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21화
그녀는 자신이 쥔 검 끝 위로 솟구친 검기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눈부신 것 같으면서도 적막한 빛! 그 영롱한 광채는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벨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리엔은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읊조렸다.
“이게 바로 깨달음이란 거군요.”
“그래, 깨달음이란 불현듯 찾아오지. 바로 지금처럼. 위기의 순간에도, 그리고 밥 먹다가도 찾아오는 게 바로 돈오의 순간이란 거다. 그래서 우린 언제나 노력하면서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때마침 찾아온 깨달음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말이야.”
“준비된 마음······.”
“요즘 들어 수련에 임하는 네 마음가짐이 조금 해이해졌다는 걸 나도 안다.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고.”
자신의 속내를 스승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아리엔의 얼굴이 일순 벌겋게 달아올랐다. 엘레나의 재능을 질시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였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품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경쟁심을 품는 게 나쁜 건 아니야. 어떨 땐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 허나 거기에 매몰되면 언젠가 좌초되고 만다. 사람들이 타고나는 재능의 크기는 다 천차만별이고, 절대 평등하지가 않으니까.”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엔. 이번 일로 깨달은 바가 있어서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표정도 그만큼 진지해 보였다.
“그러니 재능의 차이를 대신할 만큼 더 열정을 갖고 노력해라. 물론 하루하루 쌓은 노력의 성과는 바로 드러나는 게 아니야. 조금씩 조금씩 쌓이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방금 겪은 깨달음처럼 확실한 결과물로 돌아오지. 하지만 그것도 노력이라는 과정이 없었다면 소용없었을 거다. 지금처럼 깨달음이 찾아와도 그걸 붙잡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랬다. 당장 성과가 없다고 해서 모든 노력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다. 그것들이 밑바탕에 기반이 되어야 후에 깨달음이란 계기가 주어져도 그것을 체화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항상 자기 자신과 싸우며 노력해라. 성장하는 속도는 재능에 따라 좀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 노력은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너를 강하게 해 줄 거라고 내 장담하마.”
“예, 알겠어요. 스승님.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
결심에 찬 그 모습에 이진운은 이번엔 옆에 있던 클레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클레브 너도 마찬가지고. 아니, 그 부분에 있어선 오히려 네가 더 깊게 깨닫고 있을 테지.”
“예, 잘 알고 있지요.”
클레브는 이진운의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재능이 없다고 오래 전부터 이야기를 들어온 만큼, 재능에 의한 좌절과 아픔을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겪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 이야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저편에서 거센 화염기둥이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그 지점은 바로 다름 아닌, 랜들 코우버가 처박혔던 바로 그 건물 벽쪽이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솟구치는 시뻘건 화염 기둥! 그 광경은 마치 화산에서 마그마가 분출되는 듯했다.
그리고 화염 기둥의 중심에 서 있는 랜들 코우버가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일어섰다.
“그래, 잘도 해줬구나. 감히 날 이 꼴로 만들다니! 쓰레기처럼 구석에 처박았겠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힘입은 건지, 화염의 기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이젠 건물 자체마저 녹아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난리가 벌어지면서 건물이나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대피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진운을 때려눕히러 왔다가, 고작 저런 반푼이에게 당하다니··· 오늘 정말 체면 구기는군. 이젠 더 이상 참지 않겠다. 확실하게 박살내주지. 네년도, 그리고 그년의 스승이라는 네놈도 말이야!”
대체 어느 정도까지 영능을 끌어올린 것일까? 어느새 그가 처박혔던 건물은 완전히 소각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소각화의 진면목. 단순히 녹이는 수준이 아니라, 물질 자체를 소각해 없애버리는 그런 힘이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그 광경을 보고도 태연했다. 아니, 놈의 망발이 거슬린 듯, 살짝 눈썹을 찌푸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자니 정말 못 들어주겠군.”
랜들 코우버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아리엔이 나서려 했지만, 이진운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대신 나섰다.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 기회에 본보기 삼아서 아주 박살을 내줘야겠군.”
그가 앞으로 나서면서 던진 그 말에, 랜들 코우버는 일순 어이가 없어졌다. 이젠 화가 치밀다 못해, 머릿속까지 들끓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뭐? 누굴 박살내? 진짜 기가 막히는군. 조금 방심하다가 저년에게 한 대 맞은 거 가지고 날 우습게 보는 거냐?”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네놈 따위가 내 상대가 될 거라 생각하나? 내 제자에게도 얻어터지는 너 따위가?”
“······.”
“이쯤 됐으면 주제 파악을 좀 해라. 네놈 따윈 사실 내 발가락에도 못 미친다.”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처벌이고 뭐고 좋아! 네놈만큼은 내손으로 죽여 버리겠어!”
거듭된 도발에 이성이 마비된 것일까? 이젠 앞뒤 가리지 않고 이진운을 죽이겠다고 선언한 랜들 코우버.
놈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자신이 다루는 화염을 뒤로 분출시켜 얻은 막대한 추진력으로 단숨에 쇄도해온 것이다.
“훗!”
비웃음을 지은 이진운의 오른손 검지가 놈을 가리켰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무게가 작열해 놈을 위에서 아래로 짓눌러버렸다.
