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74화 (75/448)

3권-24화

* * *

카슈가 이곳을 떠나고 나자, 용성군의 존재도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남아 있을 용무가 없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일도 없는 것 같군. 그럼 나는 먼저 돌아가 있도록 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용성군의 존재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잠시 희안하다는 듯 지켜보던 이진운이 연정운에게 물었다.

“방금 그 용성군이란 사람은 뭐지? 자기가 하산이라 하던데?”

이진운도 하산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었다. 그 옛날 중동 지방에서 활약했던 전설의 암살자 [산의 노인-산상노인]의 이름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후계자들은 하산이란 이름을 이어받아 암살자 집단으로 오랫동안 활약했다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카슈에게 용성군이라 불린 걸 보면 그가 진짜 하산은 아닐 터. 그렇다면 대체 왜 저런 꼴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그런 의문을 읽은 것인지, 연정운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놈도 이놈하고 비슷한 부류야. 내가 알기로는 대만 출신으로 아는데··· 자길 끝까지 하산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더라고. 전형적인 코스프레 컨셉충이지.”

“···멀린도 모자라 하산이라. 천외오천에는 다 저런 녀석들밖에 없는 건가?”

하도 기가 막혀 헛웃음만 나왔다. 저 정도 수준으로 기량을 갈고 닦은 강자가, 고작 하는 짓이 코스프레란 말인가?

물론 사람의 취향이란 다양한 법이니 하산 흉내를 내고 다닌다고 해서 별 문제될 건 없었다. 하지만 단순 흉내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정말로 하산이라고 여길 만큼, 거의 자기최면수준에 빠진 건 좀 심각했다.

“뭐, 그렇지. 이 자리에 없는 녀석 둘도 매한가지고. 나 빼고 다 비정상이라니까.”

‘너도 내 눈엔 별로 정상으론 안 보인다만······.’

연정운의 말에 이진운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런 이진운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연정운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야. 서둘러 강해지기 위해 너무 무리한 짓을 해서 다들 제정신들이 아니니까. 저렇게 해서라도 정신 붙잡고 있는 게 용하지.”

“어떤 이유라도 있나 보지?”

“그래, 이유야 있지. 저렇게 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이진운의 물음에, 문득 씁쓸한 표정을 짓는 연정운. 그는 오래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소환된 것이 지구에서는 최초였어. 말 그대로 초창기였지. 그래서 누군가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지구인에 대한 취급도 별로 좋지 못했었어. 지금보다 지원해주는 것도 거의 없어서 모든 면에서 훨씬 열악했지.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싸움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했었다.”

“······.”

이진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연정운이 소환되었던 때의 상황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가서였다. 아무런 이능조차 없던 지구에서 끌려온 지구인들이 어떤 처지에 놓였을 지는 안 봐도 뻔했다.

‘말 그대로 쓰다 버리는 패였겠지.’

제아무리 오로라 시스템에 의해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해도, 일정 수준까지 강해지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교육과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과연 아르탈 행성 연합에서 지구인들에게 그만한 투자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까?

아니었다. 그들은 지구인들을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이능을 접해 봤던 자들이라면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테지만, 영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자들이라면 투자하는 가치에 비해 성장기대치 또한 낮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결국 지구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연정운을 비롯한 몇몇 지구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굳게 결의했다.

“그래서 선택한 거야. 어떻게든 강해지기로. 우리 지구인들이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가 그만한 투자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야.”

“그래서 천외오천이 된 거였군.”

“맞아. 우리가 천외오천이라 불리게 된 뒤에는 지구인에 대한 시선도 많이 바뀌었지. 적당한 투자만 있다면 얼마든지 강자가 나올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행성인으로 말이야.”

“그럼 그 덕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가?”

