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62화 (63/448)

3권-12화

레이즈 워커가 완전히 소멸된 뒤 이진운은 돌아섰다. 그리곤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챙길 건 서둘러 챙겨.”

교육생들은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이브가 다운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뒷마무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 장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방금 전 이진운이 보여준,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가르는 듯한 일검을! 그것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각인 될 것이다.

이진운은 곧바로 아리엔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가 안고 있는 엘레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리엔, 엘레나는 지금 어떻지?”

그 말에 아리엔은 즉시 엘레나의 모듈 밴더를 조작해 열었다. 홀로그램 창이 떠오르면서 엘레나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일단 목숨이 위험한 것 같진 않는데, 자세히는 잘 모르겠어요.”

오버러들이 기본으로 착용하고 있는 모듈 밴더는 배틀 슈트와 서로 연동되고 있었다. 그래서 착용자의 건강이나, 부상 상태를 모듈 밴더를 통해 언제나 확인할 수 있는데, 엘레나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목숨이 위험할 만큼 치명적인 부분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음··· 그렇다면 서두르는 게 좋겠군.”

이진운도 이능을 무리하게 사용하다 입은 부상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전문가에게 데려가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중요한 순간에 레이즈 워커를 붙들어서 시간을 벌어준 오르큐스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전문가의 손에 맡기는 게 좋을 터였다.

헌데 그때, 기간트에서 내린 리스티가 쪼르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아저씨? 갑자기 무지 강해졌잖아요.”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이진운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전생에 대한 비밀을 빼놓고 이야기하자니, 뭐라 설명하기 어려워서였다. 그는 대충 둘러대었다.

“그냥···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군. 저 아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

“이거 참 흥미롭네요. 무슨 특이한 검을 구현하더니, 갑자기 강해졌다라··· 그것 참 연구대상이에요.”

이진운이 뭔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기색을 알아챈 리스티도 더 이상 캐묻진 않았다. 나름 흥미는 있었지만, 굳이 남의 비밀까지 캐물어가며 알아낼 생각은 없었다.

이번엔 이진운이 물었다.

“그런데 채취한다던 건 어떻게 됐지?”

리스티는 하이브의 코어와 세계수의 잔해에서 채취한 조직을 담은 캡슐을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시료 수집은 벌써 끝냈죠. 필요한 만큼 적당량 채취했으니 돌아가도 될 거에요. 나머지는 오베른 주둔군이 알아서 해 주겠죠.”

시료의 수집은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이것을 연구해서 놈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고, 어떤 기술이 접목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하이브 공략전에선 너무도 특이점이 많았다. 하이브 규모와 맞지 않는 진멸급 레이즈 워커의 등장과, 하이브의 코어에서 자라난 거대한 괴목 세계수.

아마 이번 전쟁에서 벌어진 소식이 연합의 상층부에 전해진다면, 그야말로 발칵 뒤집힐 것이다. 인베이더의 전술과 유닛에 이렇게 대폭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도 거의 수십 년 만이었다.

“됐다면 이제 돌아가자.”

“예, 돌아가서 어서 연구해야죠.”

시료를 채취한 캡슐을 품에 끌어안고 즐거운 상상이라도 하듯 웃는 리스티.

철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이진운은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마침 뻥 뚫린 코어 룸의 천장 너머로 그들이 타고 왔던 베트론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 * *

“오, 어서 오게! 우리 영웅들!”

베트론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성대한 개선식이 펼쳐졌다.

거의 멸망 직전에 놓였던 오베른 행성이었다. 헌데 이진운과 교육생들로 구성된 선별대의 활약으로 기사회생했으니 이런 대대적인 환영도 무리는 아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교육생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투의 후유증 때문에 다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지만, 사람들의 환성을 듣고 나자 저절로 어깨가 펴지고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개선행진 후에는 대대적인 파티가 벌어졌다. 그동안 식량 사정이 열악해 이런 파티는 열린 적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남아 있던 비축 식량을 대부분 풀어 이번 하이브 다운 전공을 축하했다.

물론 며칠 뒤에는 먹을 식량조차 없게 될 테지만, 그것도 이제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이브가 다운된 이후, 외부와 끊어졌던 통신도 다시 재개되었다.

제일 먼저 하이브 공략 성공 소식과 함께 필요한 생필품부터 지원해 달라고 연락을 취했으니, 이제 며칠 안으로 수송선이 대거 도착하게 될 것이다.

“자, 마셔! 오늘 아주 잘 싸웠어!”

“이번 전쟁이 처음이었다면서? 굉장한데!”

“그러게 말이야. 첫 실전에선 오줌이나 지리지 않으면 다행인데, 용케도 싸웠어.”

“첫 실전에서 오줌 쌌다는 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네 경험담이지?”

사람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면서 그동안 경험했던 전쟁의 참혹함을 잊으려 했다. 당장은 아프고 괴로울 테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기억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을지 몰라도, 오늘의 감정은 점차 희석되면서 남은 삶을 위해 다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떠들썩한 분위기와 동떨어진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진운이었다.

그는 혼자서 술잔을 들고 홀짝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서였다.

‘그 아이가 구현해준 천룡파마신검을 잡는 순간, 분명 전생 시절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어. 어떻게 된 거지?’

