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75화 (76/448)

3권-25화

“그건 그렇고, 저놈들 수사기관에 넘기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이진운은 고갯짓으로 자신이 제압해둔 크잔트와 랜들 코우버를 가리켰다. 현재 아리엔과 클레브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둘을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나눈 대화를 전혀 듣지 못했다. 연정운이 영력으로 무형의 장벽을 만들어 소리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연정운이 곧 대답을 내놓았다.

“글쎄다. 일단 드러난 혐의가 있으니 어쨌든 처벌은 받겠지. 하지만 그렇게 큰 처벌은 아닐 거야. 그러니 너무 기대하진 마라.”

“어째서냐?”

“카슈, 그 놈이 가진 정치력도 보통은 아니야. 아마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동원해서 최대한 감면 받도록 할 게 분명해. 잘 해봐야 지금 직책에서 물러나서 어디론가 좌천되는 정도겠지.”

“기가 막히는 군. 이만큼 난리를 치고도 고작 그 정도인가.”

자신이 난데없이 공격을 받은 것도 문제였지만, 랜들 코우버와 크잔트, 그리고 카슈가 날뛰면서 이 일대는 아주 쑥대밭이 되었다. 성한 게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적 피해를 돈으로 환산하자면 가히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람들이 미리 대피한 탓에 인명피해가 없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치르는 죄의 대가가 고작 좌천이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에게 직접 듣고 나니 더 화가 치미는 기분이었다.

연정운도 그런 이진운의 분노를 읽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놈은 명색이 베네트 국장과 대립하는 반대 파벌의 수장이야. 베네트 국장의 세력이 훨씬 강하긴 하지만, 놈에겐 적어도 그 정도 역량은 있어.”

“결국은 죄명이 분명한 것도 정치논리로 덮겠다는 거군.”

“그렇기야 한데··· 카슈, 그놈도 그냥 별 탈 없이 넘어가진 못하겠지. 베네트 국장과 그 밑의 세력도 눈 부릅뜨고 있던 상황이니까. 정치적인 거래를 통해 어느 정도 손해는 봐야 할 걸?”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봐야 놈들이 입는 손해가 겉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었다. 놈들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고, 그 손실은 시간이 가면 다 메워질 테니까.

그때, 연정운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암만 생각해봐도 이유를 모르겠군.”

“뭘 말이지?”

“너를 공격했던 이유를 모르겠다고. 단순히 널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이번에는 이진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내가 보기엔 그놈들도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벌릴 의도는 없었을 거야. 본래라면 랜들 코우버 하나로 끝날 일이었는데, 내가 숨어 있던 크잔트를 억지로 끌어내면서 사태를 크게 키워버렸지. 그래서 이 난리가 난 거고.”

이진운이 크잔트의 존재를 알아챈 뒤 그 즉시 문답무용으로 박살내 버렸고, 다음에는 카슈가 어쩔 수 없이 뒷수습을 위해 나서게 된 거니까.

아마 랜들 코우버가 소동 부리는 걸로 끝났다면, 흔히 볼 수 있는 오버러 간의 다툼 정도로 이야기는 마무리 됐을 것이다.

“하긴 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왤까? 랜들 코우버를 움직여서까지 널 굳이 시험해 봐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건가?”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이쪽 정치에 대해선 나도 크게 아는 게 없으니까. 생각 나는 대로 굳이 짚어본다면··· 어쩌면 그쪽에서는 내가 베네트 국장 파벌로 인식되고 있어서 일수도 있겠군. 나름대로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군.”

이진운의 추측에, 연정운도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주어진 단서가 적은 만큼, 그 정도가 그들이 추측할 수 있는 한계였다.

하지만 뭔가 시원치가 않았다. 뭔가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도 조심해라.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내 직감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물리과학만 발달된 지구에서 직감을 논한다면 단순한 미신 취급을 하겠지만, 이곳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능을 다루는 자는 기본적으로 일반인에 비해 직감이 비상식적으로 발달되는 법. 특히 연정운 정도의 강자라면, 그건 거의 미래예지에 가까웠다.

그러니 직감이라 해서 그 말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이진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고 있어. 뭐, 이번 소동에 어떤 의도가 있었다면 그놈들이 조만간 뭔가 움직임을 보이겠지.”

“무슨 문제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그래도 같은 고향 출신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지. 내 연락처는 알고 있지?”

“그래, 지난번에 네 밴더 코드는 받아놨었잖아.”

이진운은 그의 도움을 사양하지 않았다. 도움을 받으면 언젠가 그만큼 되갚아주면 되는 일이었다.

대충 할 이야기가 끝나자 연정운의 시선이 이진운의 제자들 쪽으로 향했다. 그들을 잠시 살펴보던 그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저 세 사람 말이야. 다 네 제자들이라고?”

“그래, 여기 와서 받은 내 제자들이야.”

“짧은 기간 동안 잘도 저기까지 키웠네. 실력들이 제법인데?”

“아직도 멀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진운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저들을 볼 때면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제자 같은 걸 받고 싶은데··· 내 능력이 누군가에게 가르쳐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이건 좀 부럽군.”

“언제 시간 되면 네 능력을 제대로 체계화 시켜 봐. 너 정도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시간이 나야 말이지. 그놈의 인베이더 놈들은 쉴 새 없이 쳐들어오고. 그놈들 소탕하느라 돌아다니다 보면 뭐 개인 시간이 별로 없어.”

