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55화 (56/448)

3권-05화

‘정말··· 말도 안 되는 스펙이군.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어.’

입 밖으로 울컥 밀려나올 것 같은 핏덩이를 삼킨 이진운은 그렇게 판단했다.

경지 자체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武)에 대한 깨달음이 무조건적인 승리를 보장해주는 건 아니었다.

지금 레이즈 워커와 싸우고 있는 형국이 그러했다.

만일 이 싸움이 평범한 수 싸움 상황이었다면 높은 승산을 점칠 수 있었겠지만, 이렇듯 무지막지한 힘과 속도를 앞세워 승부를 걸어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화접목이나 수 싸움을 하려 해도 최소한의 힘과 속도를 가져야 대응이 가능해. 이렇게 되어선 질 수밖에 없어······.’

레이즈 워커가 공격해오는 패턴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몇 수 주고받는 사이 전부 파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가속화 된 의식은 놈의 어디가 허점이고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도 전부 꿰뚫어보고 있었지만, 정작 몸이 거기에 따라주질 않았다. 너무 뻔히 보이는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빠르고 강해서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지나치게 빠르고 강한 육체능력만으로 이렇게까지 날 몰아붙인다고?’

[느리군, 느려! 크하하하, 고작 그뿐인 거냐? 그렇게 느려서는 날 잡을 수 없을 텐데!]

“괴물 같은 놈!”

이진운도 음속을 한참 넘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레이즈 워커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이 정도면 초속 수십, 수백 킬로미터를 넘나드는 전함의 고속항행 속도와 거의 맞먹을 지경이었다.

그 상황을 곁눈질하고 있던 오르큐스도 애가 타는 심정이었다. 어떻게든 이진운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교육생들을 공격하는 라이온 헤드들을 견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가 광역으로 전개한 역장의 힘이 놈들의 움직임을 둔화시키지 않았더라면, 교육생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못하고 진즉 쓰러졌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리엔과 클레브가 라이온 헤드 다수를 붙잡아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이진운에게 가르침을 받은 두 사람은 눈부실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예전이라면 감히 상대할 생각조차 못했던 침공 급 인베이더 라이온 헤드를 무려 여섯이나 상대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검 끝에 닿는 라이온 헤드의 손톱. 아리엔은 그것을 부드럽게 받아내면서 놈의 균형을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바로 적의 힘을 흘려낸다는 화경(化境)의 한수였다.

그 순간, 그녀의 등 뒤를 지키고 있던 클레브가 벼락처럼 앞으로 전진 했다. 흐릿한 잔상과 함께 그의 신형은 어느새 라이온 헤드의 품 안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있었다.

분광착영(分光捉影) 절초 중 하나인 일보섬영(一步閃影)의 한수.

그는 보법의 가속력까지 더한 일검을 놈의 가슴 한복판에 그대로 꽂아 넣었다. 삼절검의 1식인 섬진쾌였다.

크우우!

이로서 두 번째 라이온 헤드가 쓰러졌다. 아리엔이 위험을 무릅쓰고 빈틈을 만들어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작 하나 해치웠다고 해서 쉴 틈은 없었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라이온 헤드는 아직도 다섯이나 남았으니까.

콰우우!

마침 측면에 있던 라이온 헤드 하나가 그 틈을 노리고 입을 벌려 포효를 터뜨렸다. 그러자 성대한 기세로 밀려오는 충격파!

아리엔의 대응은 간단했다. 허공을 수직이등분하는 날카로운 일검!

삼절검(三絶劍) 제 2식. 낙인참(落刃斬)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끊어낸다는 참격이 충격파를 갈라 그대로 무산시켰다.

하지만 겉보기보단 쉽지 않았다. 정면으로 공격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검을 쥔 손아귀가 살짝 저려올 지경이었다.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말 그대로 순간순간이 다 생사의 기로나 마찬가지였다. 다수의 라이온 헤드들을 상대하면서 긴장감을 유지하느라 이젠 체력마저 걱정이 되었다.

‘너무 벅차.’

하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없었다. 스승인 이진운은 정말로 진멸 급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강력한 레이즈 워커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

이러니 누군가의 도움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라이온 헤드들과 겨루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리스티는? 아직도 멀었어?’

리스티도 그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기간트의 백팩에 있던 둥근 위성체 같은 것들을 다수 띄워서 라이온 헤드들을 옭아매거나 견제해주고 있는 상황.

위성체들은 하나하나가 그녀의 마법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는 보조 병기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걸로 라이온 헤드를 견제하는 것이 리스티의 마법 실력 전부는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위성체를 제어하면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대체 뭘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엔은 그것이 이 국면을 뒤집을 수 있는 그런 것이었으면 바랬다.

우우우웅!

마침 때가 된 것일까? 리스티가 탄 기간트를 중심으로 방대한 영력이 휘몰아쳤다. 공격을 하던 라이온 헤드들조차 일순 움찔 놀랄 정도의 크기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휘도는 다수의 위성체들. 그것들이 코어 룸 내의 각 방위로 날아가더니 말 그대로 거대한 마법진의 축이 되었다.

화아악!

이윽고 마법이 발동되었다. 그것은 신체의 근력을 강화하고, 민첩성과 반응속도를 높여주는 두 개의 보조마법이었다.