천룡파마신검이 영성을 가질 만큼 뛰어난 신검이긴 해도, 소유자의 경지까지 끌어올려주는 그런 검은 아니었다.

헌데 이진운은 그것을 경험했다. 자신의 전생 시절, 아니 그때보다 더한 경지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분명··· 내가 죽기 직전 깨달았던 생사경의 경지였어.’

레이즈 워커와 세계수를 베고, 나아가 하늘과 땅마저 갈랐던 단천일검의 한수!

그것은 분명 전설 상으로 전해져 왔던 의형광검의 위력이었다. 당시에는 당연하다는 듯 구사했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미심쩍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답을 찾는다면··· 내가 죽기 직전에 이룬 깨달음과 경지, 그리고 힘이 천룡파마신검 안에 고스란히 흘러들어갔을 거란 가정인데··· 확신할 수는 없군.’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고 싶다면, 천룡파마신검에게 직접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자신의 바로 옆에 있었다.

“엘레나······.”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 아이야말로 이번 전쟁에서 믿기지 않는 승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천룡파마신검을 구현해낼 줄이야. 그 순간은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았다.

지금은 그때의 힘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남은 것은 있었다.

‘이제 초절정이 됐군. 그것도 거의 끝자락 수준이야.’

검을 잡는 순간, 입었던 부상과 내상이 모두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막혀 있던 경지까지 뚫려버렸다.

중단전이 열리면서 현천진기의 다음 단계인 현천신공과, 태을단목신공의 운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화경까지 올라서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것도 이제 시간문제다. 육체가 무공에 적합하게 조율된 만큼 성장폭은 이전보다 더 빨라질 게 분명했다.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군. 많은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데······.’

현재 엘레나는 프라이스 호의 진료실에 있었다. 함에 소속된 의료 전문가가 그녀를 살피고 있었지만,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단순히 신체에 무리가 간 정도가 아니에요. 혼백 자체에 엄청난 타격이 있었어요.”

“혼백에?”

“아마 영혼 자체를 쥐어짜낸 거겠죠. 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된 거죠? 이능을 무리하게 사용해도 이런 과부하가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이건 완전 죽으려고 작정한 거네요.”

여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레나의 상태는 그만큼 보기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아마, 당분간은 아무 것도 안하고 휴식을 취해야 할 거에요. 몸에 간 부담은 어떻게는 회복시킬 수 있겠지만, 영혼이나 혼백의 문제는 어지간해선 자연 치유가 답이거든요.”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까?”

이진운이 묻자, 곰곰이 생각하던 여의사가 곧 대답을 해줬다.

“흐음, 어쩌면 대신관 급 이상의 고위의 신관이라면 치료가 가능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분들이 일개 교육생들을 봐주실 리 없잖아요. 그냥 자연치유를 바라는 게 더 가능성이 높을 거예요.”

“대신관 급 이상이라면 치료 가능성은 있다 이 말이군요.”

이진운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생각했다. 치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신관이 교육생을 치료해줄 리 없다고 하지만, 그것도 절대적인 건 아닐 것이다. 아니면 이번 전쟁에서 세운 전공을 내세워서 그 대가로 엘레나의 치료를 요구하면 어떻게든 될 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오르큐스는 오래지 않아 의식을 회복했다. 엘레나에 비해 상세가 조금 가벼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무리한 후유증 때문에 성치는 못했다. 의료 전문가로부터 재기 불능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레이즈 워커를 구속할 때 너무 무리하게 역장을 구사한 대가였다.

하지만 평생 쌓아온 이능을 잃고도 오르큐스는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탈한 표정으로 모두를 위안하였다.

“괜찮네. 이능이 없으면 또 어떤가. 그 대신 교육생들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나. 내가 벌어준 짧은 시간 덕분에 모두 살 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하네. 이제 나도 슬슬 은퇴해야지. 너무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돌아다녔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하는 오르큐스의 모습에, 다들 숙연한 표정들이 되었다.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편이야. 이 나이 때까지 전쟁터를 전전한 동기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지. 심지어 사지 멀쩡한 경우는 더 적고. 이능 좀 잃으면 어떤가. 몸이 멀쩡한데 말이야. 그동안 벌어놓은 돈도 적지 않으니, 편히 노후를 보낼 생각일세.”

그렇게 한 명의 노장이 영원히 전쟁터를 떠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모든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노쇠하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교육생들에게 이 기억은 결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르큐스의 지금 모습이 앞으로 자신들의 장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첫 실전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험난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 교육생들은 그만큼 성장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르탈 본성에서 정식으로 오버러가 되는 일 뿐이었다.

* * *

며칠 뒤, 예정대로 수송선이 도착했다. 수송선은 대량의 식량과 생필품, 그리고 오베른 행성을 재건하기 위한 각종 자재와 물품이 실려 있었다.

이것으로 오베른 행성은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재건 지원은 이번 1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될 테니까.

한편, 이번 전쟁의 수훈자인 교육생들은 프라이스 호를 타고 아르탈 본성으로 귀환했다. 며칠 동안의 항행 끝에 드디어 본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구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교육생들에게는 아직도 낮선 곳이었지만, 그래도 물자 하나 제대로 없던 오베른 행성의 전쟁터보다는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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