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73화 (74/448)

3권-23화

‘졸지에 동물원 원숭이 꼴이 되었군.’

이진운은 내심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지가 문제였다.

그건 눈앞의 카슈란 작자도 마찬가지였는지, 연정운의 등장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하긴 사태를 이렇게까지 키운 마당에 천외오천까지 나타났으니, 상대에게 어떤 구실이나 빌미를 제공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연정운이 카슈를 향해 흘깃 시선을 던지더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슈, 그쯤에서 그만두지 그래. 설마 나와도 한판 붙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 말에 안색이 변한 카슈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진운이라면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천외오천까지 적으로 돌릴 수는 없어서였다.

“나도 싸우고 싶어 싸우는 게 아니다. 저 두 녀석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이진운이 나를 막아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사태가 이렇게 커지게 된 귀책사유는 바로 저 쪽에 있다.”

놈은 어떻게든 이진운의 책임으로 떠넘기려 했지만, 그런 수작은 연정운에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 치며 되돌려주었다.

“웃기는 소리는 그 쯤 하고. 먼저 이진운을 기습한 건 저 두 녀석 아니야? 특히 랜들 코우버인지 뭔지 하는 듣보잡 말이야.”

“듣보잡? 그게 무슨 뜻이지?”

“아? 하긴 여기 사람들은 모르는 축약어인가? 쉽게 말해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란 뜻이지.”

“······.”

그것을 모욕으로 느낀 것일까? 카슈는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싸움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여기서 더 문제를 키웠다간 정말 수습할 수 없게 될 것 같아서였다.

도발에 걸려들지 않는 카슈의 모습에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연정운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말이야. 먼저 기습한 놈들을 제압해서 수사기관에 넘기겠다는데, 그걸 막으려 한 네가 더 수상한 걸?”

“단순한 시비에 의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크잔트는 지켜봤다는 것만으로 기습공격을 당했고.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가며 말이야.”

카슈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그에 뒤질세라 이진운이 끼어들었다.

“누명? 아주 적반하장으로 나오는군. 내가 봤을 때 랜들 코우버란 녀석의 정신에 뭔가 간섭한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자패턴은 저 크잔트란 놈과 동일했고.”

“아하? 일이 그렇게 된 거였나? 하긴 속내가 음흉한 네놈이면 무슨 흉계를 꾸몄는지 안 봐도 뻔하지.”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연정운. 그는 이진운이 제압해둔 크잔트와 랜들 코우버를 살폈다.

“확실히 의심스런 흔적이 있네. 정신계 이능인 건 분명한데··· 그 영자패턴이 크잔트의 것이라··· 이 녀석, 알려진 것 외에도 다른 고유이능을 숨기고 있었군. 이건 확실한 증거가 되겠어.”

천외오천의 일인인 연정운이 공언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카슈를 향했다.

그러자 카슈도 제법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번 사태에 대한 의혹이 전부 자신이 뒤집어쓰게 생겨서였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연정운의 말이 그의 극단적인 결심을 부추겼다.

“우선 이놈들은 관리국의 수사과로 넘겨야겠네. 의혹거리가 생겼으니 일단 수사는 해야지.”

“기어코 나랑 끝까지 해보겠다는 건가, 연정운!”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카슈의 전신에서 다시 무시무시한 기운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래비티 포스가 들끓어 오르면서 주변의 지표면이 퍽퍽 내려앉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앞에 선 연정운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무런 기운도 끌어내지 않았지만, 언제든 맞상대할 자신이 있어서였다.

“아, 그래? 그럼 너는 나랑 한번 해볼 자신이 있어?”

“······.”

카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는 천외오천의 일인인 마탄의 사수였다. 그런 강자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허나 그때였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깊은 소리가 모두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었다.

데에엥! 데에엥!

