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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59화 (60/448)

3권-09화

어차피 다 이긴 싸움이란 것일까? 레이즈 워커는 친절하게도 엘레나가 물러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놈을 노려보듯 응시한 이진운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짓씹듯 내뱉었다.

“더러운 수작은 잘도 부리는구나. 아이까지 노리다니······.”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게 싫다면 데려오질 말았어야지.]

“······.”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약점이 될 것 같다면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 너무 내 실력을 과신했다.’

이진운은 비로소 깨닫고 인정했다.

자신은 분명 자만하고 있었다. 아직 절대적이라 할 만한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건만, 어떤 상황이 닥쳐도 전생의 깨달음과 무공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엘레나와 두 제자쯤은 얼마든지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레이즈 워커와 세계수라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그 예상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놈은 강적이었다. 전생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이진운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지금도 무리를 쌓아올려 겨우 비등하게 맞붙을 수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를 지키려다 입은 부상이 그 한계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제 슬슬 끝장을 보도록 하지.]

팽배하게 부풀어 오르는 살기. 검 끝에 어리는 검붉은 기운이 이젠 압도적이다 못해 두려울 정도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진운은 어쩔 수 없이 역기충혈대법의 운용을 재개했다. 그러자 간신히 지혈되고 있던 상처에서 피가 튀었다. 격렬한 진기의 흐름에, 배틀슈트의 응급 기능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양지로 일단 상처 부위를 지혈부터 해놓았다. 적어도 지혈 부분에선 배틀 슈트의 구명기능보다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놈을 이긴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지금은 교육생들을 도망치게 시간을 버는 것이 최선이었다.

[적당한 시기가 생기면 제가 신호를 보낼 테니 즉각 퇴각하십시오.]

이진운이 보낸 전음에 오르큐스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진운의 안위가 걱정되긴 했지만,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서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마침 이진운과 레이즈 워커의 재격돌이 시작되었다.

쾅! 콰아앙! 키킹!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두 강자의 격돌!

그렇지만 상황이 좀 전하고는 판이하게 변했다. 부상을 입기 전에는 그럭저럭 비등해 보이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거의 수비로 일관하며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자아, 좀 더 힘내 보라고! 조금 전에 그 실력은 다 어디로 갔나? 하하하!]

이진운을 도발하면서 신나게 맹공을 퍼붓는 레이즈 워커. 이진운은 냉정한 표정으로 방어로 일관했다.

오르큐스보고 기회가 생기면 도망가라고 했지만, 아무 때나 도망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이즈 워커는 무척이나 교활한 녀석이다. 아마도 도망갈 낌새만 보이면 그 즉시 이진운을 향하던 공세를 교육생들에게 돌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렇게 방어적으로 버티면서 틈을 노리는 것이었다. 놈이 언젠가 빈틈을 드러낸다면,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교육생들이 도망갈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의 필사적인 모습에 엘레나가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

그의 제자가 된 지금도 아저씨란 호칭이 더 익숙한 그녀였다.

그건 아마도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기억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복도에서 마주친 그때, 엘레나는 볼 수 있었다. 그가 품고 있는 커다란 연의 이어짐을.

그것은 분명 한 자루의 검과 이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형태의 검. 과학이 발달한 지구나 연합에서는 보기 힘든, 그런 형태의 검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무기를 봐 왔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머나먼 시간과 공간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검.

그것은 그녀가 알던 무기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마음과 뜻을 나눌 수 있었다.

검의 이름은 엘레나도 알지 못했다. 본래는 이름을 갖지 못했던 검이었고, 후에 소유자들에 의해 임의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천룡파마신검. 그것이 사람들에게 불렸던 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천룡파마신검과 이어진 연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던 건 아니고 아주 편린적인 기억만 엿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진운에게 말로 표현 못할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인베이더에게 가까웠던 사람들을 잃고, 언니까지 잃으면서 더 이상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던 그녀에게 찾아온 첫 변화였다.

그 이후에도 엘레나는 검과 대화를 나누면서 닫혔던 마음을 조금씩 열어나갔다. 세상은 자신이 알던 게 전부가 아니었다.

덕분에 이진운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도 알았다. 자신이 겪었던 것보다 전쟁 속에서 더 큰 아픔을 겪었었고, 많은 이들을 잃은 사람이었다.

‘나만 불행한 게 아니었구나. 저 아저씨는 나보다 더 아픈 경험을 했는데도 어떻게 견뎌낸 거지?’

말 그대로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정마대전이라고 했던가? 그 전쟁 속에서 그가 잃은 것은 셀 수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제나 사질들이 죽어나가고, 그를 키워주다시피 했던 장로들도 제자들을 지키다가 무참히 쓰러졌다.

그런데도 그는 견뎌냈다. 슬프고 안타까워도, 그는 언제나 굳건한 모습으로 걸어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깨에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이 걸려 있었으니까.

