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19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함대를 꾸리는 데에 드는 비용 중 대부분은 리스티가 부담하기로 되어 있다. 아직 기간트가 납품되기 전이라서 공동 연구자인 이진운에게는 땡전 한 푼 돌아올 게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납품만 시작된다면 막대한 돈이 쏟아져 들어올 테지만, 당장 수중에 없는 돈은 아무 의미도 없을 뿐이다.
게다가 리스티가 보유한 기업들은 전함을 제작할 수 있는 전문 인프라까지 갖춘 곳들이었다. 그러니 함대의 생산은 리스티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고양이한테 생선이라도 맡긴 기분이지만··· 뭐, 어쩔 수 없나.’
그 문제를 두고 잠시 떨떠름해하던 이진운은 이번엔 라이선스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그래도 관리국이 생각보다 너무 쉽게 라이선스를 내줬군. 뭔가 조건을 더 붙여서 허락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러자 이진운의 중얼거림을 들은 리스티가 픽 웃으며 관리국의 상식선에 맞춰서 이야기해주었다.
“에이, 그런 게 아니죠. 관리국 입장에서는 상당한 전력을 보유한 함대 하나가 돈 한 푼 안들이고 생기는 거잖아요. 허락해줘도 자기들은 별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에서겠죠.”
듣고 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흐음, 그래? 그렇다면 내 지휘 미숙으로 무슨 참사라도 벌어지게 되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함대의 병력은 관리국과 군부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말이야. 독립함대를 제안한 내가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사실 나 같은 무명인 신입에게 맡기는 건 좀 비상식적인 일 아닌가?”
“그러니까 조만간 완성될 모함의 함장만큼은 관리국에서 직접 엄선한 베테랑으로 임명하겠다고 명시했잖아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억제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겠죠.”
“베테랑이라··· 과연 누가 우리 함대에 올지 모르겠군. 베테랑 쯤 되는 함장이 나 같은 무명 신인 밑으로 들어오기나 하겠어?”
실제 베테랑이라 불릴만한 함장들은 대부분 중요한 요직이나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빼내서 이름도 모르는 새 함대의 함장으로 밀어 넣는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리스티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말했다.
“에이, 무명은 아니죠. 요즘 아저씨의 명성이 꽤 자자하잖아요.”
“그래봐야 잠깐 유행처럼 반짝 하고 사라질 명성이지.”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아저씨 진짜 유명인사라니까요. 평범하게 활약했다면 아저씨 말처럼 잠깐 떠들고 말았겠죠. 이번엔 아니에요.”
이진운은 별 거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리스티는 직접 홀로그램 창을 열어 언론사의 기사까지 열어 보여주었다.
그의 이름과 활약이 대서특필 된 기사였다. 오베른 행성에 나타난 새로운 인베이더의 유닛 세계수와, 그것을 무너뜨린 첫 실전 투입된 교육생의 믿기지 않는 활약.
언론사에서 대체 어떻게 정보를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사에는 오베른 행성에서 있었던 전투를 제법 상세하게 분석된 형태로 기술하고 있었다.
한참 읽어 내려가던 이진운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기사 내용은 꽤 논리적이었지만, 뒤에 가선 자신에 대한 칭찬 일색으로 가득했다. 보는 자신이 낯이 다 뜨거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런 기사가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잠깐 검색해 봤는데도,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확인이 끝난 뒤, 리스티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좀 아셨죠?”
“크흠··· 그래, 아주 잘 알았다.”
이진운은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놈의 세계수 때문이군. 연합에서 그걸 대단히 큰 위협 요소로 여기고 제법 떠들어댔어. 그 바람에 오베른 행성에서 공을 세운 나까지 부각된 거고. 아니··· 오히려 세계수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내 활약상을 더 띄워준 걸지도 모르겠어.’
유명세를 타게 됐다는 사실이 그에게 과히 나쁠 건 없었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점창파를 세우는 것도 그만큼 수월해질 테니까.
하지만 그 대신 앞으로 맨얼굴로 바깥에 나돌아 다닐 생각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유명세의 부작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들에게 큰 칭송을 받게 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만큼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게 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유명세의 부작용은 금세 나타났다.
“네가 그 이진운이란 녀석이냐?”
제자들을 데리고 훈련을 가던 중, 이진운은 한 사내와 마주쳤다. 분명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보자마자 이진운의 이름을 부르며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이진운은 그자를 돌아보며 용무를 물었다.
“그래, 내가 이진운이다. 그런 넌 또 뭐지?”
“아하, 내가 잘 찾아왔군. 34여단 소속의 B-급 오버러 [랜들 코우버]다.”
“아, 그래. 랜들 코우버. 내게 무슨 용무지? 난 네 녀석을 오늘 처음 보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네가 그 말도 안 되는 활약상의 주인공이라지?”
이진운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과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소문을 듣고 시비를 걸로 찾아온 놈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상대의 말을 되받는 그의 말투도 자연 차가워졌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어디서 그런 날조한 이야기들을 퍼뜨린 거지? 이름도 모를 외진 촌구석 행성에서 막 소환된 주제에 A랭크를 넘는 인베이더를 쓰러뜨렸다고? 거짓부렁도 어느 정도여야지. 무슨 뒷배로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거냐?”
“그래, 네 말대로 이제 막 지구에서 소환된 몸이다. 그럼 네놈에게도 생각이란 게 좀 있다면 좀 해 봐라. 이제 막 낮선 곳에 온 내가 그런 뒷배가 있을 리가 없잖냐?”
이진운이 논리적으로 받아치자, 랜들 코우버가 할 말이 궁색해져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놈은 금세 본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럼 그 소문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거야 관리국에서 냈겠지. 오베른 행성에서 싸운 전투 데이터는 그곳에서 갖고 있으니까. 그 뒤에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에 대해선 내가 아는 바 없다.”
