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84화 (85/448)

4권-09화

스스슥!

그녀의 창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수풀을 기어가는 뱀처럼 휘어지면서 시야를 현혹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자라면 궤적의 변화를 읽기 힘든 공격 앞에 당황해 하겠지만, 이진운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간단히 읽고 대응했다.

그가 손을 앞으로 내밀자, 엘레나의 변화무쌍하던 창끝이 그대로 붙잡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엘레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 즉시 자신의 창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미 무기를 제압당한 상황에서 더 붙잡고 있어야 의미가 없음을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기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기에 굳이 미련 둘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 그녀가 구현한 무기는 활. 거리를 벌리자마자 할 수 있는 원거리 공격이었다. 대기를 관통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벼락처럼 쏘아진다.

피이잉!

점창의 대표적인 검공인 사일검은 그 옛적 후예가 해를 쏘아 떨어뜨렸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처럼, 점창에도 활에 관련한 무공은 여럿 존재했다.

그 중 하나인 관양궁은 궁술 무공 중에서도 일절이었다. 쏘자마자 위맹한 기세의 화살이 이진운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보기에는 그냥 화살을 쏜 듯 보이지만, 거기에는 다양한 변화가 첨가되어 있었다. 화살은 나선으로 회전하고 있었고, 진기에 의해 끊임없이 진동까지 하고 있어 그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이진운은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것만으로도 화살은 그를 지나쳐 저 편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잇따라 화살을 구현한 엘레나가 곧장 연사에 들어간 것이다. 관양궁의 구화전뢰(九火箭雷)였다.

피피피핑!

마치 동시에 쏘아낸 듯 퍼부어진 화살 세례. 아홉 가닥의 화살이 이진운의 전신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어지간한 총탄보다도 더 빠른 화살들이었지만, 이진운에겐 전부 느리게 보였다. 그것들 하나하나의 속도를 가감하면서 그것들을 검으로 일일이 순서대로 쳐내고 있었다.

허나 그건 잠시간의 시간을 벌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마침 엘레나의 활에 걸린 화살로 상당량의 진기가 응집되고 있었다.

그리고 활시위가 튕겨지는 순간, 화살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쏘아졌다. 그것은 마치 레일건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관양궁의 절초 일원신기전(日源迅起箭)!

그것은 특수한 방법으로 불어넣은 진기의 힘이 화살을 날아가는 와중에 재차 가속시켜서, 종국에는 무시무시한 가속도를 붙게 하는 수법이었다. 초음속 전투기로 비유하자면 애프터버너 효과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구화전뢰를 상대하느라 신경이 쏠린 상황이라면, 여지없이 허를 찌를만한 일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가 나빴다. 이미 구화전뢰를 사용한 시점부터 그녀의 수는 이진운에게 낱낱이 읽혔던 것이다.

구화전뢰의 화살들을 쳐내자마자 이진운은 앞으로 가속해 나갔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음속을 돌파했고, 두 번째 발이 나아가는 순간 그는 극초음속의 영역에 접어들고 있었다.

시공간이 앞당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이진운은 일원신기전의 궤적에서 벗어나 엘레나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는 그대로 멈춰 서고는 아무런 대응조차 못하고 있는 엘레나의 목 앞에 검 끝을 겨누었다. 이걸로 대련은 마무리 되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활을 내려놓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졌다는 항복 표시였다.

“이걸로 또 졌네요, 스승님.”

“이건 당연한 결과니 너무 실망하진 마라. 너와 비슷한 수준으로 상대해주긴 했다만, 나하고 너 사이에 경지에서부터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알기나 하냐?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양호한 거다.”

엘레나의 푸념에 이진운은 피식 웃고는 일단 칭찬부터 해 주었다.

“그래도 얼마 전에 비해 많이 늘었구나. 정말 몰라볼 정도로 무섭도록 늘었어. 이젠 어디 가서 제대로 무공을 익혔다고 말해도 괜찮겠는데.”

“그래봐야 스승님이 마음만 먹으면 일초지적인데요? 그것도 제 수준에 동일하게 맞춰서 상대하면서도요. 정말 저하고 비슷한 수준에 맞춘 것 맞아요?”

“이 스승이 그런 걸로 거짓말 할 것 같으냐? 너하고 완전히 똑같은 수준이었다. 다만 한정된 진기를 어떻게 적재적소에 활용하느냐에 따라 이렇게까지 결과가 달라질 수 있지.”

“아직도 멀었다는 얘기군요.”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엘레나가 이진운에게 무공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지는 불과 몇 주 되지도 않았지만, 이미 일류 고수나 다름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보다 먼저 배운 클레브가 벌써부터 거의 따라잡힐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아직 만족을 몰랐다.

어떻게 보면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나쁘지 않았다. 정도를 넘어서지만 않는다면, 그런 마음가짐이 오히려 성취를 더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진운은 엘레나아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다그치지 않고, 칭찬을 반복하며 가르쳤다. 자신이 올바르게, 그리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창을 빼앗기자마자 무기를 포기한 건 좋은 판단이었다. 그리고 거리를 벌려 활을 선택한 것도 괜찮았고. 하지만 마지막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문제요? 어떤 문제요?”

“너는 구화전뢰로 내 신경을 분산시켰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물론 상대에 따라선 먹혀들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에 쓴 일원신기전이 문제였다. 특히 일원신기전 같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한 수법은 뒤가 없지. 만일 일원신기전이 먹히지 않는 경우라면 오히려 네가 역공을 당해 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무모한 도박에 올인(All in)하지 마라 이거네요.”

어린 엘레나의 입에서 도박과 관련된 단어가 쉽게 튀어나오자,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한숨지었다. 지구에서도 꽤나 음모론으로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문 출신이라고 하더니, 도박 같은 건 아주 가벼운 여흥처럼 경험해 봤던 모양이었다.