입맛을 다시며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연정운. 그는 밴더를 열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조금 급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가 봐야겠다. 할 일이 있어서.”

“그래, 가 봐라. 그리고 오늘 도움 고맙다.”

이진운은 슬며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마 연정운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카슈와 일대 격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뒷감당도 전부 혼자서 감당해야 했겠지.

연정운도 그 말속에 담긴 이진운의 생각을 읽은 듯, 조금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식이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아무튼 나중에 또 보자.”

그 말만 남기고 금세 사라져 버린 연정운. 이곳을 찾아올 때와 다를 바 없는 신출귀몰한 움직임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이진운과 멀린 뿐이었다. 조금 전부터 잠자코 듣고만 있던 멀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흐음, 저도 이만 가 봐야겠네요. 이진운 씨, 언제 한번 따로 시간을 내서 저와 단 둘이서만 만나 뵙고 싶군요.”

“뭐?”

“그럼 이만.”

뭐라 말할 새도 없었다. 놈은 그 즉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연정운처럼 고속이동도 아니었다.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하듯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상한 놈이군.”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고 싶다고?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게다가 단 둘이라니, 그건 무슨 의도인 거지?

‘설마 게이는 아니겠지?’

불현듯 그런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진운은 즉시 그 망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놈이 내뱉은 말의 뉘앙스는 조금 의미심장했다. 가벼운 뜻으로 한 말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따로 용건이 있다면 언제가 됐든 알아서 날 찾아오겠지.’

치미는 궁금증을 떨쳐낸 이진운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그만 가자. 그 두 놈은 잘 끌고 오고.”

“예.”

이진운은 크잔트와 랜들 코우버를 둘러맨 두 제자를 데리고 관리국 본청으로 향했다. 이제 이 두 놈들을 관리국 수사기관에 넘길 차례였다.

* * *

거리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거대한 힘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는 고위의 오버러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이번 사태를 배후에서 주도한 자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무엇 때문이십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자가 공손하게 물었다. 그것만 봐도 그들 사이에도 상하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흰 수염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이진운이란 자 말이다. 확실히 재간은 뛰어났다. 소환된 지 고작 몇 달 된 지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실력이더군. 허나······.”

잠시 말은 멈춘 그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방금 봤던 이진운의 움직임과 힘의 크기, 그리고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읽고 평가해봤지만, 역시나 결과는 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세계수를 파괴할 만큼의 강대한 힘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교면에서는 확실히 압도적이긴 하나··· 힘 자체는 S-랭크에도 간신히 발을 들이민 수준이더군. 어떻게 오베른 행성에서 세계수를 파괴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세계수의 장점은 출력의 공유와 어지간한 충격에도 견뎌내는 내구성이다. 대 함대가 몰려와 포격을 가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데, 그런 세계수가 일거에 반으로 쪼개져 파괴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흰 수염의 사내가 여전히 우려를 지우지 못하자, 다른 사내가 그 뜻을 공손히 받들었다.

“그렇다면 그 자에 대해 더 철저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만일 뭔가 숨기는 힘이 있다면 확실히 알아봐라.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구나.”

“하지만 그래봐야 전세에 별 영향을 주진 않을 거라 봅니다. 놈이 강하다 해도 고작 한 명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얕볼 수도 없는 일이다. 천외오천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느냐?”

“으음.”

사내도 자신의 상관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천외오천은 말 그대로 돌발변수였다. 그런 강자들이 영능 따윈 존재하지 않던 외진 행성출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외오천 덕분에 그들의 계획은 무려 십년 이상 뒤로 미뤄져야 했다. 그 경우를 생각하면 아직 실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라 해도 방심할 수 없었다.

상대는 무려 세계수를 일거에 파괴한 존재. 어떤 잠재력을 숨기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진운에 대한 정보를 더 깊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조사하는 건 좋지만 들키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흰수염의 사내는 수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해 뒀으면 알아서 잘 처리해 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자신들이 내린 명령을 제대로 수행 못한 크잔트에 대한 문제였다.

“그건 그렇고 크잔트 녀석, 생각보다 쓸모가 별로 없군요. 제아무리 방심했다곤 하지만, 저렇게 형편없이 당해서 제압되다니. 나중에 따로 교육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관리국에 들어가고 나서는 마음가짐이 너무 해이해졌어요.”

“그건 알아서 해라. 처벌 받아야 할 게 있다면 받아야지.”

무심히 대꾸하는 흰 수염의 사내. 그에게 있어 크잔트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수하의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게 맡기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수하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옥좌에 남아 있던 흰 수염의 사내는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계수가 파괴되었다곤 하지만, 모든 계획은 아직 순조로운 편이군. 그건 고작 프로토 타입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그리고 세계수는 우리 계획의 첫 서막일 뿐이지.”

관리국으로 하여금 경각심을 일으켰던 세계수의 존재는, 흰 수염의 사내에게 있어선 고작 해봐야 대원을 이루기 위한 밑바탕에 불과했다.

“이제 머지않았다. 무려 삼백 년의 기다림이었다! 그 긴 기다림도 이제 슬슬 끝을 내야겠지.”

계획대로만 된다면 자신의 숙원을 성취하는 데까지는 불과 몇 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그때를 기다리며, 지친 듯 두 눈을 감았다.

밀실의 어둠은 더욱 깊어지고, 흰 수염의 사내는 그 너머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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