“아, 그래? 그럼 그 소문이 많이 과대 포장됐다는 사실은 네놈도 인정한다는 말이겠군.”
어떻게든 이진운의 활약을 깔아뭉개고 싶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말투. 이진운은 이젠 상대하는 것조차 같잖아서, 노골적으로 대꾸해줬다.
“글쎄다. 그건 너 따위가 입에 담을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뭐야?”
“그렇게 시비를 걸고 싶다면 차라리 정식으로 대결을 신청해라. 그러면 제대로 박살내 주지.”
“이런 건방진 놈이!”
이진운이 던진 도발에 랜들 코우버가 발끈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애당초 시비를 걸어 박살내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반대가 된 것이다.
쿠우우!
끌어올린 영력이 들끓듯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염이란 형태로 일어나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발화가 아니다. 물리적인 발화의 개념에서 벗어난, 소각의 형태가 화염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어디 죽지 않을 만큼 태워주지!”
끌어올린 힘으로 막 이진운을 공격하려던 그때, 누군가가 앞으로 나서 가로막았다. 바로 아리엔이었다.
“그만두세요!”
“넌 또 뭐냐? 날 막기라도 하려고?”
“오버러끼리 싸움은 법적으로 금지된 걸 모르시나요? 차라리 따로 날을 잡아서 정식으로 대결을 신청하세요. 여기서 싸우면 안 됩니다.”
아리엔이 정론대로 싸움을 저지하자, 이번에는 랜들 코우버가 비웃음을 던졌다, 그제야 아리엔이 누군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하, 소문은 들었다. 저 신입을 따라다니는 웰라우드 가의 반푼이었나? 하긴 5대 가문이란 명성도 다 옛말이었지. 고작 D급 언저리에서 놀던 계집애가 무슨 생각으로 나선 거냐? 이젠 다 저물어버린 웰라우드 가문의 이름으로 날 막아보기라도 하려고?”
그 말에 아리안의 몸이 분노로 가늘게 떨렸다. 이미 예전의 명성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전락할 만큼 전락한 가문이었지만, 이런 작자의 입에서 함부로 폄하되는 게 화가 나서였다.
마음 같아선 본때를 보여주고 싶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이런 곳에선 절대 싸워선 안 된다. 오버러가 상부의 허락 없이 함부로 타인과 싸우면 큰 처벌이 뒤따르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도발은 그만 하시죠. 당신도 괜히 싸움을 일으켜서 처벌을 받는 건 원치 않을 텐데요. 저도 그렇지만, 스승님은 당신 같은 사람과 함부로 싸우실 분이 아닙니다. 싸우고 싶다면 다음에 정식으로 요청을 하시길.”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서던 그때··· 아리엔의 등 뒤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차가운 오한이 등골을 내달렸다.
“아, 그래? 그럼 너부터 치우고 싸우면 되겠군.”
“!?”
화악!
뒤돌아볼 새도 없었다. 아리엔은 즉시 반응했다.
뒤에서 날아드는 뜨거운 열기의 힘! 그것은 그녀의 상체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즉시 일보 물러서며 그 공격을 피해냈다. 분광착영의 일보섬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붉은 화선을 확인한 아리엔이 화난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죠? 싸움을 건 것도 모자라 기습이라니요! 처벌을 받겠다는 건가요?”
“처벌 따윈 상관없어. 어차피 저놈만 박살내면 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이진운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랜들 코우버. 도발해서 먹히질 않으니, 아주 작정하고 덤비겠다는 말이었다.
이진운도 그만큼 심기 불편하게 변했다.
“정말이지··· 하루아침에 유명해지고 나니까 별 같잖은 것들이 다 덤비는군.”
짜증스럽다는 듯 중얼거린 그가 아리엔을 불렀다.
“아리엔, 네가 상대해라.”
“제가··· 말인가요?”
“그래. 오늘의 실전 대련은 저놈이다. 나 대신 싸워 줄 훌륭한 교보재지.”
“교보재라니······.”
상대를 일개 교보재 취급하는 이진운의 말에, 아리엔은 좀 황당했지만 스승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긴 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다. 아리엔은 즉시 검을 빼들었다.
그녀의 검이 자신을 향해 겨눠지자, 랜들 코우버도 분통을 터뜨렸다.
“뭐라고? 이런 미친 것이 날 무슨 교보재 취급을 해?”
자신이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괜히 말도 안 되는 명성으로 주목받는 신인을 박살내 진창으로 처박으려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본인도 아니고, 고작 그놈의 제자로 들어간 웰라우드 가의 반푼이가 내 상대라고?
그렇지만 이진운은 화가 치밀어 머리 꼭지가 돌아버릴 것 같은 랜들 코우버를 향해 이죽거렸다.
“날 쳐다보지 마라. 네 상대는 바로 앞에 있을 텐데? 계속 날 신경 쓰다간 내 제자에게 칼침 호되게 맞을 거다.”
“이 자식이!”
도발처럼 던져진 그 말에 이성을 잃은 랜들 코우버가 영능을 일으켰다. 그의 손 위로 마치 거대한 고리와 같은 화염이 일어나더니, 그것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막 이진운에게 던지려던 순간, 한 줄기 날카로운 궤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아리엔의 검격이었다.
“으, 큭!”
콧잔등을 살짝 스쳐지나가는 쾌속한 검격. 랜들 코우버는 위기감을 느끼고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조금만 회피하는 게 늦었어도 하마터면 얼굴을 제대로 베일 뻔했다. 일순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런 랜들 코우버를 향해 아리엔이 검을 겨눈 채로 선언했다.
“당신의 지금 상대는 접니다. 오시죠.”
“감히! 네년 따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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