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82화 (83/448)

4권-07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부함장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것은 마치 이진운에게는 자조하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제가 지금까지 함장이 되지 않은 것은··· 절 키워주신 스승님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습니다만··· 사실은 함장이 된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어차피 망할 세상, 뭔가를 해도 의미가 없다고 여겼었죠.”

부함장이 연합의 고위층이나 알법한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어떤 절망감에 빠져 살아왔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물론 50년에서 100년 후에나 벌어질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연합이 어떤 상황에 놓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으리라.

“제 스승님은 그런 저보고 미리부터 걱정을 사서 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50년이라고 해 봐야 얼마 안 됩니다. 요즘 같이 의학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는 평범한 사람도 150년에서 200년은 너끈히 삽니다. 만일 제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는다면 제 처와 가족은 50년 뒤에 과연 어떻게 될까요?”

“······.”

이진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연합 전체가 무너지는 상황이 온다면 그의 가족이라고 해서 무사할 리 없다는 건 누구라도 알 테니까.

그건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상상 속의 미래였지만, 그 미래를 확신하고 있는 부함장에게는 또 하나의 현실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상상하니 밤에도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도 포기하고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왔지요. 차라리 혼자 살다 죽는다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주먹까지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그를 사로잡아왔던 절망감이 얼마나 큰 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이진운은 그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와서 제게 의탁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텐데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바로 이진운 씨 때문이죠.”

자신을 언급하는 그 말에,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금 자신에게 뭘 기대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전생의 실력조차 다 회복하지 못한 지금은 그 기대에 미처 부응할 수가 없어서였다.

“휴··· 그때 세계수를 갈랐던 힘은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져 생겨난 우연의 일치였습니다. 지금은 다시 쓰라고 해도 힘들고요.”

“예, 그에 대해선 저도 대충 이야기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다 해도 언젠가는 가능해질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

“대답을 안 하시는 걸 보니 가능하긴 하군요. 아무튼 그때의 일은 충격이었습니다.”

이진운은 이번에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상대가 정확히 정곡을 집어내서였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아마 앞으로 수년만 지나면 자신의 힘만으로도 구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에 대해 입 밖에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 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장담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십니까? 제가 다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제가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딱히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제 느낌이지요.”

“느낌이요?”

이진운은 일순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어떤 근거나 확신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고?

지금 이 작자가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로베르타인이 잠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자의 한 말로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내 제자의 직감은 분명 사실일세. 그 덕분에 나도 여러 번 위기를 넘겼지. 어떨 땐 이 녀석의 직감이 무슨 미래예지나 그쪽에 관련된 이능력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정확했다네.”

“그런데도 이능이 아니라고요?”

“몇 번이나 검사해봤지만 아니었네. 오로라 시스템에도 그와 관련된 이능은 등록된 것이 없었고.”

그게 사실이라면 좀 신기한 일이긴 했다. 허나 아주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남들보다 상단전의 영성이 그런 방향으로 크게 깨어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아마 그가 중원에서 태어났다면 술사로 꽤나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흐음······.”

이진운은 잠시 갈등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를 함장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이 가진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으니, 그만큼 함장의 역할에 대해서도 적극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 녀석이 가진 능력은 그뿐만이 아니라네. 지금까지 프라이스 호를 지켜왔던 가장 큰 비장의 무기였지.”

로베르타인은 지금까지 꼭꼭 숨겨왔던 부함장의 능력을 밝혔다. 그것은 이진운으로서도 사뭇 놀라운 것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연정운조차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그런 이능도 다 있습니까?”

“그렇다네. 이능이란 게 워낙 천차만별인 건 알았지만, 이런 능력이 존재한다는 건 이 녀석을 통해 처음 알았지.”

설마 전함에 특화된 이능이라니! 세상이 이렇게 발전하다 보니 이능이란 것도 그런 형태로 나타날 수 있게 된 듯 보였다.

‘이렇게 되면 그를 영입 안할 수가 없겠어.’

이진운은 내심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신에 대한 과한 기대감을 품는 것 때문에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한 함장감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곧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그럼 그를 저희 모함의 함장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아마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걸세. 그만큼 유능한 녀석이거든.”

로베르타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장담하였다.

반면 연정운은 영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아쉽군, 아쉬워. 나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그를 진작에 우리 함장으로 영입했을 텐데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인재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

나름대로 뛰어난 함장감이란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렇게까지 독보적인 능력을 갖춘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미리 선점해서 자신의 함대 골드 서퍼의 일원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군침 그만 삼켜라. 여기까지 들린다. 이제 부함장은 우리 함대 사람이다. 너무 눈독 들이지 말라고.”

