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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70화 (71/448)

3권-20화

쿠르르릉!

노성을 터뜨린 랜들 코우버의 전신으로부터 소각의 힘이 들끓어 오르며 주변에 다수의 화염의 고리들을 형성했다.

가냘파 보이는 아리엔 따윈 순식간에 태워 없앨 만큼 맹렬한 화염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진기를 가다듬으며 냉정하게 대응했다.

예전이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자였다. 랭크는 B-였지만, 그의 소각화는 공격력 면에서만큼은 거의 A랭크에 준한다는 위력적인 이능.

하지만 그것도 정작 상대에게 맞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이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오는 화염의 고리들. 아리엔은 그 즉시 보법을 밟아가며 움직였다. 그녀의 신형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다수의 잔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공격하던 랜들 코우버의 두 눈이 일순 커졌다. 하나였던 표적이 순식간에 다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불의 고리들이 순식간에 다수의 잔상들을 꿰뚫고 지나갔지만, 그중에서 실체는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 같잖은 잔재주를! 그럼 다 태워주마!”

어떤 게 실체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짜증에 찬 표정으로 더욱 불의 고리를 형성하였다. 이젠 수십 개의 화염 고리들이 주변에서 춤추고 있었다.

“으읏, 뜨거워!”

“미친! 이런 공공장소에서 이능을 이 정도까지 발현하다니! 저 놈이 제정신인가?”

“어서 신고해!”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랜들 코우버의 소각화는 우주의 온갖 환경에서도 버티는 전함의 외장갑도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 화염이 일반 거리에서 발동되었으니, 그 열기에 위협을 느낄 만도 했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이능을 발동시켜 소각화의 잔재 열기를 차단시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리엔과 랜들 코우버의 전투를 흥미진진하다는 듯 지켜보았다.

쾅! 콰아앙!

아리엔을 맞추지 못한 화염의 고리들이 여기저기 날아가 터져나갔다. 주변의 기물들이 파손되는 건 물론 주변의 건물들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격렬한 공격을 아리엔은 모두 회피해냈다.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내딛는 그녀의 보보가 그것을 가능케 해주고 있었다.

‘조금 더 빨리, 피하는 간격은 최소화해서!’

점점 빠르고 능숙해졌다. 오베른 행성에서 실전을 겪은 이후로 그녀가 이진운에게 배운 무공들은 이제 거의 완벽에 가깝게 체화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위기의 연속이라서 체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전과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예전엔 엄두도 낼 수 없던 강자를 상대로 지금 자신은 분전하고 있었다.

휘오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순간, 검 끝에서 일어난 바람이 사방으로 맹렬하게 불어 닥친다. 그것은 강력한 경풍이 되어 화염의 고리들을 하나하나 빗겨내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랜들 코우버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진운을 손봐서 자신의 입지를 더 높일 생각이었는데, 이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웰라우드 가의 반푼이에게 이렇게 고생할 줄이야.

일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쥐새끼처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구나!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콰우우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런 장소에서 멋대로 싸움을 건 랜들 코우버였지만, 그래도 이런 공공장소에서는 어느 정도 힘을 제약해둘 정도의 분별력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을 억누르던 족쇄를 풀어버렸다.

“뭐야!? 이 일대를 다 녹여버릴 셈이야!?”

“어서 관리국에 연락해! 이놈 미쳤어!”

길바닥이 순식간에 용암처럼 녹아내렸다. 주변의 유리창들은 이미 액체처럼 융해되어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이 주변이 완전히 녹아버려 인공적인 용암지대가 될 것이다.

“스승님··· 제가 지금이라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클레브가 이진운에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만큼 아리엔이 처한 상황이 위험해 보여서였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조금 더 지켜본다.”

“예? 더 지켜보신다고요?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클레브. 이진운은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까지 위험한 건 아니야. 그리고 지금 아리엔은 정형화 된 틀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어. 그런 중요한 순간에 내가 끼어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해.”

“뭔가를 깨달으려는 거군요.”

그제야 뭔가 알겠다는 듯 납득하는 클레브. 이진운은 염려 말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정 위험해지만 내가 나설 테니까.”

* * *

아리엔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사방팔방 끓어오르는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심지어 발밑이 녹아드는 느낌은 더욱 최악이었다. 배틀 슈트의 액티브 배리어 기능 덕분에 용암처럼 녹아버린 길바닥 위에 서 있어도 아직 멀쩡했지만, 이래선 보법을 밟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마 이런 상황을 놈이 일부러 의도한 것 같았다.

“자,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지 볼까?”

화아악!

불길이 사방을 옥죄어 왔다. 도저히 피할 공간을 남겨주지 않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전면의 불길! 그것은 지금까지완 비교도 안 되는 위력으로 노도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치익! 치이익!

배틀 슈트의 기능이 한계에 달했다. 이젠 소각화의 열기를 다 막을 수가 없어 조금씩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기능상 버틸 수 있는 시간은 4-5초 남짓. 그 시간을 넘기면 한 줌의 재가 될 게 분명했다.

