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81화 (82/448)

4권-06화

“오히려 걱정되는 건 이쪽이죠.”

“뭔데?”

그보단 다른 문제가 있다는 말에 이진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군수업체가 부릴 수작질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리스티가 대체 무엇을 걱정한단 말인가?

“신조전함의 이름이요. 아직 짓지도 못했잖아요.”

“···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이진운은 잠시 기운 빠진 탄성을 내고 말았다. 뭔가 대단한 문제인가 싶었는데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이야기가 튀어나와 왠지 김이 샜던 것이다.

그렇지만 리스티의 말처럼 한번 고민해볼 문제이긴 했다. 이번에 건조될 신조전함은 앞으로 우주를 누빌 이진운에겐 발이자 집이 될 것이다.

그냥 아무 이름이나 막 지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름을 짓긴 해야겠어.”

“뭐 생각나는 거 있어요? 난 이름 짓는 쪽으론 영 별로라서··· 그러니까 아저씨가 한번 생각 좀 해 봐요.”

이름을 지어줘야 할 것은 신조전함 뿐만이 아니었다. 연정운의 함대가 골드 서퍼라 불리는 것처럼, 자신의 독립함대에 붙일 이름도 지어야 했다.

중원식 이름을 붙여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영 어색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지구인 중에서도 아시아 쪽이 아니면 제대로 된 뜻도 모를 이름을 붙여봐야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당장은 마땅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었다.

“알았다. 한번 생각은 해 보지. 완성까진 얼마나 남았지?”

“건조는 거의 다 됐어요. 지금 하고 있는 연구도 이틀 내로 마무리 될 테니··· 음, 어디보자. 대충 보름 정도 뒤에는 대부분 마무리 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보던 이진운은 결정을 내렸다.

“그럼 시간을 넉넉히 잡아서 진수식은 20일 뒤에 하는 걸로 하자. 우리 함대의 첫 출범식도 겸할 겸 해서.”

“···바쁘겠네요. 신조전함 뿐만 아니라. 다른 전함들까지 출력공유 할 수 있도록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하려면 진짜 빠듯할 걸요.”

리스티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 이진운이 말한 일정에 맞추려면 며칠 정도는 정신없이 철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리스티와 이야기를 나눈 이진운은 그 다음엔 연정운을 찾아가 만났다. 지난번 그에게 의도적으로 싸움을 걸었던 랜들 코우버와 크잔트에 대한 처결 문제 때문이었다.

조사를 다 마친 결과물을 이진운 앞에 내민 연정운은 석연치 않다는 투로 말했다.

“딱히 놈들의 배후라 할 만한 건 더 나오지 않았어. 카슈란 작자도 정말 모르는 눈치였고.”

“그래?”

이야기를 듣고도 이진운은 별다른 변화가 없자, 연정운이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인데 ···이럴 거라고 예상을 했었냐?”

“어느 정도는. 솔직히 내가 놈들의 배후 입장이었다면 절대 카슈처럼 나서지 않았을 거다. 놈들이 죽든 말든 그냥 버려뒀겠지.”

“하긴 그렇겠군.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배후의 인물이 굳이 숨긴 정체를 드러낼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야. 괜히 카슈만 손해를 봤군.”

카슈가 굳이 싸움을 걸어가면서까지 크잔트와 랜들 코우버를 빼내려 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의 파벌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부각되면 자신의 영향력도 그만큼 실추될 수밖에 없어서 그런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그 이후 크잔트와 랜들 코우버는 인베이더와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좌천되었다. 아마 그곳의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그 두 녀석은 최전선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으로 좌천시켜두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눈치 빠른 녀석들을 붙여서 놈들을 항상 주시하고 있지. 뭔가 연관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언젠가는 꼬리를 드러낼 거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크잔트의 배후라 짐작되는 작자는 꽤 용의주도한 성격이었다. S-랭크의 오버러가 갖는 위상은 결코 가볍지 않은데도, 그런 크잔트를 가볍게 한번 쓰고 버렸다.

아주 버린 건지, 아니면 사태가 조용해질 때까지 당분간 방치해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그 자는 크잔트 같은 인물을 이런 일에 가볍게 소비할 수 있을 만큼 만만치 않은 힘과 세력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정운은 크잔트 옆에 감시자를 붙여뒀다곤 했지만, 그런 자라면 아마도 쉽게 꼬리를 드러내진 않을 것이다.

‘이미 그쪽에서 먼저 날 건드렸다. 그런 작자라면 고작 이번 한번만으로 끝나진 않겠지. 언젠가 분명 또 손을 써올 게 틀림없어.’

이진운은 바로 그때를 노리기로 했다. 어떻게든 배후의 정체를 밝혀내서, 이번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시간이 되었군.”

“시간이 되다니. 무슨 볼일이라고 있나?”

시간을 운운하는 그 말에 이진운이 물었다. 분명 오늘 이 시간은 스케줄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연정운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볼일이 아니라 네 볼일이지.”

그렇게 대답한 연정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의 거처의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진운에게는 아주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 하나와 이제 30대 정도로 보이는 사내.

바로 프라이스 호의 함장인 로베르타인과 그의 제자인 부함장이었다. 오르큐스와 연정운에게 만남을 주선하긴 했지만, 설마 그게 오늘일 줄은 정말 몰랐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먼저 로베르타인이 입을 열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연정운씨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상대에게도 정중하게 대하는 로베르타인의 태도에, 이진운이 먼저 그에 대해 말을 꺼냈다.