“뭐, 그런 셈이지. 그러니까 우리한테 좀 더 고마워하라고. 우리 땐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았으니 말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연정운이었지만, 이진운은 그 가벼운 표정 속에 많은 아픔이 서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있었다. 천외오천이 왜 강해지려 했는지 그 동기는 알게 되었지만, 어떻게 해서 이 정도로 강해졌고, 그리고 왜 저런 상태가 됐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이진운이 먼저 물음을 던졌다.

“그래도 좀 비정상적이군. 너희가 소환된 지가 10년이라고 했지? 고작 10년 만에 그렇게까지 강해질 수가 있는 건가? 내가 볼 땐 오로라 시스템의 도움이 있다 해도 그건 너무 지나친 성과인데?”

그렇지만 그 질문에 오히려 연정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질문을 거꾸로 이진운에게 돌렸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넌 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야? 소환된 지 고작 몇 개월 만에 마이스터(S) 급 오버러를 박살내다니 말이야. 이건 전례에도 없던 일이라고. 믿기지 않는 성장을 이뤘다고 평가받는 우리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던졌던 질문이 오히려 자신에게 돌아오자, 이진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짧게 대답해 주었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 다 말은 해줄 수 없지만, 이건 성장이 아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는 과정이지. 아직도 멀었다.”

많은 것을 알려주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연정운은 약간 놀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오? 그런 거였나? 원래부터 강했던 거였어? 우리같이 지구에서 태어난 네가 어떻게 처음부터 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제야 앞뒤가 맞네. 하긴 이상했지. 처음부터 알데마란 같은 걸 서슴없이 때려잡는 게 좀 이상하다 했다.”

처음부터 이진운의 활약은 이질적이었다. 그건 연정운이 봐도 그러했다. 제아무리 오로라 시스템이 정신력을 강화시켜준다곤 하지만, 그의 싸움은 너무도 냉정하고 수많은 경험이 묻어나 있었다. 전투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지 않고선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지구에 있을 적에 전장에서 활동하던 인물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영력의 활용이 너무도 고차원적이고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비로소 그 의문이 풀렸다.

“뭐, 좋아. 그 정도면 만족했으니, 나도 답을 줘야겠지.”

연정운은 말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옆에 있던 멀린을 가리켰다. 그리곤 이야기했다.

“아까 말했었지. 멀린의 고유이능이 환술이라고. 그게 이능인지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쪽 계통에서는 독보적이야.”

“이거, 연정운 씨가 칭찬을 다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빙글빙글 웃으며 몸을 배배 트는 멀린.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과장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 눈에 거슬린 연정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쳐! 지금 그건 칭찬이 아니야!”

“예이··· 예이.”

멀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은 채, 성의 없이 대답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멀린의 모습을 노려보면서 연정운은 아직도 화가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며 이를 갈아붙였다.

“젠장, 저놈 환술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네. 저 놈은 정상이 아니야. 정상적인 인간의 감성에서 아득히 벗어난 녀석이라고. 한마디로 미친놈이지. 덕분에 강해지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친 짓이었어.”

“하긴 지금 태도만 봐도 정상은 아니군.”

이진운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능청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게다가 일부로 연정운의 화를 돋우기까지 했다.

장난기가 넘치는 건지,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어 화를 돋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써 화를 억누른 연정운이 자신들이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우린 저 녀석의 환술을 이용했다. 현실과 다름없는 환술 세계에서 수련을 한 거지. 거기선 시간도 공간도 멀린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

“아! 그런 식인가?”

“무려 천년이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수련한 시간은.”

일이십년도 아니고 무려 천년이란 말에, 이진운도 놀라 입을 다물었다. 이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폐관수련도 고작 해봐야 불과 몇 개월에서 몇 년인데, 무려 천년이라니! 그런 긴 시간을 보내고도 미치지 않은 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이진운의 표정을 읽은 연정운은 자조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야. 그래서 다들 제각기 컨셉 하나로 만들어서 나갔지. 용성군은 자신이 하산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가면서 자아를 유지했고, 다른 녀석들도 그와 비슷해. 자기 취미나 뭔가가 있으면 그걸로 밀고 나아갔으니까.”