그것을 깨달은 아리엔의 두 눈동자에 결의가 떠올랐다.

단순히 피하는 것만으론 어려운 상황! 이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순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가겠어!’

아리엔은 전진을 선택했다.

쾅!

강하게 내딛는 일보! 그 반동에 힘입은 그녀의 신형이 전면을 향해 한 줄기 화살처럼 던져졌다.

그것은 빛줄기 같았다. 날카롭게 세운 검극을 앞세운 그녀의 일검!

지금까지 피하고 공격의 방향만 틀었던 소극적인 방어와는 전혀 다른 기세였다.

그렇지만 랜들 코우버는 오히려 입매를 틀어 올렸다. 오히려 더욱 화력을 더해 불길을 뿜어내었다. 이참에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우우우우!

밀려오는 열기! 그것은 화산의 그것을 아득히 능가하고 있었다. 어쩌면 중형 전함마저 일격에 관통할 수 있는 그런 위력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 나한테 필요한 건 필사적인 각오였어!’

최근 그녀는 의욕을 잃고 있었다. 이진운에게 무공을 배우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세상일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다고 여겼던 그때, 엘레나라는 아이가 이진운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악하고 말았다. 자신을 능가하는 그 아이의 습득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그리고 그것을 금세 체화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단순히 이해한 정도가 아니라, 가르쳐준 무공을 마치 10년 이상 수련한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숙련도를 보여주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아리엔은 깨달았다. 자신의 재능은 생각보다 대단한 게 아니라고.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었고, 자신을 능가하는 재능은 이 드넓은 우주에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클레브가 느꼈던 절망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능의 벽이란 건 이렇듯 냉혹하고 무서웠다.

그때부터 의욕이 감퇴하고 기이한 권태감이 스며들었다. 수련을 거르진 않았지만, 예전과 같은 열정은 사라져서 거의 형식적인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해온 노력은 결코 쓸데없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 조금씩 강해졌고, 그것은 재능과 상관없이 계속 누적되어 왔다.

랜들 코우버를 상대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달랐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었다.

단지 부족했던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과 강해지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낼 각오였던 것이다.

‘아아···!’

그제야 시야가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아니 들어도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랬다. 생각이 너무 좁았다. 너무 편협하고 협소한 사고방식이, 그 이상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 끝에 실린 힘이 더욱 세차게 피어올랐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진기의 흐름의 율동이 생겨나고 있었다. 체내에 흐름은 도도하게 이어지고, 그것은 검과 자신을 하나로 이으면서 전에 없던 완벽한 순환 체계로 만들어냈다.

그 흐름 속에 모든 것이 녹아들었다. 지금까지 이진운에게 배운 가르침들은 물론, 자신이 가문에서 배웠던 웰라우드 가의 비전까지 하나가 되어 머릿속에 정립되었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

지금까지 휘둘러온 검식의 방식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베고 휘둘러야 할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다.

달려 나가던 그녀의 속도는 더욱 가속되었다. 주변의 풍경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오로지 혼자만 가속화된 세계! 그 속에서 그녀는 드디어 한계를 초월하였다.

우우웅!

검신이 한차례 우렁차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부로부터 용솟음치는 진기와 함께 곧 검첨으로부터 새파란 광망을 뻗어내었다.

그것은 분명한 절정고수의 상징, 검기(劍氣)였다.

검기가 뻗는 순간, 모든 것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것은 소각화의 불길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발현되는 것만으로도 닿는 것을 베어내는 첨예한 예기! 절정의 검기가 실린 검예의 극치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삼절검(三絶劍) 제 2식. 낙인참(落刃斬)

연식(連式). 참공일섬(斬空一閃)

촤아악!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지는 한 줄기 궤적! 그것은 선명한 형태로 공간 위에 새겨졌다. 그리고 비단폭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 일대를 사를 것 같은 화염의 해일 정 중앙이 마치 모세의 기적마냥 갈라져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로 랜들 코우버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펼친 회심의 일격이 아리엔의 참격에 갈라지는 광경에 경악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리엔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 가속화 된 속도로 다가가, 놈의 복부를 정확히 걷어차 버렸다.

콰앙!

“커억!

랜들 코우버의 신형이 저 멀리까지 기세 좋게 날아가 건물 벽에 처박혔다. 어찌나 세게 찼던지 건물 벽마저 파고들어가 처박혀 있었다.

“세상에!”

“···이겼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D랭크였던 웰라우드 가의 그 소녀가?”

“간만의 기삿거리군. 이건 특종이야!”

사방에서 놀란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다들 아리엔의 승리에 경악해 하고 있었다. B랭크와 D랭크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까마득한 격차가 존재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사이에 그런 격차를 무시하는 결과를 내놨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아리엔이 이진운을 돌아보았다.

“스승님.”

“그래, 잘 했다. 그리고 축하한다. 오늘 부로 절정 고수가 된 것을.”

이진운이 건넨 그 말에, 아리엔은 그제야 자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겪었던 지금의 경험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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