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57화 (58/448)

3권-07화

피이잉!

들릴 듯 말듯 울리는 옅은 파공성!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결과는 놀라웠다.

빠르면서도 날카롭고, 무거우면서도 폭발적인··· 그야말로 모순된 검초! 그것은 말 그대로 공간을 압도하고 나아가 모든 것을 부수며 가르고 있었다.

화아악!

검은 화염기둥이 흩어져갔다. 설사 준대형 전함이라 해도 반파에 가까운 타격을 줄 만큼 강력한 공격이 허무하리만큼 분쇄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레이즈 워커가 일순 당혹성을 토해내었다.

이번 일격으로 확실히 끝장낼 생각이었는데, 지금 저 일검은 대체 뭐란 말인가?

더 믿기지 않는 것은 화염 기둥을 베어내고도 여력이 남은 일검의 궤적이 바로 자신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크흐······!]

낮은 신음성과 함께 궤적에 걸려든 왼팔 어깨 부분이 순식간에 절단되어 날아갔다. 위기감을 느낀 순간 몸을 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양단되었을 것이다.

“후우······.”

이진운은 낮게 숨을 토해내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연거푸 공격해서 완전히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자신의 지금 몸 상태론 무리였다. 온 몸이 삐걱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들끓는 진기를 순환시켜서 억지로 진정시켜나갔다.

세계수의 힘을 등에 업은 레이즈 워커의 막대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 억지로 끌어올린 힘.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점창이 보유한 잠력증폭 수법 중 하나인 역기충혈대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내공의 원천인 진원지기까지 손상시킬 수 있는 수법이지만, 이진운은 그런 후유증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만유합원신기로 받아들인 외부의 기운을 연료로 삼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진원의 손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육체에 가해지는 과부하 문제는 당장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무리할만한 가치는 있었다. 회심의 일격으로 전개한 광절단혼섬이 놈을 완전히 베어내진 못했지만, 팔 하나는 끊어냈으니까.

[진짜··· 믿기지가 않는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레이즈 워커가 잘려나간 팔을 금세 재생시키며 중얼거렸다. 무슨 수로 기운을 폭발적으로 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힘의 격차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어떻게 화염기둥과 자신을 한꺼번에 베어낼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빠르고 강하다고 해서 그게 전부일 것 같아? 중요한 건 가진 것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다. 네놈의 사기적인 속도와 힘에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체조건만 갖춰지면 널 이기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야.”

그렇게 시니컬한 목소리로 내뱉으면서 이진운은 레이즈 워커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잘린 팔을 금세 재생시켰지만,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는 아니었다. 풍기는 존재감이 확실히 예전만 못했다. 놈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 자체에 그만한 타격을 입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세계수와 연동되고 있는 만큼 다룰 수 있는 힘의 총량에는 큰 변화가 없겠지만, 어쨌든 놈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확실히··· 지성체들은 종종 믿기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내곤 하지. 우리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야. 힘의 차이가 이렇게 역력한데도, 그것을 이런 식으로 뒤집어 내다니.]

억양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레이즈 워커. 이젠 예전과 같은 여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 인정하지. 기교에 있어선 네놈이 우위라는 것을 말이야.]

“······.”

[그렇지만 그게 얼마나 갈 것 같나? 지금 네놈이 하는 짓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보인다. 그야말로 도박이나 다름없는 짓이군.]

놈의 말처럼 지금의 이진운이 보인 전투법은 종잇장 하나보다 더 적은 차이로 피해내고 공격을 흘리거나 받아내면서 공방을 주고받는 무모한 방식이었다.

한 수 한 수가 오갈 때마다 한끝 차이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거나 다름없으니, 목숨 걸고 도박을 하는 것과 매한가지로 보일 것이다.

이진운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하지만 그 효과는 네놈이 직접 체험했을 텐데? 네놈이 입은 데미지, 결코 적지는 않은 것 같더군.”

[뭐, 없다곤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정도로 쓰러질 내가 아니다.]

자신이 조금이나마 쇠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지, 레이즈 워커가 막대한 기운을 피워 올렸다. 불길처럼 치솟는 검붉은 기운은 코어룸 천장까지 닿을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그런 집중력이 유지될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의 곡예가 끝나는 순간이 바로 마지막 순간이 될 거다.]

콰아앙!

지면을 박찬 순간, 레이즈 워커의 움직임이 눈에 비치지 않는 속도로 다가들었다. 하지만 놈이 막 도움닫기를 하려는 순간의 동작을 확실히 포착한 이진운은, 그 다음에 나올 행동을 먼저 예측하고 있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레이즈 워커의 공격에 담긴 힘의 흐름을, 그는 한발 옆으로 물러서면서 분산시킨다. 정면으로 받을 수 없는 공격을 굳이 똑같이 맞받아칠 필요는 없었다.

단 한 치라도 어긋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수읽기의 싸움!

이진운은 극도의 집중력 속에서 놈과 공방을 주고받아갔다. 레이즈 워커도 아까처럼 허점이 드러나는 큰 공격은 자제하고 있었다. 좀 전처럼 역으로 허를 찔리게 될 경우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진운도 놈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 레이즈 워커가 이렇게 몸을 사린다면, 놈을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힘의 근원을 먼저 제거할 수밖에!

[[지금!]]

레이즈 워커와 공격을 주고받던 이진운이 어느 순간 전음을 던졌다. 전음의 대상은 바로 오르큐스였다.

그의 전음이 닿기 무섭게 무시무시한 굉음과 폭발이 뒤를 이었다.

쾅! 콰아아앙!

쩌저저정!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오르큐스와 교육생들이 남은 온 힘을 쥐어짜 공격을 퍼부었다. 화염과 바람이 몰아치고, 전류가 내리치는 등 각종 이능을 총 동원한 공격!