길게 울리는 종소리. 그것은 청명하면서도 깊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아는 자들의 안색은 즉시 변했다. 이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엔 항상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환하던 주변이 어둡고 으슥해지더니, 짙음 음영의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것은 곧 사람의 형상을 하더니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치 빛을 빨아들일 듯한 육중한 칠흑빛 갑주와, 하얀 뼈로 만들어진 해골 가면을 쓴 사내.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에서는 푸른 기화가 피어올랐다.

그가 카슈를 향해 커다란 검을 겨누며 말했다.

[어리석은 자 앞에 만종이 울렸다.]

다시 한 번 높이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사내의 전신에서 검은 오라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그의 상징 중 하나인 멸사기(滅死氣)였다.

[그대인가. 죽음을 목전에 둔 망자가.]

“···용성군. 네놈까지!”

상대를 뚫어지게 노려본 카슈가 상대의 이름을 짓씹듯 내뱉었다. 하지만 용성군이라 불린 사내는 그 말을 부정하듯 대꾸했다.

[나는 하산. 하산 중의 하산이니라.]

“여전히 그딴 헛소리를 잘도 하는군. 너도 지금 날 막겠다는 거냐?”

당장이라도 싸울 듯 으르렁대는 카슈였지만, 하는 말과 달리 섣불리 움직이진 못했다. 눈앞의 용성군 또한 천외오천의 일인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둘이나 되는 천외오천을 적으로 돌리면 무사할 수 없었다.

용성군은 카슈를 노려보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부정한 짓을 저지른 자여. 여기서 더 나아가겠다면, 나도 너의 적이 되리라.]

우우우우!

그의 주변을 둘러싼 어둠이 울부짖었다. 그것은 넓게 퍼져나가면서 용성군의 형상을 어둠 그 자체로 만들었다.

이젠 어둠과 용성군의 형상이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것을 본 카슈가 이를 갈며 내뱉었다.

“종언의 그림자냐······!”

용성군이 가진 유명한 성명절기 중 하나. 이런 술수까지 드러냈다면 진짜로 싸울 의향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상황이 이쯤 되니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카슈로서도 크잔트와 랜들 코우버를 포기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짓씹듯 내뱉었다.

“크··· 언제나 그랬지. 천외오천. 네놈들은 항상 사사건건 방해만 되었어. 이번에도 그렇고. 관리국장의 앞잡이들 같으니. 언제까지 내 발목을 물고 늘어질 셈이냐?”

카슈가 성난 목소리를 이어가려던 그때,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그건 방금 전까지 이 자리에 없던, 조금 낯선 자의 음성이었다.

“뭐, 그건 좀 안타깝게 되셨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수작을 부리다 들켰으니 재수가 없다고 여기셔야죠.”

말과 함께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사내. 그는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발로 자른 금발에, 소년처럼 생긴 앳된 모습의 사내. 손에는 보석이 박힌 긴 석장을 지팡이처럼 쥐고 있었다.

“이번엔 멀린, 네놈까지···!”

사내의 모습을 본 카슈는 이젠 화가 나다 못해 짜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만큼 눈앞의 마법사는 성가신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카슈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가까운 친구 멀린입니다!”

상황에 걸맞지 않는 그의 해맑은 인사에,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이진운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던 그는 그가 밝힌 멀린이란 이름을 생각하고는 연정운에게 물었다.

“멀린? 혹시 그 멀린을 말하는 건가? 저 녀석도 천외오천인가?”

이진운도 그 이름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전생 시절에는 몰랐지만, 현생에서는 아주 유명했으니까.

아서왕의 전설에 나오는 킹메이커 마법사 멀린. 그가 정말로 그 멀린이란 말인가?

