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22화
하지만 생각했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놈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피해자인 척 굴고 있었다.
“크으··· 네놈이야 말로 이게 무슨 짓이냐? 가만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기습을 하다니. 관리국 안에서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하아?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참으로 웃기는군.”
이진운의 차가운 시선이 크잔트의 두 눈동자를 그대로 직시했다. 그리곤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시치미를 뗀다 해도 난 다 알고 있다. 네놈이 저 녀석을 뒤에서 움직였다는 걸.”
“무슨 헛소리를! 어디서 증거도 없이 죄목을 날조하는 거냐?”
이진운에게 제압당한 상황인데도 놈은 아주 당당했다. 자신의 혐의를 입증할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랜들 코우버가 형님이라고 토설하긴 했지만··· 그게 정말 크잔트인지도 확실치 않은데다, 설혹 그가 맞다고 해도 그게 누명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운이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크잔트라고 했지? 그래 이름은 들어 봤었다. 가속 능력의 보유자라고?”
“그래. 내가 바로 그 크잔트다. 아무런 죄도 없는 날 이렇게 기습폭행하고 누명을 씌우려고 하다니! 이 문제에 대해 관리국에 문의해서 단단히 따지겠다.”
“참. 대단하군.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다니.”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상대의 태도에 이진운은 실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차가운 표정으로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광속의 크잔트]에게 정신계 능력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말이야. 그 능력을 지금까지 잘도 숨겨온 모양이지?”
“뭣!? 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진운이 내놓은 그 말에 눈에 띌 정도로 동요하는 크잔트. 이젠 태연한 척하던 가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진운은 놈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내뱉었다.
“아직도 시치미를 떼겠다는 거냐? 내 눈엔 다 보인다. 네놈이 남긴 어설픈 흔적이. 저 랜들 코우버란 녀석에게 충동질하면서 정신간섭을 했더군. 그리고 거기에서 묻어나온 영자패턴이 너와 완전히 똑같았고. 그걸 모를 거라 생각했나?”
“거짓말! 모두 거짓말이야!”
이젠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거의 발악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부정하고 있었다. 그게 정말인가 의아해하면서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이젠 크잔트의 혐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읽은 이진운이 비웃음 섞인 말을 이어나갔다.
“하긴 나름대로 흔적을 잘 숨기려고 노력은 했더군. 하지만 나 정도 되면 그런 잔재 흔적에서도 얼마든지 패턴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게 혐의에 대해 떳떳하다면 어디 검증이라도 받자.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말이야. 만일 사실이 밝혀진 뒤에 네놈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다면 내가 네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지. 그에 합당한 보상도 해주고.”
“······.”
그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크잔트의 입에서는 검증을 받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전전긍긍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군. 제대로 변명할 말도 없는 놈이, 억지를 썼다니.”
이진운은 즉시 손을 썼다. 검증을 받으란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이상, 놈에 대한 혐의는 반쯤 증명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피피피픽!
이진운의 오른손 검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였다. 마침 반쯤 제압된 거나 다름없었던 크잔트로서는 막을 수조차 없었다.
“크! 대체 이건 무슨 짓··· 헉!?”
자신의 전신 이곳저곳을 찔러오는 이진운의 손가락에 당황해하던 크잔트가 곧 깜짝 놀라 신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전신에 충만하게 맴돌던 영력이 마치 굳어진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다니!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란 말인가.
“일단은 내 일양지로 네놈의 이능을 금제해 뒀다. 그냥 놔두면 무슨 증거인멸을 할지 모르니 말이야. 일단은 네놈을 관리국의 수사기관에 넘겨야겠어.”
“이럴 순 없어! 날 구속 체포할 권한도 없는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너나 랜들 코우버는 거리에서 나와 내 제자를 습격한 범인이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이 무슨 말을 하겠다고.”
상대의 말을 비웃음으로 되받아쳐준 그때, 어떤 기척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이진운도 방심할 수 없는 그런 기척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고요한 기운은 실로 묵직하고도 막대했다.
제압해둔 크잔트와 코우버를 아리엔과 클레브에게 던져준 이진운은 상대를 응시했다.
“오, 이번엔 좀 재밌는 상대가 나와 주셨군. 이놈들 보단 제법 대단한 기세를 갖고 있는데?”
머리를 뒤로 길게 넘긴 금발의 사내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해왔다.
“그만하고 이쯤에서 그 둘을 돌려줬으면 좋겠군.”
그 말에 이진운은 실소를 짓고 말았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범죄자들을 돌려달라니, 이게 말이 될 법한 소리란 말인가.
“누구 마음대로?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면서 그런 소릴 해? 당신은 누구지?”
“그렇군. 일단 내 소개부터 하는 게 좋겠군.”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곧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카슈 올 브레이더다. 관리국 산하의 오버러 연합 부의원을 맡고 있지.”
이진운도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관리국 산하의 단체 중 하나인 오버러 연합. 오버러들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 세워진 단체라고 들었다. 그렇기에 매번 관리국 본국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 단체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단체의 부의원씩이나 되는 작자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결국 이런 거물도 이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건가?
‘역시··· 단순한 일이 아니었군.’