“알았다 알았어. 벌써부터 자기 사람을 먼저 챙기는 거냐?”

이진운이 딱 선을 긋자, 연정운은 혀를 차며 그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이미 영입이 끝난 상대를 두고 친구와 다투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연정운을 단념시킨 이진운은 부함장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별 생각 없이 그냥 부함장이라고만 불렀는데, 부함장님 본명이 어떻게 됩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 이름을 사령관님께 소개 안했었군요.”

지금까지 부함장이란 직책이 입에 붙어서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부함장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이진운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것은 부함장이 자신을 부른 호칭 때문이었다.

“사령관님?”

“이제 제 상관 아니십니까? 한 함대를 이끄는 분이니 사령관님이라고 호칭하는 게 맞지요.”

당연하다고 내놓은 그 대답에, 이진운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낯설단 표정을 지었다.

“···뭐 그렇긴 그렇군요. 근데 귀에 익질 않은 호칭이라 좀 어색한 느낌이군.”

하지만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이제 함대를 이끌게 되면 자신의 이름보다는 사령관이란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릴 테니까.

그렇게 납득한 그에게, 부함장이 드디어 자기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 아르페인 크로울리입니다. 전 고아라서 성을 스승님에게 받았지요.”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르페인 함장. 이제부터 당신이 제 함대 모함의 함장이 되는 겁니다.”

“예,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진운과 아르페인은 서로 악수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아르페인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할 일이 잔뜩 생겨버렸다.

일단은 함대에 대한 지휘 권한이었다. 모든 지휘 권한은 사령관인 이진운이 쥐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가 직접 전선에 나가 싸워야 하는 전투타입 오버러라는 게 문제였다.

설명을 듣고 난 아르페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전투 시에는 제가 작전권이나 지휘권을 이양 받아야 한다 이거군요.”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난 함대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그런 내가 지휘권을 휘두른다면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유능한 함장을 구하려고 했던 거고.”

“하긴 오버러 출신 함장들 중에선 그런 경우가 많지요.”

“게다가 난 그냥 오버러도 아니야. 무려 S랭크 급에 버금가는 실력자지. 나가서 인베이더와 싸워야 하는 내가 모함의 메인 브릿지에 처박혀서 지휘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렇다면 굳이 독립함대를 세운 이유가 뭡니까?”

“무능한 상관 만나서 내 발로 죽는 자리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거든. 적어도 내 함대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 말만 들어도 이진운의 성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르페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할 때는 제가 지휘하는 걸로 하지요.”

그렇게 서로의 작전 권한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두 사람은, 앞으로 조직될 함대에 대해 논의했다.

일단은 함대를 운용하기 위해선 제대로 된 체계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진운은 그에게 곧 완성될 모함과 전함들의 데이터를 그대로 제공했다.

이제 앞으로 20일 뒤에는 자신이 보유할 독립함대의 함장이 될 사람이었다. 이 정도 정보 제공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본 아르페인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진운의 함대에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기술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믿기지가 않는군요. 이런 게 가능하다고요?”

“대부분 리스티가 개발한 것들이지. 나도 어느 정도 참여는 했고. 새로 도입되는 것들이라서 낯선 것들이 좀 많을 거야.”

“아무래도 함대 운용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새로운 전함에 맞는 작전이 필요하겠어요.”

새로운 기술과 병기가 개발되면, 그에 맞는 새로운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법이다. 아르페인은 남은 시간동안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진수식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앞으로 20일 정도?”

“너무 시간이 촉박하군요.”

아르페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새로운 전술 전략을 짜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함대의 승무원들에게 훈련시켜서 숙달하는 과정까지 필요했다. 그것을 20일 내에 모두 끝내려면 매일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함장으로서 받게 된 첫 임무인데··· 어떻게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해낼 수밖에.

“그런대 함대의 명칭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직도 이름이 없는 것 같던데요.”

“고민을 해 봤는데, 마땅한 이름이 없더군. 그래서 대충 떠오르는 대로 지었어.”

그렇게 말한 이진운은 자신이 지은 함대의 명칭을 홀로그램 창에 적어 주었다.

이터니티 킹덤(Eternity Kingdom)

그것이 새로운 독립함대의 이름이었다.

“영원한 왕성이라. 나쁘진 않군요. 그럼 함대의 중추가 될 모함의 이름은 어떻게 정하실 겁니까?”

“영원한 왕성에 어울리는 이름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지.”

이진운은 그 옆에 모함이 될 전함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카멜롯(Camelot).

아더왕의 전설에 나오는 왕성의 이름. 그것이 장차 새로운 전설이 될 전함의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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