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77화 (78/448)

4권-02화

하지만 그의 심적 고난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럼 다음 순서로 관리국장님의 훈화가 있겠습니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선서와 상장 수여에 이어, 이번에는 훈화까지······.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금 자신이 아르탈 행성에 있는 건지, 아니면 어린 학생 시절로 회귀해 졸업식을 치르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훈화의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앞으로 정식 오버러가 된 교육생들이 우주의 평화에 훌륭히 이바지했으면 바란다는, 그런 적당한 덕담 수준의 훈화였다.

하지만 그것도 정해진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터라, 무척이나 길고 지루했다. 심지어 취재차 나온 기자들도 하품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이것으로 수료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사회자의 마지막 말과 함께 드디어 기나긴 수료식이 그 끝을 맺었다. 이제 정식 오버러가 된 교육생들은 오랫동안 서 있느라 굳어진 몸을 풀면서 진저리를 쳤다.

“아, 지친다 지쳐!”

“옛날에 내 학생 시절에 교장선생님 훈화보다 더 길고 지루했어.”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그들은 주변을 쓸쓸히 둘러보았다.

일반적인 수료식이라면 수료를 축하해줄 가족이나 친인이 찾아올 테지만, 지구에서 갑자기 소환된 그들에겐 찾아올 사람조차 없었다.

다만 지구인들 중 몇몇 사람들은 달랐다. 교육생 때부터 특출한 실력으로 조명을 받은 터라, 오버러 부대나 집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구인들과 달리, 이진운은 조금 황당한 경우를 당해야 했다. 수료식이 끝나자마자 찾아와 연정운이 내민 한 가지 물건 때문이었다.

“···뭐냐, 이건?”

“보면 알잖아. 꽃다발이지. 졸업식에는 필수 선물 아니야?”

안 그래도 수료식 때문에 짜증나 죽겠는데, 끝까지 놀려먹겠다는 건가? 이진운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주무르며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꽃다발 얼른 집어넣어라. 안 그래도 어울리지 않는 역할 하느라 기분도 안 좋은데 말이야.”

연정운도 더 이상 장난 걸 생각은 없었는지 그에게 내밀었던 꽃다발을 휙 뒤로 던져 버렸다. 그리곤 말했다.

“후후··· 뭐, 장난은 이쯤 해두지. 그건 그렇고 널 찾아온 사람이 있다.”

“나를? 누군데?”

이진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가 연합 내에서 아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몇 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연정운이 옆으로 자리를 비키자, 그 뒤에서 한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진운도 익히 잘 아는 사내였다.

그가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

“축하하네. 자네도 드디어 교육생을 벗어났구먼.”

“아, 오르큐스 씨!”

이진운은 깜짝 놀라 연정운을 돌아보았다. 오르큐스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그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금세 알아챘다. 연정운이 자신을 놀라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기척을 지워냈던 모양이었다.

“오신 줄도 몰랐군요. 몸은 이제 다 나은 겁니까?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괜찮은지 모르겠군요.”

이진운이 건강부터 묻자, 오르큐스가 괜찮다며 답했다.

“뭐,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네. 평생 동안 내 손발 같았던 이능을 사용 못하게 된 건 좀 불편하지만, 몸이야 건강하지.”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일부였던 힘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상생활부터 모든 것들이 전부 바뀌었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담담히 웃을 수 있다니, 이진운은 괜히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부터 대충 열흘 정도 지났나? 그동안 자네는 아주 유명 인사가 다 되었더군. 이젠 거물이라서 만나기도 힘들 정도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군요.”

이진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금도 주변에는 그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온 기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나마 이렇게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도 연정운이 그들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천외오천의 이름값은 무거웠다.

그때였다. 오르큐스가 갑자기 다른 화제를 언급했다.

“참, 소식은 들었네. 독립 라이선스 보유 함대를 만든다고?”

“아,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군요. 예, 그럴 생각입니다. 관리국 상부로부터 허가도 받아두었죠.”

“나야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오느라 여기저기 아는 사람이 있어서 진작 들었지. 내가 대단한 오버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인맥은 적지 않은 편일세. 여기 연정운 이 녀석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고. 이 녀석이 막 소환되었을 때 만났던 게 인연이 되었지.”

꽤나 놀라운 일이다. 그가 말한 대로 오르큐스의 랭크는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연정운을 저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걸 보니 확실히 인맥은 폭넓은 듯했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놓았다.

“내 자네를 찾아온 이유가 있네. 자네가 만들 독립함대의 함장, 내가 주선해줘도 되겠나?”

“그건 좀 곤란할 것 같군요.

좋은 제안이었지만, 문제는 이진운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그가 단호히 거절하려던 그때, 오르큐스가 먼저 그의 말을 가로채듯 입을 열었다.

“알고 있네. 함장은 관리국에서 임명한다고 했다고? 아마도 이제 막 오버러가 된 자네가 함대의 지휘권을 모두 쥐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판단했겠지.”

이미 거기까지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런데도 이런 제안을 해 왔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나 해결책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거기까지 아시는데도 이런 제안을 하신 이유가 뭐지요?”

“자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일세. 내가 주선해 줄 사람이라면 관리국에서도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거라 내 장담하지.”

이렇게까지 호언장담을 하는 걸 보니 확실한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연정운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허튼 소리는 아닌 듯 보였다.

“일단은 들어보고 싶군요. 누군데 오르큐스 씨가 이렇게 추천을 다 하시는지 말입니다.”

