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08화
놈은 상상 이상으로 교활했다. 설마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고는 이중으로 함정을 파두었을 줄이야.
의식속도가 최대로 가속화되면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앞에서 매섭게 찔러오는 레이즈 워커와, 왼쪽 측면에서 베어오는 분신의 공격!
이진운은 차가워진 이성으로 이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뒤로 우측으로 물러선다면 어떻게든 공격권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 즉시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만일 자신이 피한다면, 놈들의 공격은 이 뒤에 있을 엘레나를 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잖아!’
이를 악문 이진운의 검이 기이한 흐름을 그려낸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진력은 공명하고, 그것은 곧 기이한 파장이 되어 발산되었다.
우우우웅!
기봉검(起鳳劍) 봉허뢰운(鳳噓瀨運)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레이즈 워커의 검 끝. 이진운은 자신의 검을 놈의 검 끝과 맞닿게 하였다.
키이잉!
검신과 검신이 부딪치는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두 검이 서로 동조라도 하듯 날카로움 공명음을 토해내더니, 마치 접착제로 붙인 것 마냥 달라붙은 것이다.
[음!?]
생각지도 못한 기현상에 레이즈 워커가 저도 모르게 당혹성을 흘렸다. 찔러가던 검이 이진운의 검에 닿자마자 제멋대로 달라붙어서 전혀 움직이질 않지 않는가!
그때, 이진운의 검이 부드럽게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레이즈 워커의 검도 자연스럽게 그 궤적을 따라 비틀려 흘러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이진운을 좌측에서 급습 중이던 레이즈 워커의 분신이 있었다.
쾅!
졸지에 자신의 분신과 격돌하고 만 레이즈 워커는 무지막지한 반발력에 밀려 뒤로 물러섰다. 놈의 두 안광에는 당황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기봉검의 절초 봉허뢰운. 어떻게 보면 화경의 수법 중 하나인 착(着)과 비슷했지만, 실제로는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승의 무리(武理)를 담은 검초였다.
진력의 파장을 이용해 자신의 검을 상대방 검의 고유진동수와 동조시켜 튕겨나가거나 혹은 들러붙게 하고, 혹은 상대가 쥔 검의 질량에 간섭하여 일시적으로 무겁게 만들거나 깃털처럼 가볍게 함으로서 공방의 균형을 어그러뜨리기도 하는 공방일체의 검이다.
아마 이런 고등의 무리를 알지 못하는 레이즈 워커로서는 그저 이능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레이즈 워커와 분신을 서로 부딪치게 해서 일단 물러서게 한 그때, 날카로운 파공성이 우측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떠오르는 강렬한 적의!
그의 눈동자가 우측으로 움직인 순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또 다른 레이즈 워커가 자신을 찔러 오는 모습을.
‘아뿔싸! 분신이 하나 더 있다고!?’
지금까지 아무런 기척조차 없었던 걸 보면, 지금 막 만들어진 분신이 분명했다. 설마 본체가 직접 움직이는 상황에서 분신을 두 기나 동시에 운용할 수 있을 줄이야!
이건 너무도 치명적인 판단 미스였다!
시시각각 점점 다가오는 분신의 검 끝!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이 공격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의 실력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번 급습에 대응하기에는 알아채는 게 너무 늦어 있었던 것이다.
푸욱!
* * *
선별대가 하이브에 뛰어들기 전부터, 프라이스 호는 오베른 행성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인베이더의 본대와 치열한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쏴라!”
로베르타인의 외침에, 또 한 번 프라이스호의 주포가 강력한 화력을 뿜어내었다. 이미 수 차례에 걸쳐 사용된 만큼 주포는 충분히 예열된 상태라, 점점 더 빠르게 연사하고 있었다.
거듭된 포화에, 인베이더의 공세도 주춤해졌다. 준대형 전함 중에서도 충분히 강력한 축에 드는 프라이스 호의 분전은 그만큼 전황을 우세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있던 부함장이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본진을 잡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이브를 치러 간 선별대가 괜히 위험을 무릅쓴 것 아닌가 싶은데요.”
그렇지만 로베르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인베이더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야. 놈들 치고는 공격이 너무 조용해.”
“조용하다고요?”
“그래, 인베이더 놈들은 언제나 지성체에 대한 증오로 움직이고 있어. 그래서 언제나 과격하고 변칙적이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부함장에게, 로베르타인은 자신이 느꼈던 의문을 조용히 내놓았다.
“그런데 지금은 움직임이 너무 정론적이야. 마치 군사훈련소에서 모의전이라도 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 그러고 보니······!”
부함장은 이번 전투에서 있었던 과정들을 떠올려보고는 그제야 놀라 소리쳤다. 로베르타인의 말 대로였다. 오늘 인베이더들이 보여준 전술적 움직임들은 지극히 정석만 따르고 있었다.
이건 놈들의 공세가 아니라, 오히려 수세로 버티는 전술이라고 봐야 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은 놈들을 붙잡아두고 있던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대체 놈들은 무얼 노리고, 수세로 일관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꿍꿍이지?’
로베르타인이 화면 너머를 지그시 노려보던 그때, 아군의 좌측해서 성대한 굉음과 함께 화염이 일었다.
콰아앙!
“무슨 일이냐?”
로베르타인이 즉시 묻자, 오퍼레이터가 비명처럼 외쳤다.
“무트레아 반파! 제네레이터에 심대한 데미지, 부양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합니다.”