그가 떠안은 책임의 무게가 어떠할지는 엘레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아마 자신이라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결국 죽음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전쟁에서는 어떻게든 승리했지만, 그는 상대방의 우두머리와 동귀어진으로 죽고 만 것이다.

그런 뒤 그는 환생했다.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로.

21세기 지구는 그가 살던 시대와 전혀 다른 외딴 세계였다. 그가 알던 사람도 없었고, 그가 익숙하던 그런 세상도 아니었다.

모든 걸 위해 자신을 희생한 끝에 낯선 세상의 이방인이 된 그가 느낀 외로움은 또 어떤 거였을까?

그래서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 하였다. 그의 옆에서 그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의 제자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한 번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레이즈 워커란 괴물이 자신을 약점 삼아 노린 것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검 끝. 엘레나는 그것을 보고도 반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삶을 체념하고 말았다. 이미 수많은 죽음을 보았었다. 자신이 거기에 포함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나도 ···이렇게 죽는 거야?’

레이즈 워커의 검이 닿으려던 순간, 갑자기 이진운의 모습이 시야 안에 겹쳐졌다.

그리고 튀어 오르는 선혈! 엘레나는 그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몸과 옷을 적신 피가 뜨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것을 인지하지조차 못했다.

자신을 지키려다 치명상을 입어버린 이진운의 모습 때문이었다.

또다시 자신은 살아남았다. 자신을 지키려던 타인의 희생으로.

‘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을 뻔했어!’

이전에도 그랬다. 자신이 포함된 지구인들이 전함을 타고 아르탈 행성으로 향할 때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먼저 희생당했었다.

전함 내로 침입한 인베이더들은 지구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아직 제대로 이능을 활용할 줄 모르는 지구인들 따윈 아이의 팔을 꺾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에 공포를 느꼈던 엘레나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무기력하게 우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언니가 따스히 위로했다.

언니도 두려웠을 텐데도, 그것을 삭이면서 동생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가까웠던 호위 아저씨들도, 그리고 며칠 동안 친해졌던 지구의 사람들도 어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야 말았다.

[엘레나, 너만큼은 이 언니가 꼭 지켜줄게.]

그 말만 남기고 인베이더에게 몸을 던졌던 언니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산 조각이 되어 죽어버렸다.

가문에서 붙여주었던 호위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외딴 행성까지 같이 소환된 인연들이었는데, 결국 자기를 지켜주다 죽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아직 자신에게는 남아 있는 게 있었다.

‘이렇게 또 잃고 싶지 않아! 나, 저 사람의 힘이 되고 싶어!’

어린 소녀의 한 치의 삿됨도 없는, 올곧기까지 한 순수한 갈망!

그것은 이 순간, 저 먼 시공에 존재하고 있는 연의 끝자락과 완전히 맞닿았다.

우우우웅!

‘어?’

그때였다. 커다란 울림이 들려왔다. 그냥 전해진 게 아니라 바로 지척에서 듣는 것처럼 선명한 울림이었다.

엘라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만이 볼 수 있는 그 검이 어지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날 도와주겠다고?’

우우우웅!

검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을 들은 엘레나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졌던 아저씨였다. 그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와줘!’

그녀는 검의 모습이 보이는 쪽을 향해 자신의 손을 뻗었다. 남들에게는 텅빈 허공으로 보이겠지만, 이진운과 이어진 검의 연을 보고 있는 그녀는 검의 형상을 분명하게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것으로 본디 이어질 수 없는 연이, 까마득한 시공의 간격을 초월하여 이어졌다.

오오오오오!

[뭐, 뭐냐!?]

이진운을 한계까지 몰아치던 레이즈 워커는, 등 뒤에서 난데없이 느껴진 위협적인 존재감에 멈춰 서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울림이었다.

황급히 돌아보자, 그곳에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이진운을 잡기 위해 이용했던 소녀였는데, 그 소녀에게서 믿기지 않는 존재감이 발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살펴보자, 그녀의 손아귀 안에 쥐어진 흐릿한 형상의 검이 보였다. 마치 실체화를 다 마치지 못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분명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죽이고 봐야겠군.]

레이즈 워커는 이진운보다 저 소녀가 쥔 검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위축될 정도의 힘을 가졌다면, 그것을 먼저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힘겹게 레이즈 워커의 공격을 방어하던 이진운도 마침 엘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위태롭게 쥐어진 검이 보였다.

‘저건··· 천룡파마신검!?’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아직 제대로 구현이 되지 못한 것인지 형상이 완전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전생에서 오랜 시간 다뤘던 그 검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정말로 구현해버렸나?’

엘레나에게 그런 고유능력이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이런 상황에서 구현해 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새가 없었다. 엘레나의 능력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레이즈 워커가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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