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10화
이진운은 어떻게든 놈을 붙잡으려 했지만, 놈의 속도는 이진운보다 월등히 빨랐다. 그냥 공격을 받아내며 버티는 거라면 모를까, 이렇게 작정하고 달리는 거라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엘레나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서는 레이즈 워커.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이번에는 이진운이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허나 그때, 창대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멈춰라!”
쿠오오오!
무시무시한 기세로 쏘아져 나가던 레이즈 워커의 신형이 돌연 덜컥 멈춰 섰다. 마치 그 자리에 정지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레이즈 워커가 성난 외침을 터뜨렸다. 놈의 시선 끝에는 다름 아닌, 오르큐스의 모습이 있었다.
“이때다!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잠시 동안 붙잡아두고 있을 테니 그동안 빨리 끝내! 그리 오래 못 버틴다!”
그랬다. 레이즈 워커를 붙잡아 세운 것은 오르큐스가 가진 역장의 힘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랐지만, 이 순간이 모두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순간임을 직감하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가면서까지 레이즈 워커를 붙들어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저 하늘마저 가두어 삼킬지니······!”
그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것은 하나의 술식이었다. 자신의 역장능력을 최대한 위력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여기에 고유의 술식을 첨가함으로서 전에 없던 독자적인 스킬을 만들어낸 것이다.
“무궁지탄(無窮之呑)!”
모든 것을 끝없이 삼킨다는 뜻의 무궁지탄. 그것은 역장의 힘을 압축시킴으로서, 그 밀도를 끝없이 높여나가는 형태의 공격이었다.
물론 이걸 사용하고 난 오르큐스도 멀쩡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잠시나마 시간은 벌 수 있었다.
이진운도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지금은 그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즉시 엘레나 옆으로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서 있던 그녀가 이진운을 보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저씨··· 왔군요.”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이럴 때 그 검을 구현하다니. 너무 무모했어.”
안타까운 마음에 다그쳤지만,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웃으면서 쥐고 있던 검 손잡이를 내밀었다.
“그보다는··· 자, 받아요.”
“이 검을 나한테 주려고 그런 거냐? 이걸 들고 싸우라고?”
자신이 사용하던 천룡파마신검을 쥔다면 확실히 승산은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한 차례 고개를 저어보이더니 덧붙여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게 아니에요. 검이 아저씨를 부르고 있어요.”
“부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엘레나는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더니 불완전한 형상을 하고 있던 검 손잡이 쪽으로 잡아끌었다.
“여기 잡아요. 이 검은 저 혼자만으로 구현이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연의 주체인 아저시의 힘이 필요해요.”
“···그래, 알았다.”
이쯤 되면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검을 쥐었다. 한 자루의 검에 엘레나와 이진운의 손이 맞닿자, 마치 이 세상의 경계 속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던 검이 어느새 선명한 형태를 띠면서 눈부신 빛을 발하였다.
화아아악!
시야가 온통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곳이 하이브의 코어 룸이라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진운은 안온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랬군. 그래서 엘레나가 너를 불러낸 거구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검과 이어진 연을 통해 이젠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자신의 연을 엘레나가 어떻게 보게 되었고, 그리고 천룡파마신검과 엘레나가 서로 어떤 소통을 이어나갔는지··· 그리고 검을 구현하기까지에 이른 엘레나가 어떤 마음으로 목숨을 건 각오를 하게 됐는지도.
‘신세를 졌군.’
그 대신 엘레나가 자신의 과거와 전생에 대해 알게 됐지만, 거기에 대해선 개의치 않기로 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건 아이였다. 그런 숭고한 마음에 비한다면, 과거와 전생의 비밀 따윈 그리 중요치도 않았다.
구현을 끝낸 엘레나는 이제 모든 힘을 다했는지 이진운의 품에 몸을 기댄 모습으로 실신한 상태였다. 이진운은 큰 부상 없이 무사했던 아리엔을 불러 엘레나를 그녀에게 맡겼다.
“아리엔, 그 아이를 부탁한다.”
“예.”
엘레나를 안고 물러서는 아리엔을 잠시 지켜본 이진운은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맑고 명료한 상태였다.
우우웅!
천룡파마신검이 길게 울었다.