“대체 어떻게? 배리어는!? 놈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내가 배리어 출력을 상시 유지하라고 했을 텐데!”
“놈들의 화력이 갑자기 폭증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받아오던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만큼 위력이 상승했습니다.”
“뭐? 위력이 상승했어? 그럼 어느 정도냐?”
“거의 30% 이상입니다. 아니 지금도 계속 상승 중. 끝도 없이 계속 올라갑니다. 상향점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이 무슨!?”
로베르타인도 이 예기치 못한 변수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놈들의 공격 출력이 상승하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개체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순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놈들의 각 개체의 등급도 괜히 나눠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악재는 연이어 닥치고 있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전함뿐만 아니라 모든 인베이더 개체에서 느껴지는 에너지 반응 또한 상승하고 있습니다.”
“역시, 뭔가 시작되었군. 놈들의 공세가 조금 얌전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어.”
로베르타인은 침음성을 내뱉으며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은 함대를 이끄는 함장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모두의 생사를 가를 수 있었다.
“일단은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방어에 집중한다. 전 함대 출력 방어로 전환. 그리고 각 전투 병력도 지금 바로 뒤로 물려서 본 함의 방어 라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라.”
“예.”
제아무리 놈들의 출력이 올라갔다 하더라도 아직 준대형 전함인 프라이스 호의 디스토션 필드를 관통할 정도는 아닐 터. 그렇다면 이 사태에 대해 제대로 된 판단이 설 때까지 방어로 버티는 수밖에······.
덕분에 피해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프라이스 호의 디스토션 필드를 최대한 확장해서 병력을 보호하는 그의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그때, 또 다른 변수가 찾아왔다.
“긴급 상황입니다! 하이브에서···!”
오퍼레이터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메인 브릿지에 있던 모든 이들은 스크린 위에 떠오른 영상을 통해 직접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나무. 하이브의 상층을 뚫고 자라나기 시작한 거대한 나무였다.
“뭐··· 뭐냐, 저것은!?”
“나무?”
“무슨 나무가 저렇게!?”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건 나무라 하기 어려웠다. 생체 조직과 나무의 식물 조직이 뒤섞인 것을 어찌 나무라 하겠는가. 심지어 저 나무는 점점 자라나 이젠 고층빌딩의 높이마저 넘어서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라다간, 어쩌면 저 성층권 높이까지 자라나게 될지도 모른다.
로베르타인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번 사태의 변수는 바로 저 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전장에서 다져진 그의 날카로운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인베이더의 일종으로 보이는 저 나무는 분명 하이브에서부터 자라난 개체였다. 그렇다면 하이브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그는 하이브를 다운시키기 위해 떠났던 선별대들의 안위가 격렬하게 걱정되었다.
* * *
푸욱!
결국 피하지 못한 분신의 검 끝이 이진운의 왼쪽 복부를 꿰뚫었다. 배틀 슈트의 액티브 배리어가 발동하긴 했지만, 한 점에 집중된 공격을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크! 이놈이!”
이진운은 뜨거운 것이 뱃속을 파고드는 느낌에 이를 악물면서 그 즉시 반격에 나섰다. 그의 검이 벼락처럼 휘둘러지는 순간, 무시무시한 검광이 분신을 쓸고 지나갔다.
분광십팔수검의 절초 뇌전강암(雷電降暗)이었다.
덕분에 분신은 별다른 저항조차 못하고 소멸되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가 입은 데미지는 심대했다.
놈의 분신이 입힌 검상을 통해 주입된 이질적인 기운이 내부를 뒤흔들고 있었다. 게다가 분신을 없애기 위해 무리하게 진기를 운용한 결과, 내상도 더 깊어졌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그 나약한 것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부상을 당하다니. 참으로 딱한 일이군.]
태연스런 모습으로 이진운을 비웃는 레이즈 워커. 이젠 확실히 우위를 확보했다고 생각했는지, 예전처럼 여유로운 태도였다.
“웃기지 마! 고작 이 정도 부상은 아무 것도 아니야.”
이진운은 애써 허세를 부리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버티고 섰다. 배틀 슈트의 응급기능이 발동하면서 지혈하고 있지만, 내부까지 치료되긴 힘들 듯 보였다.
이진운이 눈을 돌리자, 새하얗게 질린 엘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이 입은 검상에서 튄 피가 그 아이의 이곳저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 아저씨······.”
너무 놀라서일까? 엘레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진운에 대한 호칭은 다시 아저씨로 돌아가 있었다.
이진운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상처 따윈 별 거 아니니까 걱정 하지 않아도 돼.”
“괜히, 저 때문에···. 저만 없었으면······.”
엘레나도 모를 리 없었다. 자신만 아니었더라면 이진운이 부상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울먹이며 자책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진운은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엘레나가 노려진 것은 오히려 자신 때문이었다. 레이즈 워커가 이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 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사람을 노린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엘레나에겐 그런 말이 먹히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상처가 많은 아이인데······.’
인베이더의 공격으로 자신과 가까웠던 혈육과 친인들을 잃은 경험이 있던 아이였다. 그것이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젠 스승으로 모신 이진운까지 부상을 입었으니··· 그 자책감은 말로 표한할 수 없을 만큼 컸으리라.
“일단은 좀 더 멀리 떨어져 있어라. 금방 끝내고 오마.”
아이를 더 이상 위로할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진운은 그렇게 말한 뒤 뒤돌아서서 레이즈 워커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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