“말을 낮추시지요. 제 나이가 함장님의 자식뻘보다도 더 어립니다. 그러니 편히 말씀하셨으면 합니다.”

“그래, 알았네. 이진운 군.”

그제야 로베르타인은 조금 전보단 편한 태도로 이진운을 마주했다. 그리곤 이곳을 찾아오게 된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꺼내놓았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일세. 우리 부함장을 자네에게 맡기고 싶네.”

예상했던 이야기인지라, 이진운도 당황해 하진 않았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 차 묻고 싶었다.

“함장님의 뜻은 알겠습니다만··· 일단 전 부함장님 본인의 의사가 어떤지 듣고 싶군요.”

“제 의사 말입니까?”

그제야 입을 여는 부함장. 그런 상대에게 이진운은 확실히 말해두었다.

“유능한 함장을 영입하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다는 분을 억지로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별다른 의욕 없는 사람은 억지로 떠맡진 않겠다는 거군요.”

“물론입니다. 사명감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저와 뜻을 함께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냥 남에게 억지로 떠밀려 오신 분이라면 어떤 일을 해도 적극적이진 못하겠지요.”

솔직히 말해 이진운 본인도 딱히 사명감이 있어서 독자적인 함대를 만드는 건 아니었다. 단지 타인에게 이것저것 간섭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군부의 체계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진 않지만, 상부의 인물 중에는 유능한 인물도 있고 무능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최소한 무능한 작자들에게 휘둘려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아서 생각해낸 게 바로 독립 라이선스 함대였던 것이다.

“독립함대를 만들긴 했지만 저도 딱히 대단한 사명감을 가진 건 아닙니다. 인베이더를 적대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에만 미친 듯이 달려들 생각도 없고요. 그래도 제 함대에서 핵심이 되는 모함의 함장이 되려면, 적어도 목표가 세워졌을 때 거기에 의욕적으로 동참할 적극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이진운이 그렇게 말을 마치자, 부함장도 일리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말만으로도 이진운의 성향이 어떠한지를 파악한 것이다.

부함장은 웃는 얼굴로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제 자신의 의사로 여기에 왔습니다, 이진운 씨.”

“함장님의 뜻이 아니라 본인의······?”

“예, 나름대로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렸죠. 그런데 표정이 좀 이상하시군요.”

“···별 거 아닙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쉽게 제안을 받아들여주셔서 조금 놀랐을 뿐이죠.”

이진운은 조금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했던 수많은 말들이 더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자신의 뜻으로 찾아온 이상,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의욕적으로 움직여줄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얼마든지요. 이제 제 상관이 되실 분인데요.”

“지금까지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 제안은 받아들인 겁니까?”

직설적인 그 물음에, 부함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당신에게서 가능성을 봤기 때문입니다.”

“가능성?”

“예, 그때 저도 봤었습니다. 세계수를 반으로 가르고도 모자라 저 하늘까지 치솟던 그 찬란하던 빛을!”

“······.”

“그걸 보면서 느꼈지요. 당신이라면··· 어쩌면 인베이더와의 오랜 싸움에서 어떤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 변화가 어떤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전 나름대로 긍정적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진운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해준다는데, 뭐라 더 말하겠는가.

하지만 그때 그 한 번의 실력행사로 너무 과대평가해주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진운도 그동안 인베이더의 세롁에 대해 배워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베이더들 중에서도 상위의, 그것도 핵심이 되는 아홉 존재들은 자신이 전생 시절의 실력을 되찾는다 해도 과연 상대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드는 괴물들뿐이었다.

그런 인베이더들을 상대로 자신이 어떤 전국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그렇게 긍정적인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뭔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은데··· 그냥 해본 말인가?’

그냥 자신을 추켜 세워주기 위해 내뱉은 말인가 싶었지만, 뒤이은 부함장의 목소리는 그런 이진운의 생각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솔직히 물어보겠습니다. 이진운 씨께서는 지금 전황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어떻게··· 라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대뜸 던져진 질문에 이진운은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 말이 지금 왜 튀오나온단 말인가?

“인베이더의 세력은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습니다. 행성을 침공하는 유닛들도 점점 진화해 가고 있고요. 이번 세계수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요.”

거기서 부함장이 자신의 한 손을 들어보였다. 보라는 듯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있었다.

“앞으로 50년. 그게 연합의 한계입니다. 조금 더 길어진다면 약 100년 정도? 그 이상은 어렵다고 봅니다.”

“50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이진운도 단번에 알아챘다. 그가 언급한 50년에서 100년이란 기간은 연합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침음성이 흘렀다.

정말로 사실인가 의문이 갔지만, 부함장은 그걸 장담하고 있었다.

“저 뿐만 아니라 연합의 상부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지 외부로 공표를 안 할 뿐이죠. 괜한 사실을 밝혀봐야 공포감만 조성해서 혼란만 일으킬 테니까요.”

이진운이 로베르타인 함장과 연정운에게 시선을 줬지만, 그들 두 사람도 굳어진 표정만 지을 뿐,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부함장이 한 그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의미였다.

전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 연합의 세력이 인베이더의 공세에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사실이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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