쿠웅!
“컥!”
쇄도하던 랜들 코우버가 갑자기 멈춰서면서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것은 마치 바닥에 힘껏 패대기쳐진 개구리 같은 모습이었다.
이진운은 그런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버러지는 버러지답게 기어라. 볼썽사납다.”
“끄으, 이게··· 무슨!? 중력 제어인가? 아니면 대기 조종!?”
랜들 코우버는 애써 몸을 일으키면서 혼란스럽다는 듯 외쳤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이진운은 단지 자신의 기세를 심검의 이치를 통해 작용시켜 놈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말해줘도 알아듣지도 못할 놈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러니 자, 바닥에 엎드려라.”
쿵!
“크헉!”
다시 한 번 더 세게 억눌러오는 무형의 기세! 이제는 지표면이 둥글게 내려앉으면서 랜들 코우버의 몸까지 땅 속으로 파묻힐 지경에 이르렀다.
“내 앞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날 찾아 왔는지 모르겠군. 소문의 반만 믿었어도, 너 따윈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잘 알 텐데 말이야.”
이진운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움직이자, 랜들 코우버의 자세가 저절로 바뀌었다. 바닥 깊이 머리를 처박고 이진운 앞에 비참하게 조아리는 굴종의 자세였다.
“이제야 조금 볼만해졌군. 그렇게 공손했어야지.”
고개를 끄덕거린 그가 랜들 코우버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어디 물어보기나 하자. 무슨 생각으로 날 찾아온 거냐? 정말로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혀··· 형님이 가보라고 했다. 끄으··· 네놈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라고 하셨을 뿐이야.”
견디다 못한 랜들 코우버가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국 누군가의 사주로 이 일을 벌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비라니. 내가 공을 세워 명성을 얻은 걸 질시할 순 있지만, 이건 좀 너무 지나쳤어.”
비로소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 이진운은 더없이 비참한 모습이 된 랜들 코우버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좀 전에 보인 분노 따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두려움과 공포에 잔뜩 젖어 자비를 구하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널 이렇게 이용한 걸 보면, 그 형이란 놈도 친형제는 아닌 모양이군.”
그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남다른 존재감의 주인이 보였다.
“안 그래? 이 더러운 협잡꾼 녀석아.”
그 말에 그 자의 얼굴에 흠칫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서지 않겠다면··· 직접 끌어내주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진운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흐려졌다. 바로 이형환위의 한수였다.
어느새 상대의 코앞에 도달한 이진운. 그가 내뻗은 발이 용서 없이 상대의 복부에 꽂혔다. 점창의 각법 절기 중 하나인 용비등천각이었다.
터엉!
“큭!”
무시무시한 충격에 놈의 신형이 공중으로 부웅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일부러 놈을 공중으로 띄운 이진운은 그 즉시 응조칠식경공(鷹鳥七式輕功)의 비응등천(飛鷹登天)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곧바로 연격을 퍼부었다. 점창의 권장술인 회풍불류권(廻風拂柳拳)이었다.
그의 팔이 마치 유연한 채찍처럼 휘어지면서 상대의 전신을 유린하고 지나갔다. 무시무시한 경풍과 장력 앞에, 노출된 상대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콰콰콰쾅!
“크어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당하는 놈을 향해 이진운의 마지막 일격이 작열했다.
“그럼 이제 너도 땅을 기어라!”
그의 오른 다리가 마치 지면 위를 밟듯 휘둘러진 순간, 나선으로 휘도는 경력과 함께 놈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비천십이표(飛天十二飄)의 용무선회경(龍舞旋回勁)이었다.
콰아앙!
정체불명의 상대는 그대로 지면 위에 깊이 처박혔다. 단단한 지표면을 뚫고 들어갈 정도니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었을 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이진운은 가볍게 착지한 뒤 땅속에 깊이 박힌 녀석을 허공섭물로 끄집어내었다. 타격이 제법 컸던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진운은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생각보다 더 허약하군. 이런 놈이 그런 수작질을 부렸다니.”
그나마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놈은 진작 죽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강기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이제 뒤에서 이런 더러운 협잡질을 한 놈의 정체를 알아보실까?”
그는 먼저 놈의 얼굴을 확인했다. 모두가 볼 수 있게 얼굴을 들어올리자, 사람들의 입에서 신음성과 경악이 터져 나왔다. 익히 아는 인물이어서였다.
“마··· 말도 안 돼!”
“저 사람은 [크잔트]잖아.”
놈은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보통 인물도 아니고, 무려 S-랭크의 강자로 알려진 크잔트 베이모어.
그런 놈이 하필이면 이진운의 손에 걸려든 것이다.
“세상에··· 정말이었군. 저런 자가 박살날 정도면··· 이진운 저 사람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란 말인데.”
“믿기지가 않아. S-랭크의 강자가 한순간에 박살나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관리국 전체가 난리 나겠군.”
사람들 덕분에 상대의 정체를 손쉽게 알아낸 이진운이 크잔트의 뺨을 세계 두들겼다.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놈에게 이진운은 멱살을 잡은 채로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꾸민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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