다.
“미친놈들! 유인행성이 있는 주역에서 감마레이 버스트라니! 역시 해적질을 하러 온 게 아니야!”
해적들이 해적질을 하는 기본 목적은 어디까지나 무언가를 강탈해서 이득을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첫 포격 이후로 어떠한 요구도 없었을 뿐더러, 지금 놈들이 들이민 감마 레이 버스트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초토화시키는 무장! 이런 미친 병기를 사용한다 함은 놈들은 애당초부터 이번 기습으로 이득 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예측되는 사정 범위는?”
[이대로라면 아이틀란 행성에도 큰 피해가 미칠 걸로 예상됩니다. 지표면의 30% 면적이 말 그대로 불타 없어질 겁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은 수십 도 이상의 고열현상으로 생태계가 망가지겠지요.]
“이거야 말로 외통수군.”
카멜롯과 인피니티 킹덤의 성능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아니면 이대로 배리어의 출력을 높여나가면서 견뎌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 뒤에 있는 아이틀란 행성은 멸망에 준하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어지간한 포격이라면 배리어를 최대한 끌어올린 뒤 함체로 막는 방법도 쓸 수 있겠지만, 감마레이 버스트는 단순한 포격이 아니었다.
이 일대 주역을 한 차례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범위의 광역 공격인데, 함체로 틀어막는다고 해 봐야 막을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뿐. 나머지 감마 레이는 결국 아이틀란 행성으로 쏟아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아르페인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냉정했다.
“그래비티 블래스터를 준비한다.”
[예, 그건?]
오퍼레이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당혹해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비티 블래스터는 고중력을 수속형태로 모은 뒤 쏘아내는 중력파 포였다. 위력적이긴 하지만, 그걸로 맞받아친다고 해도 감마 레이 버스트는 그 성질 자체가 광범위 파장에 가까워서 막을 수 없었다.
“걱정할 것 없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그럼 일단은 믿겠습니다.]
아르페인의 장담에, 오퍼레이터는 즉시 그래비티 블래스터를 가동시켰다. 카멜롯의 선미 쪽 외장갑이 슬라이드 형태로 개방되더니, 거대한 포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화기 제어는 내가 맡는다. 수동 제어로 부탁한다.”
[수동 제어라니요!? 함장, 그건 무립니다!]
화기 관제 담당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 드넓은 우주 공간에서 자동화기관제 시스템 없이 포격을 다룬다는 건 너무도 무모한 짓이었다. 조금만 발사각이 틀어져도 수십, 수백 킬로미터 이상 빗겨나갈 수 있는데다, 우주 환경에서는 온갖 변수 때문에 정확히 조준한다 해도 맞출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변수들을 제어해 주는 게 바로 자동화기관제 시스템인데, 지금 아르페인은 그것을 정지시키고 수동으로 제어하겠다며 우기고 있었다.
“그만! 지금 논쟁할 시간 따윈 없다! 내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 명령에 따라! 어서!”
[···알겠습니다.]
불만과 초조함이 뒤섞인 얼굴로 명령에 순응하는 화기 관제 담당. 그의 생각을 모를 리 없었지만, 아르페인은 강압적으로 지시하였다.
그리고 곧 화기의 제어권이 그에게 넘어왔다.
몇 가지 제어 터미널과 함께 타깃 사이트가 펼쳐졌다. 조금만 어긋나도 수백 킬로미터를 빗나갈 수 있는 수동제어였지만, 아르페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제어해 나가고 있었다.
위이잉!
포구에 맺히는 막대한 중력자! 그것이 한 점에 수속되면서 평소보다 더 고압축 고중력 형태의 칠흑빛 구체로 빚어졌다.
이건 이전까지의 그래비티 블래스터의 포격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었다.
[이건!?]
오퍼레이터가 놀라 외쳤다. 그렇지만 아르페인은 그의 반응에 대답해줄 것도 없이, 곧바로 외쳤다.
“자, 간다! 수속 작열형 그래비티 이레이저! 파이어!”
고오오오!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은 탄환이 쏘아졌다. 지금까지의 그래비티 블래스터가 일직선으로 뿜어지는 조사 형태였다면, 이건 압축된 탄환 그 자체였다.
그것은 마치 극도로 응집된 변동중력원 현상인 블랙홀을 연상케 하였다.
쿠오오오!
때마침 디체로부터 무시무시한 붉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이 주역을 온통 붉은 파장의 빛으로 물들여버릴 듯 온 사방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일순간 영하 수십 도 이하를 밑돌던 이 일대의 우주 공간이 무려 수천, 수만 도 수준의 열기로 들끓어 올랐다. 그리고 무수한 소행성들이 그 열기에 녹아 스러졌고, 여기 저기 떠다니던 데브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감마 레이 버스트의 범위 안에 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이제 그것은 직진 궤도상에 놓인 아이틀란 행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헌데 그 순간, 선명한 주홍빛으로 물드는 우주공간 위로, 아르페인이 쏘아낸 중력자 탄환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붉은 화폭에 작은 점 하나를 찍어놓은 듯, 아주 미세하고 작은 탄환이었지만, 그것은 곧 상상할 수 없는 파급력을 일으켰다.
