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76화 (77/448)

4권-01화

춤을 추는 듯한 검격이 이어졌다. 연무장을 현란하게 누비는 검로는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맞선 상대의 검도 비슷한 흐름을 자아내 적극 격돌해왔다.

검 자체를 부딪치기 보다는 검 끝에서 뿜어지는 예광인 검기를 적극 사용하는 고차원적인 대련!

두 개의 검에서 시작된 푸른 잔광들은 서로 어지럽게 뒤엉키면서 현란한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얼마나 격렬하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검기는 말 그대로 닿는 모든 것을 베는 예기의 결정체. 괜히 검기의 폭풍에 휘말렸다간 산산이 조각나 시체조차 못 건지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기엔 둘 중 하나는 죽을 것처럼 보이는 흉험해 보이는 이 대련도 사실 그 내막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있는 아리엔과, 그것을 여유롭게 받아주고 있는 이진운.

이건 시작부터 아리엔을 가르치기 위한 지도대련이었다. 겉보기에 대등해 보였던 건 어디까지나 이진운이 아리엔의 수준에 맞춰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아마 조금이라도 진심을 보였다면 단 일합 만에 승부가 갈렸을 것이다.

어느 정도 검을 주고받은 두 사제는 마지막 격돌과 함께 세 발자국씩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을 거둬들였다.

이렇게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하게 된 것은 지난번 랜들 코우버와 싸우면서 실력이 급증한 아리엔의 검술을 한번 제대로 점검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결과,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진운은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고했다. 확실히 많이 늘었구나.”

“하아··· 하아···. 별 말씀을요. 이제 겨우··· 후우, 조금 검에 대해 알 것 같은 수준인 걸요. 아직 멀었죠.”

조금 칭찬해줄까 했던 이진운은 그 말에 생각을 바꿨다. 검에 대해 알 것 같다는 제자의 말에 조금 어패가 있어서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예?”

갑자기 돌변한 스승의 태도에 깜짝 놀라 움츠리는 아리엔. 그런 제자에게 이진운은 조용히 다그쳤다.

“나도 아직 검에 대해 다 안다고 하기 어려운데, 고작 네 수준에서 검에 대해 알 것 같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앞으로도 더 정진해라. 적어도 여기 기준으로 마이스터 급(S랭크). 절대지경은 되어야 검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그건 좀 허들이 지나치게 높네요.”

이젠 그의 입에서 절대지경까지 언급되자, 아리엔은 기운 없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이제 겨우 절정의 시작을 밟은 그녀로서는 너무도 까마득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본래 무예란 깊이 파고들수록 그 끝을 더 알 수 없는 법이다. 나도 아직 그 끝이 보이질 않는구나.”

제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과장한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현경을 넘어 반선지경의 깨달음까지 얻은 지금도 검술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 펼쳐진 길이 너무도 아득해서 망망대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현경일 때만 해도 생사경에 올라서면 무예의 끝에 도달할 줄 알았건만··· 막상 올라서 보니 그게 겨우 시작점이었지.’

현경까지가 인간이란 카테고리 내에서 보일 수 있는 초인의 경지였다면, 생사경-반선지경부터는 말 그대로 그런 기존의 종 자체를 넘어선 영적인 초월의 격을 획득해 가는 과정이었다.

인간의 격을 벗어났다고 해도, 초월의 세계에선 말 그대로 걸음마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제자에겐 아직도 머나먼 훗날에나 알 일이었다. 지금은 조금은 칭찬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네 솜씨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하긴 네 나이에 절정 고수 수준이면 누구에게도 자랑할 만한 성취지.”

“고··· 고맙습니다.”

아리엔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조금 꾸중할 것 같았던 이진운이 갑자기 자기를 칭찬해 준 게 이상해서였다.

하지만 마침 그때, 밴더의 알람이 울렸다. 그것을 확인한 아리엔이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이진운에게 말을 걸었다.

“저··· 그런데요, 스승님?”

“뭔데? 말해 봐라.”

“스승님, 이만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시간이 벌써 9시가 다 되었는데요.”

9시라는 언급에, 이진운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아, 그래. 오늘이었지.”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탄식에 가까운 어투로 중얼거렸다.

“이 나이에 수료식이라니······.”

* * *

수료식. 그것은 관리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인베이더와 대적하는 핵심 세력인 아르탈 행성 연합에는 변두리 우주에서부터 소환되는 소환자들을 받고 있었고, 그들을 철저히 교육시켜서 확실한 전력으로 만들었다.

오늘은 바로 그 소환자들이 교육을 이수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수료식은 바로 관리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에어포트에서 진행되었다. 수많은 교육생들이 도열한 가운데, 그 주변에는 수료식을 관람하러 온 참석자들로 가득했다.

지구에서 소환된 교육생들인 만큼 가족이나 친인은 없었지만, 그들을 영입하려는 자들이나 혹은 관심을 가진 자들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또 그 중에는 이진운을 취재하기 위해 참석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오베른 행성에서 시작된 그의 활약상은 방송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였다.

이진운이 에어포트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카메라와 마이크가 그 앞에 들이밀어졌다. 그리고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오늘 수료식을 갖게 되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앞으로 계획은 따로 있으십니까?”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연합의 전례에도 없던 독립 라이선스 함대를 신청하셨다고 하던데요? 대체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그렇지만 이진운은 전부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일일이 질문을 받아줘 봐야 끝이 없어서였다. 자신이 관심종자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진운은 이런 것 자체를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의 존재가 알려질 정도로 방송에 얼굴을 잠시 내비췄던 것은 어디까지나 점창파를 연합 내에 재건하기 위함이었지, 자신이 정말 유명세를 타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기자들의 해일을 헤치고 나아가자,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연정운이었다.