그리고 그 공격들이 날아간 방향에는 바로 세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레이즈 워커가 당혹성을 토해냈다.

[뭣!?]

콰릉! 콰아앙!

온갖 굉음과 폭발이 이어졌다. 그들 전체가 힘을 쏟은 이 공격은 어지간한 전함의 주포의 화력과 비견되는 위력이 있었다. 특히 기간트에 탑승한 리스티까지 가세한 지금, 다른 건 몰라도 화력 자체만큼은 하이브의 코어 룸 전체를 날려버리고도 남는다.

쿠구구구!

대기가 흔들리면서 성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계수도 그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강한 공격을 퍼부어 이진운을 억지로 떨쳐낸 레이즈 워커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렇군. 지금까지 무모할 정도로 공격을 주고받은 건 날 세계수와 떨어뜨리려고 의도적으로 그랬던 거였나?]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게 전투의 정석이니까.”

당연하다는 듯 화답하는 이진운. 이것은 역기충혈대법을 사용할 때부터 오르큐스에게 전음을 보내 준비한 한 수였다.

[후후,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만··· 되지도 않는 웃기는 수작을 부렸군.]

“뭐?”

[고작 그 정도로 세계수가 파괴될 거라 생각했나? 이 세계수는 그 옛날 세계를 지탱했다고 하던 전설 속의 나무의 잔해에서 추출한 요소로 재탄생된 것이지. 그 견고함과 방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함 수십, 수백 척의 함대가 일제 포격을 가한다면 모를까, 네놈들이 힘을 쥐어짠 정도로는 세계수에게 상처 하나 주지 못해!]

아니나 다를까. 레이즈 워커가 장담한 것처럼 세계수는 상처 하나 없이 건재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돼! 그 공격을 맞고도 긁힌 흔적 하나 안 난다고?”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없애야 하는 거야?”

눈앞에 드러난 결과에 하나같이 아연한 표정이 된 교육생들. 이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이진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의 전투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승산이 보이질 않았다.

자신도 이미 한계였다. 어떻게든 역기충혈대법으로 육체능력과 힘을 억지로 끌어올려서 겨우 공방을 주고받을 수는 있었지만, 이 상태가 유지되는 것도 고작해야 몇 분 남짓 남았다.

이 정도로 놈을 이긴다는 건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자, 절망하는 얼굴들이 보이는군. 내가 원하는 표정이구나.]

만족스러운 듯 키득대는 레이즈 워커. 이진운은 오르큐스 쪽으로 시선을 주더니 더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후퇴하는 수밖에 없군요.”

“으음······.”

이진운의 말 대로였다. 하지만 후퇴라니! 저 괴물 같은 레이즈 워커를 앞에 두고 과연 후퇴를 할 수 있을까?

그 말을 듣던 레이즈 워커까지 가당치도 않다며 코웃음을 쳤다.

[도망가겠다고? 그게 가능할 지는 너희가 더 잘 알 텐데.]

“네놈의 발은 내가 묶는다. 그동안 후퇴한다면 충분히 가능해.”

그렇게 말하며 이진운이 한발 앞으로 나서자, 레이즈 워커가 불쾌하다는 듯 내뱉었다.

[자기희생이냐? 남의 위해 희생한다니,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이다만···.]

“희생이 아니야. 저들이 빠져나가야 나도 살 수 있으니까. 나 혼자라면 네놈 따윈 얼마든지 떼어내고 달아날 수 있어.”

물론 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총동원하면 놈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도, 목숨 하나 건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네놈의 능력은 인정하지.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무시하기도 힘들군.]

레이즈 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자의 말이었다면 코웃음쳤겠지만, 자신 앞에 있는 이진운은 달랐다. 힘의 격차가 여실한데도 지금까지 믿을 수 없는 능력으로 거의 대등히 맞선 강적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방침을 바꿔 보지. 아까 네놈은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게 전투의 정석이라고.]

놈에게서 흘러나온 그 말에 이진운은 흠칫 놀랐다.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너무도 불길하게 와 닿고 있었다.

본능적인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너희 인간들은 특히 나이가 어린 인간을 더 아끼고 보호하려 한다지?]

이어지는 레이즈 워커의 말이, 그가 느낀 무의식적인 불안감을 확신으로 바꿨다.

이진운은 그 순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악의에 찬 놈의 안광이 다름 아닌 엘레나를 향해 있는 것을.

이곳에 온 교육생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소녀. 레이즈 워커가 약점이라고 가리킨 표적은 새로 제자로 받은 엘레나였다.

레이즈 워커의 신형이 일순간 사라졌다. 아니, 눈으로 포착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이진운은 분광착영(分光捉影)의 수법 중 최속의 속도를 자랑하는 섬화탄신(閃化彈身)을 전개해 황급히 움직였다. 자신의 제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그의 속도는 지금까지 냈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영역에 이르러 있었다.

이진운의 시야에 펼쳐진 세상이 느리게 움직였다. 가속화 된 세계 속에서 레이즈 워커와 자신만이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족해! 아직 더!’

보법을 전개하는 다리에 힘을 가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속도를 더해나간 그는 어느새 레이즈 워커를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앞까지 도달했다.

먼저 도달한 이진운은 즉시 대응에 나섰다. 엘레나가 다치지 않도록 놈의 공격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가속화 된 세계 속에서 레이즈 워커의 안광이 기이할 정도로 요요롭게 빛났다. 마치 그것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머릿속으로 불현듯 떠오른 불길한 예상에, 그는 빠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무언가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자신과 상대하고 있던 레이즈 워커와 거의 동일한 형상을 하고 있는 존재였다.

‘분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