“그래, 알았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검이 울부짖은 뜻을 헤아린 이진운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 아이의 마음에 나도 기대만큼 화답해 줘야겠지.”
그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런 상황을 만든 원흉을 무참하게 응징하는 일 뿐이다.
콰우우우!
굉음과 함께 레이즈 워커를 봉인하고 있던 격리역장이 파괴되었다. 오르큐스가 놈을 구속한 것은 고작 1분 남짓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부담이 가해졌는지, 오르큐스는 주저앉은 채로 칠공에서 피를 쏟았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구현을 마친 검을 쥐고 있는 이진운을 보더니, 곧 힘없는 목소리로 부탁의 말을 던져왔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네. 그러니 자네, 부디··· 저들이 살아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게.”
이진운이 검을 쥐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무의식중에 느낀 것일까? 오르큐스는 좀 전까지라면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을 일을 부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예, 꼭 그렇게 될 겁니다. 반드시···!”
이진운의 대답을 들은 오르큐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정신을 잃었다. 그런 그를 교육생들이 곧 수습해 데려갔다.
이진운은 검을 쥔 채로 자신의 적을 응시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격리역장에서 뛰쳐나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크우우, 끝까지 성가시게 구는구나! 이렇게 된 이상, 아예 이 일대 째로 완전히 날려주마!]
“아니, 그 전에 넌 이 자리에서 죽는다.”
단언하듯 내뱉은 이진운의 모습에, 레이즈 워커가 갖잖다는 듯 비웃음을 던졌다.
[뭐? 기가 찰 노릇이로군. 이상한 검 하나 새로 쥐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기라도 했나?]
“그래, 아주 많이 달라졌지.”
그는 하이브의 코어 룸에 도달하기까지 겪은 과정들을 떠올렸다. 그 와중에 희생된 교육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가며 지금의 기회를 만들어 준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많은 희생이 들어갔다. 그 아이도 모든 것을 다해 이 검을 구현해주었고.”
검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심상과 연결된 천룡파마신검도 공감한 건지 마찬가지로 분노에 찬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쌓인 분노 때문일까? 이진운이 전에 없던 섬뜩한 표정으로 고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진짜 힘의 차이를 느껴봐라.”
그가 일보를 내딛었다. 처음 시작은 가벼웠지만, 그것은 레이즈 워커에게만큼은 수십 수백만 톤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쿵! 쿠웅!
가벼운 발걸음인데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질 때마다, 천둥이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실제로 육체에 무시무시한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켜켜이 쌓여가더니, 이젠 서 있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컥! 커윽··· 커으으으···!]
이진운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른 기색도 없었다. 단지 몇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도 무시무시한 힘이 닥쳐와 자신을 짓눌러 버렸다.
레이즈 워커는 혼란스런 모습으로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상대의 모습이 저 우주보다도 더 크게 보였다.
[대체··· 대체 이게 어떻게···?]
“자, 보고 느껴라. 이게 바로 너와 나의 차이다.”
쿠웅!
[커억!]
그가 한발 더 내딛자, 레이즈 워커가 마치 짓밟힌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그 비참한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이진운이 경멸하듯 말했다.
“세계수의 힘을 빌려서 강해졌다고? 그래서, 너 자신의 본질은 뭐가 더 강해졌는데? 제아무리 큰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면 진짜 강자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어지지.”
레이즈 워커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의 이진운은 아까의 이진운과 완전히 다른 존재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일까? 원인을 찾던 놈은 결국 현실 부정에 이르렀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이게 진짜라면, 네놈은 왜 지금까지 나한테 그렇게 당했던 거냐?]
“오래간만에 본래의 힘을 되찾았지. 그래서 더 화가 나. 약해졌다곤 하지만 너 따위에게 그렇게 당한 것도 모자라 하마터면 내 주변까지 잃을 뻔 했어.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도 부끄럽고 치욕적이야.”
쿵!
[끄아악!]
“어딜 일어서려고! 너 같은 놈에게는 버러지처럼 기는 게 더 어울린다.”
레이즈 워커는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 때마다 이진운은 기세를 더해 짓눌러 버렸다. 아니 짓눌리다 못해 전신이 으스러져 박살난 상태였다.
하지만 금세 본 모습을 되찾았다. 역시 놈은 언데드답게 어지간해서는 죽지도 않을 모양이었다.