혹시나 싶어 물었지만, 역시 기대했던 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와 같은 천외오천인건 맞는데, 진짜 멀린인지 어떤지는 나도 몰라. 저 녀석은 이곳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부터 줄곧 저 컨셉을 유지하고 있었지. 단순 코스프레충인지, 아니면 진짜로 자신을 멀린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 대답에 조금 실망스러웠던 이진운이었지만, 뒤이은 연정운의 말에 조금은 멀린을 달리 보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저 녀석만큼 대단한 마법사는 여태껏 본 적이 없어. 특히 환술 계통에 있어선 말이야. 진짜 멀린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렇군.”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능글맞게 웃는 사내로 보였지만, 그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건가?

이진운으로서는 아직 상대의 실력에 대해 감이 안 잡혔다.

한편, 카슈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천외오천 중 무려 셋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웃기는군. 천외오천이 나 하나 때문에 다 모였어. 여기서 옹기종기 동창회라도 열 생각이냐?”

분하다는 듯 천외오천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는 카슈를 향해, 연정운이 적당히 타협을 제시했다. 그들 셋이 이곳에 모였다 하더라도, 여기서 사태를 더 키우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네가 여기서 물러나겠다면 우리도 적당히 사정을 봐주지. 이 친구도 우리와 같은 지구 출신이거든. 괜한 일로 피해를 보는 건 사양이야.”

“···좋다. 그럼 이쯤에서 나도 그만 두지. 하지만 잊지 마라.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다며 크잔트와 랜들 코우버를 포기하고 물러서는 카슈. 하지만 그 원한은 잊지 않겠다며 내뱉고는 떠나갔다.

연정운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성질 하고는.”

이진운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렇게 큰 소동을 일으키고도 아무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는 카슈의 실질적인 직위가 뭔지 궁금해서였다.

“저 카슈란 놈은 대체 뭐지? 뭔데 저렇게 설치고 다닐 수 있는 거냐? 이렇게 난리를 쳤으면 체포당해 끌려가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만.”

“관리국에서도 제법 서열이 되지. 베네트 국장과 사사건건 맞붙는 반대파벌의 수장인걸?”

“반대파벌? 관리국은 국장이 전부 장악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관리국이라고 해서 모두 생각이 같은 건 아니야. 저 녀석처럼 국장과 의견을 달리하는 무리들도 제법 있지. 그래도 국장의 힘이 워낙 강해서 별 문제는 없었지만, 저 녀석들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돈 아니야.”

“그런 거였군.”

이진운은 납득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란 것일까?

이능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만 다를 뿐, 이곳도 정치적인 파벌을 만들어 서로 부딪치는 건 지구와 똑같았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힘과 영향력이 필요해.’

이진운에게 그만한 영향력과 힘이 있었다면, 카슈란 놈도 이렇게까지 수작을 부리거나 덤벼 오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군. 대체 뭣 때문에 날 공격한 거지?’

처음에는 단순히 질시 때문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랜들 코우버를 정신능력을 사용해 부추긴 크잔트의 존재를 알고 나선 이야기가 완전 달라졌다.

이건 누군가의 계획적인 음모였다. 그것이 카슈일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물론 현재 드러난 사실 대로라면 전부 크잔트가 저지른 일이긴 했지만, 그가 원흉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모르게 급이 너무 낮아 보였다.

‘숨겨진 배후가 카슈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

카슈가 저지른 일이라고 보기 힘든 것이··· 그는 너무 겉으로 드러나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크잔트가 위기에 처했다고 해서 직접 나선 걸 보면, 음모자라고 보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있었다.

만일 이진운 자신이 음모를 꾸민 당사자였다면 크잔트가 끌려가더라도 절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뒤로 손을 써서 크잔트의 입을 막거나, 아니면 이번 사건을 축소시켜서 적당히 무마하는 게 더 수월했을 테니까.

‘그럼 누굴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은 가지 않았다. 주어진 단서도 너무 적었고, 관리국 내의 정치관계에 대해서도 크게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사기관에서 따로 조사는 하겠지만, 크잔트나 랜들 코우버의 입에서 배후의 정체가 드러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꾸밀 거였다면,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좀 더 알아봐야겠군.’

이진운의 입매가 차갑게 끌어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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