구우우우우!
일정 영역에 도달한 순간, 검은 탄환이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처음 착탄한 포인트 지점을 시작으로 무려 수천만 배 이상 확대되어 나가는 그것은 마치 붉은 화폭을 집어삼키는 검은 공허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갔다. 한없이 사방으로 세력을 뻗쳐나가려던 감마 레이의 빛은 마치 블랙홀에 집어삼켜지는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집어삼켜져 사라지고 말았다.
[이게··· 대체······!?]
[방금 그건··· 설마!?]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은 여전히 건재한 상태니까 정신들 차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를 내놓는 오퍼레이터들에게 일침을 내린 아르페인은 즉시 공격에 들어갔다.
감마 레이 버스트를 쏘아내고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놈들을 타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콰콰콰콰! 콰우우! 투두두두! 지이잉!
인피니티 킹덤의 함대로부터 무시무시한 포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출력은 최대치로 끌어올린 상태인만큼 최대치의 화력을 쏟아낸다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만전인 상태였다.
행성 하나를 초토화시켜도 부족함이 없는 화력이 해적들을 향해 퍼부어졌다.
그러자 놈들에게서도 곧 당황한 반응들이 나타났다. 이미 놈들은 한 차례 화력을 투사한
상태였다. 에너지를 잔뜩 소모한 상태에서 인피니티 킹덤의 화력 투사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여기저기서 격침되는 해적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놈들도 다급히 배리어를 전개했지만, 갑작스럽게 전개한 배리어의 내구성으로 지금의 공격을 견뎌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놈들도 그냥 당해줄 생각은 없는지, 곧 반응을 내보였다.
[디체 급속 전진! 카멜롯을 노리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오퍼레이터의 보고에, 아르페인은 놈들의 의도를 읽었다. 인피니티 킹덤의 모함인 카멜롯을 쳐서 구심점을 제거하고,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으냐?”
아르페인은 그 즉시 2차 그래비티 블래스트를 준비했다. 제아무리 준대형 전함인 디체라 하더라도 이 거리에서 좀 전과 같은 화력을 투사하면 대파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이다.
헌데 그때였다.
[디체로부터 작은 인영을 포착! 영력 반응을 보유한 인간형 개체! 고위 영능력자입니다. 추정 랭크는 S급! 라이브러리 데이터를 대조해 본 결과 로일라 해적단의 두목인 로일라 프로바일입니다!]
“그렇군. 놈들의 머리가 직접 나섰나?”
S랭크의 영능력자는 어지간한 전함 이상의 위협이었다. 게다가 전함에 비해 소형이면서 그에 준하는 공격력을 가진 만큼, 더없이 치명적이고 위험했다.
그때까지 모든 지휘권한을 아르페인에게 맡기고 잠자코 지켜보던 이진운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군.”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래.”
이진운은 즉시 배틀 슈트를 작동시킨 뒤, 메인 브릿지에서 벗어나 해치로 향했다. 그러자 해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승무원들이 그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이진운도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즉시 해치를 넘어 우주 공간으로 뛰어내렸다.
위잉!
곧 작동하는 배틀 슈트의 플로트 윙! 등 뒤에서 광익이 전개되면서 그는 부자연스럽던 우주공간의 활동에서 완벽히 자유로워졌다.
“저놈인가?”
이진운의 눈에도 곧 놈이 보였다. 로일라 해적단의 우두머리 로일라 프로바일.
그는 매우 음험하게 생긴 중년 사내였다. 역시 해적질 해먹게 생긴 풍채와 외모였다.
이진운은 놈을 바라보면서 품평하듯 중얼거렸다.
“이름만 들었을 땐 여자인 줄 알았는데, 재수 없게 생긴 사내 녀석이었군.”
“건방진 놈이구나! 내 이름가지고 그딴 소리를 지껄인 녀석 중에선 지금까지 살아 있는 녀석이 없었다. 네놈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 자신감이 대단하군. 하지만 그게 내 앞에서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구나.”
이진운이 놈을 비웃듯 내뱉자, 로일라가 으르렁 대며 분노를 드러냈다.
“···일단은 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수준으로 만들겠다. 그리곤 손맛을 좀 봐야겠어. 클라이언트들은 네놈을 죽이라 했지만, 우리가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참을 수가 없구나.”
“클라이언트라고?”
“너무 쓸데없는 말을 했군.”
되묻는 이진운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로일라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허나 놈은 곧 괜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 곧 내 손에 고문당하다 죽을 놈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