상대의 강함은 쉽게 예측하기 어려웠다. 상대가 무인이었다면 경지를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을 테지만, 이능은 이진운이라 해도 힘의 크기만으로 판멸할 수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S+랭크였지만,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카슈 올 브레이더는 어쩌면 U랭크에 도달했을지도 모를 강자.
이진운이라 해도 지금 현재로서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래서 일단은 대화로 풀어보기로 했다.
“그래, 이름은 들었었다. 카슈.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그 이름값으로 지금 날 협박하겠다는 건가? 이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
“그 녀석들을 통제 못한 건 내 잘못이다. 나중에 따로 사죄하고 대가를 치르지. 지금은 그냥 놔줬으면 좋겠군.”
일순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놈들을 놔달라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 알면서 고작 알량한 대가로 그걸 무마하겠다는 건가?
더 이상 좋게 대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진운은 차가운 안색으로 쏘아붙였다.
“듣자듣자 하니 정말 어이가 없어 죽겠군.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를 한 것도 모자라 현장에서 잡힌 범죄자까지 놔달라고? 그것만으로도 너 또한 훌륭한 용의자다. 이 사태를 일부러 방조했거나 가담 했을 가능성도 있지.”
“뭐, 보기에 따라선 그런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군.”
이진운이 너도 한패로 몰아갈 수 있다고 협박했지만, 놈은 오히려 대범하게 그럴 수 있다며 받아쳤다. 어떤 혐의가 생긴다 해도 그 정도 혐의로 자신이 어찌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에만 나올 수 있는 태도였다.
“그럼 이왕 오해를 산 김에 더 오해를 사도 괜찮겠군. 자, 그럼 그 녀석들을 좀 놔주게. 좋게 놔준다면 여기서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없을 걸세.”
손가락을 풀면서 아예 협박조로 나오는 카슈. 랜들 코우버와 크잔트를 내놓지 않는다면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태도였다.
이진운도 더 이상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이런 상대에겐 오히려 힘으로 박살내 줘야 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아 그래? 그럼 그 유혈 사태가 너한테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살기 띤 미소를 지으며 한발 앞으로 나서는 이진운. 그와 함께 기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제 그는 초절정을 넘어 절대지경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만유합원신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단을 함께 사용하면 그에 준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도 가능했다.
상대가 S+랭크든 혹은 U랭크라 하더라도 크게 꿀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자 카슈의 안색도 조금은 변했다. 처음 나설 때만 하더라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젠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약간은 경계하는 표정을 짓는 그에게, 이진운이 조소를 던졌다.
“왜? 지금은 조금 전 같이 만만해 보이지 않나 보지?”
“······.”
그 도발에 자존심이 상한 걸까? 카슈의 전신으로부터 일어난 칠흑빛의 기운이 기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고중력의 힘이 이능에 의해 응집되면서 나타나는 그래비티 포스였다.
카슈의 이명은 [중력의 지배자]. 말 그대로 중력을 다루는 고유이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구구구!
주변 일대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슈 정도의 능력자가 힘을 끌어올리자, 고중력의 영향으로 이 근방의 도시들도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싸우기도 전에 도시가 붕괴될지도 몰랐다. 이진운도 그것을 깨닫고는 결단을 내렸다.
‘제압하려면 확실히 해야겠군. 잘못하면 도시가 날아가는 참사가 벌어지겠어.’
현천신공을 중심으로 운용되는 진기가 폭발적인 형태로 변화했다. 그것은 역기충혈대법에 따라 변화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가고 있었다.
예전에라면 이것만으로도 큰 무리가 가거나 진원지기가 상할 우려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만유합원신기로 막대한 외기를 받아들여 충당하면서, 몸의 과부하는 태을단목신공을 운용해 실시간으로 회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잘만 제어하면 역기충혈대법의 운용 시간을 거의 무한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휘오오오!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는 이진운으로부터 첨예한 기세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베일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중력이라고? 그런 건 단숨에 베어주지.’
결단을 내림과 동시에 그것을 곧장 출수로 연결시키려던 그 순간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힘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것은 저 멀리서 날아온 한 줄기 섬광이었다.
콰앙!
이진운과 카슈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지금 날아온 공격은 그렇게 강력하진 않았지만, 그들 두 사람의 기세가 부딪치는 결의 틈을 정확히 파고들어와 있었다.
그 말은··· 상대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증거다.
이진운과 카슈가 공격이 날아온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이진운도 익히 알고 있던 사내였다.
“어이어이, 이런 공공장소에선 싸움은 좀 삼가해 달라고. 이건 민폐잖아.”
“연정운······?”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내뱉은 이진운의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처··· 천외오천!?”
“마탄의 사수다!”
여기저기서 소란이 벌어졌다. 그만큼 천외오천의 명성이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이진운은 연정운을 향해 입을 열어 물었다. 그가 찾아와 싸움에 끼어든 이유 때문이었다.
“너, 여길 어떻게 찾아 온 거야?”
“찾아왔다기보다는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지. 이런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나뿐만 아니라, 거물이란 거물들은 다 눈치 채고 있었지.”
그 말을 듣고서야 이진운은 그 즉시 의식적으로 감각을 돋웠다. 그러자 주변에서 이곳을 살피고 있는 존재들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적게는 수 킬로미터. 많게는 수십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둘이 기세충돌을 일으킬 때부터였던가, 아예 랜들 코우버가 날뛸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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