“로베르타인의 제자지. 그가 지금까지 키웠는데, 상당히 쓸 만한 녀석이야. 자네도 몇 번 봤을 걸세. 현재 프라이스 호의 부함장을 하고 있지.”

“아.”

지나가듯 몇 차례 본 기억이 있었다.

30대 정도로 보이던 콧수염을 기른 사내. 콧수염의 양끝을 둥글게 말아 올린 게 하도 인상적이어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실력은 장담하겠네. 벌써 15년 이상 로베르타인 밑에서 그 수발을 하면서 함장으로서의 모든 것을 배워왔지. 로베르타인 대신 함대의 지휘를 맡은 경험도 적지 않고. 올해로 마흔이 되는 녀석인데, 함장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확실히 출중하다네.”

“그런 실력자가 어째서 아직까지 부함장을 하고 있는 건지 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이진운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오르큐스는 그럴 수밖에 없다며 말했다.

“독립하려면 진작 할 수 있었네. 하지만 녀석은 로베르타인을 좀 체 떠나지 않더군. 아마도 자신을 키워준 은혜를 그렇게 갚겠다는 생각에서겠지.”

듣자 하니 로베르타인의 제자는 본디 떠돌이 고아 출신이라고 했다. 그를 받은 것이 바로 로베르타인이었고, 그는 함장으로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자신의 제자에게 모두 가르쳤다.

아주 오랫동안 현역에서 활약해온 노년의 함장들만 아니라면, 그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는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독립을 한사코 거절해왔다. 워낙 능력이 뛰어난 탓에 제안은 숫하게 많이 받아왔지만, 그는 스승의 곁을 떠나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오르큐스가 그래서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로베르타인은 그걸 원하지 않네. 자신이 늙어죽을 때까지 제자가 자신의 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나? 그래서 자네를 선택한 것일세.”

사정을 다 듣고 난 뒤, 잠시 생각해보던 이진운이 다시 물었다. 그래도 선뜻 결정하기엔 뭔가 부족해서였다.

“뭐,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저의 뭘 보고, 선택하셨답니까? 그 로베르타인 함장은. 조금 뛰어난 공훈을 세우긴 했지만, 이제 겨우 신입 오버러일 뿐인데 말입니다.”

“자네의 어디를 신입이라 생각할 수나 있겠나? 그리고 그날 세계수를 갈랐던 놀라운 빛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네. 그런 자네라면 그 녀석을 충분히 품을 자격이 있어.”

“······.”

이진운도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자신은 일반적인 오버러라 하기 힘들었다. 전생의 비밀을 밝힐 수가 없는 만큼, 남들 눈에는 믿기지 않는 능력과 재능을 보유했다고 보고 있을 것이다.

“음, 알겠습니다. 일단은 한번 만나보고 결정하기로 하지요.”

“잘 생각했네. 아마 만나보면 확신이 생길 것일세. 그 녀석을 함장으로 받아야 한다는 확신이 말이야.”

아직 확정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그 자가 함장이 된 것 마냥 확신하는 오르큐스였다. 그만큼 실력을 자신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게 일단락되자, 연정운이 제안을 해왔다.

“자, 그럼 이만 돌아갈까? 오늘 저녁 식사는 내가 사기로 하지. 수료식 기념으로 말이야. 아주 제대로 된 만찬을 보여주지.”

하긴 천외오천 쯤 되면 가진 재산도 많을 것이다. 아주 장담하는 걸 보니 어지간한 호화만찬 이상을 준비해 둔 듯했다.

하지만 이진운은 곧장 거절의 뜻을 내보였다.

“아니, 됐어.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고? 수료식은 다 끝났잖아.”

무슨 소리냐며 묻는 그 말에, 이진운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다음에 치를 행사가 있거든.”

“뭔 행사? 나는 관리국에게 언급 받은 적이 없는데?”

천외오천 쯤 되면 어지간한 규모의 행사나 정보들은 다 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이 언급한 수료식 이후의 행사에 대해선 들은 기억이 없었다.

“관리국 행사가 아니니까 언급이 없었겠지. 뭐, 관리국에게 허락은 받았지만.”

“허락을 받았다니··· 그럼 방금 말한 행사라는 게 설마 네가 주최하는 행사라는 거냐?”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반응을 보이는 연정운. 이진운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 내가 주최하는 행사지. 정확히 말하자면 리스티와 공동 주관 행사지만.”

그때였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금 전까지 수료식을 진행하던 단상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료식을 위해 준비된 것들이 지표면 아래로 내려가고, 다른 것들이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족보행병기, 메탈 기어와 흡사하게 생긴 로봇이었다.

그 정체를 알아본 연정운이 대뜸 물어왔다. 그도 관리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만큼 저 이족보행병기에 대한 정보는 이미 접해봤기 때문이었다.

“저··· 저거! 네가 개발했다던 그 기간트란 병기 맞지?”

“그래.”

“네가 말한 행사가 이거였나?”

이제야 모든 게 일목요연해졌다. 이진운이 뭘 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래, 무기를 팔아먹으려면 이렇게 대대적으로 광고부터 해야지. 마침 수료식 때문에 기자들도 잔뜩 몰려있는 이때야말로 쇼 케이스 타임으로는 적당하지 않겠어?”

히죽 웃으면서 어떠냐는 듯 묻는 이진운의 모습에, 연정운은 그저 헛웃음만 삼켰다.

“너도 참··· 정말 대담한 녀석이다. 수료식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이걸 허락해준 관리국 놈들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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