연정운이 조금 사나운 시선을 던지자, 기자들이 알아서 흩어져 주었다. 언젠가 연정운에게도 그렇게 달라붙다가 아주 된통 데어봤던 모양이었다.

이진운은 그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끈덕진 놈들을 떨쳐낼 수 있었군.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로 고맙기는. 아무튼 간에 기자들 난리 법석인 거, 나도 겪어 봐서 잘 알지. 저런 놈들은 관심을 먹고사는 존재라서, 딱 잘라서 떼어내야 해. 안 그러면 귀찮아진다.”

“너처럼 겁주면 이상한 기사 올리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놈들에게 적당한 수위의 제재를 보여줘야지. 기자 놈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악당이야. 괜히 기레기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알아서 겁먹게 하면 잘들 입 닥치고 있더군.”

요는 겁을 줘서 입을 다물게 하란 말이었다. 지구와 같은 이능 없는 세계에서라면 공권력 때문에 그런 짓이 쉽지 않겠지만, 이곳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특히 연정운 정도의 위치라면 일개 가십거리 기자 하나 밑바닥으로 내려앉히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이진운이 이번에는 연정운에게 용무를 물었다.

“그건 그렇고··· 바빠서 시간도 없다는 녀석이 무슨 일로 왔어?”

“그래도 친구 녀석, 졸업한다는 데 시간 내서 축하는 해 줘야지.”

“축하는 무슨. 이 나이에 수료식을 치른다는 데 이게 축하할 일이냐?”

이진운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학생 시절이나 해봤을 수료식이라니! 이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일개 교육생도 아니고, 교육생 대표였다. 우수한 성적에, 심지어 오베른 행성에서 세운 공훈까지 더해진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 이진운의 낙담 어린 표정을 바라보면서, 연정운은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래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 게 어디냐? 우리 땐 그냥 닥치고 전쟁투입이었어. 교육이란 것도 고작 며칠짜리라서, 이능이란 게 어떤 것이다 그 정도만 알고 전쟁을 치렀는데 말이야. 그땐 진짜 무시무시했지. 생존률이 거의 10% 미만이었으니까.”

“무슨 6.25시절의 막나가던 중공군도 아니고···.”

연정운이 내뱉은 옛 시절의 이야기에, 이진운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그 말은 결국 총 쥐고 쏘는 법만 간단히 가르쳐서 닥치고 돌격 시켰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수료식 잘 치러라. 내 지켜본다.”

“보지 말고 꺼져!”

이진운은 자신을 놀리고 싶어 안달난 연정운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수료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교육생들은 대열을 갖추었고, 이진운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로 앞에 나섰다. 그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냐.”

수료식이 시작되었다. 절차는 어릴 적 학교에서 받았던 수료식 절차와 흡사했다. 연합의 깃발에 의례식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절차는 대동소이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교육생 대표 앞으로!”

그는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이것도 모두 예정되어 있던 절차였다. 그리고 선서가 시작되었다. 시작 낭독은 이진운이 하였고, 그 뒤에 나머지 교육생들이 그를 따라 외치는 그런 진행방식이었다.

이진운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낯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고 외쳤다.

“선서!”

“선서!”

“우리는 우주를 지키기 위해 모인 우주의 안녕을 위해······.”

“우리는 우주를······.”

그렇게 선서를 이어나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우주를 지키는 역군이 되어, 모든 것을 다해 인베이더를 구제하고 지성체들의 안녕을 이어나가겠다는 맹세였다.

흔히 히포크라테스 선서하고도 비슷했다. 다만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질병을 구축하겠다는 것이고, 이건 인베이더를 구축하고 우주를 지키겠다고 맹세한다는 내용이 조금 다를 뿐이다.

부끄러움을 애써 참아내 가며 간신히 선서 과정을 마친 뒤에는 상장 수여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진운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상장 수여는 관리국장인 베네트가 직접 하게 되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얼굴에,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하필이면 저 자 앞에서 이런 낯부끄러운 짓을 하게 될 줄이야.

베네트도 그런 이진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상장 수여식을 시작했다.

“위 교육생은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 과정을 마쳤고, 실전 교육 때엔 인베이더들을 상대로 놀라운 공훈으로······ 위 상장을 수여함···.”

이진운은 베네트가 건네는 상장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경련을 일으킨 것처럼 떨리는 게, 어지간히도 이 상황이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광활한 우주각지에서 몰려온 수많은 카메라들이 집중된 지금, 이진운은 타들어가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정말 애썼다. 어쩌면 평생의 인내심을 다 썼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진운에게 베네트가 농담처럼 말을 건네 왔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어조였다.

“인생에 딱 한번 뿐인 수료식이네. 좀 즐겁게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댁이 한번 입장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떨 것 같소? 이 나이에 애들도 아니고 수료식이라니··· 창피하게시리···.”

이진운이 짜증 어린 말투로 되받아쳤지만, 그래도 베네트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후후··· 그럼 즐거운 시간 되게나.”

그는 상장수여를 해주면서 절차대로 이진운과 악수를 나눴다. 자신의 손을 잡은 이진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느껴졌지만, 그 정도론 아프지 않았다.

‘이게 무슨 꼴이냐. 연정운 말대로 기록될 만한 흑역사군.’

상장을 받고 단상에서 내려온 이진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학생 시절같은 학사모는 안 쓴 게 천만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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