그랬다. 이능에 대해 전혀 몰랐던 지구인인 그들이 불과 10년 만에 이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것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려 천년이라니! 그건 이진운이라 해도 정말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비록 환술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실과 다름없다면 정신과 육체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할 것이다.

이진운 자신도 천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보내라고 한다면··· 정말로 견뎌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뭔가를 쏘는 것이 즐거웠어. 그래서 그 쪽만 파고들었지. 지구에 있을 때도 사격이냐 양궁 같은 걸 취미로 했었고. 그래서 겨우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아니더라고. 다 무슨 서브컬처 같은 거에 빠진 오타쿠 녀석들 천지였지.”

“그래서 그 결과가 하산 흉내 내는 용성군인가 하는 사람 같이 됐다, 이건가?”

“좀 한심해 보이겠지만··· 그래. 네 말대로야. 죄다 그 꼴이 됐지. 자신의 이능에 서브컬처에 등장하던 비슷한 인물을 대입시켜서 정신을 유지한 거야. 그 컨셉으로 자신이 더 강해진다고 자기최면을 건 거지. 그렇게라도 즐기지 않으면 천년이란 시간이 주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이제야 사람들에게 천외오천이라 칭송받는 자들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결국 그들도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연정운이 말을 이어나갔다.

“전에 말했을 거야. 같은 지구인 출신들이 우리를 두고 천외오천 대신 흑역사 5인방이라고 한다고.”

“그래, 들었었지. 그게 그런 의미였군.”

이진운도 이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왜 그런 건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같은 지구인 출신이니 우리가 어떤 컨셉이나 캐릭터 흉내를 내는지 잘 아니까 붙은 치욕적인 악명이지··· 젠장할. 이젠 떼려야 뗄 수도 없어. 지구로 귀환하면 이건 진짜 흑역사다.”

연정운은 시름어린 표정으로 그렇게 뇌아렸다. 자신들에게 붙은 흑역사 5인방이란 오명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퍼진 자신들의 오명이 지구에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진운이 볼 땐 소용없는 걱정인 듯했다.

“그걸 걱정하기엔 이미 늦은 것 아닌가? 우주적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그 스케일부터가 지구 수준을 훨씬 초월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우리와 같은 지구인 출신 놈들이 말이야. 지구에서 유행하던 서브컬처들을 연합 내에 퍼뜨리고 있어. 어떤 놈들은 취미랍시고 직접 만화나 소설로 만들어서 팔아먹고 있다고! 그게 심지어 영화나 게임화 될 조짐도 보이고. 이런 빌어먹을 놈들이! 더 짜증나는 건 그게 너무 잘 나가! 이젠 우리가 손을 써도 막을 수가 없을 정도야! 아마 저작권 가진 지구의 회사들이 알면 발칵 뒤집어질걸?”

“으음······.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 말은 즉··· 천외오천이 어떤 서브컬쳐의 캐릭터 흉내를 내고 있는지, 아르탈 연합 사람들도 점점 알아간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너희들의 흑역사가 점점 널리 알려진다는 거겠군.”

지금까진 지구출신의 소환자들만 아는 흑역사 5인방이었지만, 이젠 지구 규모를 넘어선 우주적인 흑역사 5인방이 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자신이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가 될 지경이었다.

이진운은 연정운을 흘깃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천외오천 녀석들하고는 거리를 둬야겠구나.’

물론 그와 가까워서 이득 될 게 많으니 멀리 하진 않겠지만, 대외적으로 친한 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남의 일이긴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반면 옆에 여전히 붙어 있는 멀린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그걸 남의 일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흑역사 5인방이라 불리는 부끄러운 오명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보였다.

‘정말 알 수 없는 자군. 그런 대단한 환술을 부리는 자 치고는 너무 가볍고 경박해.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야.’

이러니 연정운이 멀린의 도움을 받아 강해졌으면서도, 그를 질색하며 싫어할 수밖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