“정말 바퀴벌레 같은 놈이군.”
그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혀를 내두르는 사이, 완전히 복원된 레이즈 워커가 주섬주섬 일어섰다. 기세로 짓눌러 부숴봐야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이진운이 놈을 풀어줬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레이즈 워커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예전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젠 굴욕과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래, 네놈이 강한 건 인정한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압도적으로 강해졌구나.]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 좀 강해진 정도론 날 죽일 수 없지. 더군다나 세계수가 있는 이곳에서라면 나는 불사나 다름없으니까. 지금처럼 몇 번을 죽여도 마찬가지다. 자, 어쩔 테냐?]
레이즈 워커의 그 말에 이진운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래도 뭔가 숨겨놓은 패가 또 있나 싶어서 귀를 기울였더니, 고작 이런 헛소리나 하고 있을 줄이야.
졸지에 김만 새고 말았다.
“혹시나 했는데 고작 그런 소리였나? 그렇다면 네놈은 물론 그 잘난 세계수란 것까지 같이 베어주지.”
이진운이 검을 쥔 채로 자세를 취하자, 레이즈 워커도 그것이 뭔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그 자세는? 아까 보여준 그 참격이냐? 하지만 그걸로 날 벨 수는 없다! 아니, 날 벨 수는 있어도, 세계수는 절대 어쩔 수 없지. 저건 대함대가 주포를 퍼부어도 몇 번은 버틸 수 있는 존재니까. 일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세계수의 굳건함을 과신하는 걸까? 아니면 세계수가 건재하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기에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어느 쪽이든 이진운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내뱉었다.
“겁먹은 개가 먼저 짖는다더니 참으로 말이 많군.”
[뭐?]
“네놈 말처럼 초식은 같다만 아까하고는 달라. 이번에는 진짜를 보여주지.”
그랬다.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놈에게 보여주었던 그 초식은 억지로 쥐어짜 펼친 불완전한 모습이었을 뿐, 진정한 오의는 미처 담아내지도 못했었으니까.
그렇지만 천룡파마신검을 쥐고, 전성기 시절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현재, 그의 일검은 능히 세상은 베고도 남는다.
우우우웅!
그의 뜻에 호응하듯 검이 울고, 단전에서 시작된 진기가 들끓어 올랐다. 그가 지금까지 운용한 현천진기가 아니었다.
그가 창안한 점창의 최고신공인 천룡무상신공의 재래였다. 하단전에서 시작된 흐름은 순식간에 중단전에 이르렀고, 그것은 멈추지 않고 상단전까지 치고 올라가 상중하단전을 완벽히 하나로 이어버렸다.
고오오오!
하늘이 명동하고 땅이 분노한 듯 크게 흔들렸다. 이것이 바로 반선지경의 힘! 하늘과 땅이 그의 뜻에 호응하면서 무한한 힘을 그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강대한 힘이 올곧게 하나로 응집되더니, 그것은 눈부신 빛이 되어 하늘을 꿰뚫었다.
고고하면서도 장엄하기까지 한 빛의 기둥.
그것은 분명 한 자루의 검이었다.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검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온 세상을 지배하에 놓는 듯한 그 모습에, 모두가 경악에 잠겨버렸다.
“저··· 저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저 사람··· 정말로 우리와 같은 인간 맞아?”
하지만 교육생들보다 더 놀란 것은 레이즈 워커였다. 놈은 지금 이진운이 보여주고 있는 영역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일개 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이건 마치 그분들과 같은···!?]
푸들거리며 뇌까리던 레이즈 워커가 결국 현실 부정에 빠져들었다.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이건··· 이건 거짓말이야!]
하지만 놈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었다. 이진운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였다.
“자, 그럼 이만 끝내지.”
그가 검을 아래로 내리긋는 순간, 거대한 빛의 거검(巨劍)은 저 까마득한 상공부터 지상까지 그대로 베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무인들이 추구하는 극고의 무리. 베고자 하면 베지 못할 것이 없고, 끊어내고자 한다면 저 하늘의 섭리조차 배제한다는 초월의 심상이었다.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2식. 천룡쇄공조(天龍碎空爪)
비의. 단천일섬(斷天一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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