“···그 비유는 좀 그렇긴 하다만, 어쨌든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네가 사용한 수법이 먹히지 않을 경우, 대처할 만한 수단도 따로 생각해 둬야 해.”

“예, 뭘 하든 그 뒷감당을 할 보험 한 가지 정도는 항상 생각해 두도록 할게요.”

역시 말하는 거나 표현하는 방식이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답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라는 말이 나올 텐데, 여기서 뒷감당 할 보험 운운이라니.

자신이 대체 지금 몇 살짜리 아이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무튼 이진운은 요 며칠간 엘레나의 무공을 다듬어 주었다.

아리엔과 클레브는 이제 나름대로 혼자 수련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지만, 엘레나는 고유이능의 특성에 맞게 따로 가르칠 필요가 있어서였다.

엘레나는 자신의 능력인 무기구현으로 다양한 전술을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진운은 이 특성을 최대한 살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쓸만한 이능을 그냥 무기만 달랑 구현하는 정도로 끝내면 너무 아깝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엘레나를 가르치는 방식은 조금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클레브와 아리엔은 몇 가지 무공을 정해두고 그것을 경지에 이르도록 계속 숙달하는 방식이었다면, 엘레나는 다양한 무기와 무공들을 폭넓게 섭렵하도록 한 것이다.

본래 이진운의 전문 분야는 검술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무공들을 알고 있으며, 그것들의 수준도 결코 낮지 않았다.

특히 점창은 도가문파이면서도 상당히 실전적인 성향의 무공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검술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취급하는 무공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검술을 시작으로, 창술과 궁술, 그리고 그 외에도 몇 가지 기문병기나 암기술까지 가르쳤다. 그녀가 구현할 수 있는 상당수의 무기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대련이었다. 이제 겨우 걸음마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엘레나는 이전과 비교한다면 몇 배나 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걸로 오늘 수련은 이만 끝내자. 오후에는 이 스승도 좀 바빠서 말이야.”

“아, 진수식 때문인가요?”

“그래, 준비는 다 해뒀겠지?”

“예, 짐이랄 것도 얼마 없어서요. 몇 가지만 챙기면 끝나요.”

오늘 진수식에는 다수의 고위직 인사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엘레나는 그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 출신인 만큼 그런 자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어린 소녀가 그 자리에 있어봐야 별로 좋을 것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 진수식을 치르고 출정하게 될 모함인 카멜롯에 미리 탑승해 있기로 하였다.

“그럼 난 먼저 가마. 넌 어서 짐 챙겨서 카멜롯에 가 있어라. 진수식 끝나면 바로 출정하게 될 테니까.”

“예, 그럴게요.”

이진운은 그렇게 다시 당부해 두고는 수련장을 떠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진수식을 치르고, 연합의 높으신 분들의 낯짝을 봐야 할 때였다.

* * *

진수식은 상당히 성대한 규모로 치러졌다. 왜냐면 이곳에 관리국장인 베네트와 천외오천의 일원인 연정운과 멀린이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프론사이드 가문의 가주인 가이란 프론사이드와, 바이우드 가문의 가주인 바이첸 바이우드가 참석하였다. 그들 두 가문의 가주가 참석하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어지간한 큰일이 아니고서는 쉽게 엉덩이를 움직이는 작자들이 아닌데, 고작 이런 작은 독립함대의 진수식에 참석할 줄이야.

덕분에 리스티만 더 주목을 받았다. 본가인 프론사이드 가문과 데면데면한 사이라고 소문이 났었는데, 가이란 프론사이드가 이곳에 참석함으로서 그 소문을 더 이상 신뢰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관리국에서 신경 쓸 만했군.”

“프론사이드 가와 바이우드 가문이 주목하고 있다니···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건가?”

“프론사이드 가와 리스티 양이 서로 사이가 안 좋다더니, 다 헛소문이었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던, 리스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에 더 반응해봐야 자신에게 더 안 좋은 이야기만 퍼져나갈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가이란 프론사이드가 다가왔다. 그리곤 염려의 말부터 건넸다.

“우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니 항상 몸조심 하거라.”

“제 몸은 제가 알아서 챙겨요. 그러니 이제 와서 걱정해주시는 척 하지 마시죠.”

“···그래, 알았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보였지만, 가이란 프론사이드는 주저하다가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 이야기 해 봐야 거리감만 더 커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리스티가 받았던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이 컸다.

그것이 걱정된 이진운이 옆으로 다가갔지만, 그것을 눈치 챈 리스티가 애써 웃으며 만류했다.

“괜찮아요, 아저씨. 이미 익숙한 걸요. 그러니까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

“정말이지 조금 잊을 만 하면 찾아오시네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모른 척 외면해야 할까요? 이미 너무 먼 길을 돌아왔어요. 이제 와서 아버지를 다시 받아들일 수도 없죠. 그렇다고 가문으로 돌아갈 입장도 아니지만······.”

지나가듯 담담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느낀 아픔과 회한이 담겨 있었다.

이진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이진운이 대답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리스티의 아픔에는 공감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그녀 스스로 느끼고 판단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리스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걸로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헌데 그때였다. 처음 보는 누군가가 그들 옆으로 다가왔다. 그냥 행사 때문에 옆을 스쳐지나가는 줄 알았더니, 이진운에게 목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만만치 않은 자군.’

이진운은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궁무진한 힘을 느꼈다. 그것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지금까지 자신과 같은 내공이 아닌, 이능이라는 힘을 다루는 자들은 숫하게 봐 왔지만 지금처럼 이질적인 힘을 다루는 자는 처음이었다.

이것은 그냥 영능이 아니다. 이걸 뭐라 표연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진운은 내심 확신했다. 분명 영능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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