중위계 정령마법. 스트로인<근력강화>&하이닉스<가속화>.

신체를 휘감는 은은한 빛과 함께 육체의 근력과 반응속도가 급격히 높아져간다.

물론 각 개인이 보유한 영력을 운용하면 비슷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이 마법들은 여기에 더해질 경우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놀람과 감탄에 찬 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세상에··· 힘이 넘쳐!”

“놈들이 이젠 잘 보이는데? 전혀 빠르지 않다고!”

그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라이온 헤드가 이젠 만만해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 전까진 제대로 대응조차 할 수 없었던 놈들의 야생적이고 빠른 움직임이 이젠 상대해볼 법한 수준까지 내려와 있었다.

하지만 리스티의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전개한 두 종류의 버프마법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중위계 백마법. 리카브 레지션<대승신창大丞身昌>&코르벤타움<정련칠중막精鍊七衆膜>

이어지는 두 개의 주문이 또 한 번 모든 사람에게 깃들었다. 신체의 피부 위에 옅은 무형의 보호막을 7중으로 덮는다는 [코르벤타움]과, 회복력을 높여주는 한편 신체 전반의 모든 기능을 최대한 활성화 시켜준다는 [리카브 레지션]이었다.

물론 리스티에게는 신성력이 없는 만큼, 효과는 조금 더 반감됐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금세 엄청난 전력 상승으로 이어진다.

오르큐스는 믿기지 않는다며 중얼거렸다.

“···정말 엄청나군.”

천재라 불리는 리스티에 대한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지만, 설마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그녀가 전개한 버프 마법은 어느 정도 인정받는 랭크의 마법사라면 충분히 전개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번 경우는 상식을 아득히 벗어났다.

그녀는 무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동시에 버프 마법을 건 것이다.

물론 기간트의 영력 증폭능력이 큰 도움을 줬겠지만, 그 술식들을 일일이 짜내고 통제한 것은 그녀 본인의 실력이었다.

“어쨌든 이제야 해볼 만해졌군.”

그 결과, 전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제 위기에 처한 것은 라이온 헤드들이었다. 놈들은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이런 식이라면 얼마 못가 쓰러지게 될 것이다.

하나하나 쓰러져가는 라이온 헤드들을 틈틈이 살피던 레이즈 워커는 이진운과 검을 맞댄 상태로 중얼거렸다.

[역시 만만치가 않군. 지성체들은 언제나 이렇더군. 별 거 아닌 것 같은데도, 저런 별종의 것들이 튀어나온단 말이야. 네놈도 마찬가지고.]

“언제까지 그렇게 즐기고 있을 생각이냐! 이젠 네놈도 저 수하들처럼 쓰러질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버프 마법의 효과로 신체 능력이 상승된 것은 이진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레이즈 워커에게는 한참 못 미쳤지만, 이젠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지만 레이즈 워커는 도발하듯 던진 이진운의 말에 외려 비웃음을 던졌다.

[이제 조금 내 움직임을 따라붙을 수 있게 됐다고 꽤 자신만만해진 모양이군.]

콰아아앙!

그들이 일시에 쏟아낸 검기의 폭풍이 서로 맞부딪치며 성대한 폭음을 일으켰다. 그 반동으로 둘은 일단 십여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물러섰다.

상황이 이렇게 됐음에도, 레이즈 워커에게서 풍기는 여유 넘치는 분위기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느긋하게 움직이면서 관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 그동안 기다리느라 지루했는데, 네놈들이 살고자 발악하는 그 모습이 아주 좋은 여흥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네놈도 숨겨둔 비장의 패가 있다는 거냐?”

[인간들이 표현하는 식으로 말 한다면 그런 셈이지.]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마지막 라이온 헤드가 쓰러졌다. 마지막 놈을 쓰러뜨린 것은 놀랍게도 마틴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분전하기 시작한 그의 활약은 일개 교육생들 수준이라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진운은 조금 전에 자신이 구해줬던 그 순간, 마틴에게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겨났다는 것을 눈치 챘다.

‘뭔가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군.’

덕분에 교육생들의 희생이 줄어들었다. 그 순간 마틴이 각성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교육생 십여 명 정도는 더 희생되었을 것이다.

“이젠 너 하나만 남았다.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혼자서 우리 전부를 감당할 생각이냐?”

[참으로 웃기는군. 너 하나라면 모를까, 저런 놈들을 상대로 긴장하라는 거냐?]

비웃는 듯한 목소리. 교육생들은 그 말에 분노를 느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교육생이 아무리 많아도 레이즈 워커를 상대하는 데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력을 다한다기보다는 일부러 시간을 끄는 눈치였지.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냐?”

그렇게 내뱉은 이진운은 레이즈 워커를 노려보았다. 놈의 깊은 속내까지 들여다보기라도 할 듯한 시선이었다.

[그래, 부정하진 않겠다. 시간을 끈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나도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네 녀석과 싸우면서도 저것을 성장시키기 위해 계속 힘을 쓰고 있었지.]

레이즈 워커의 붉은 안광이 저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놈이 지키고 있던 코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의 상태가 이상했다. 땅에 반쯤 파묻힌 듯한 반구형 형상 위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라나 있었다.

이진운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무?”

[정확히 말하자면 묘목이지. 이제 겨우 싹을 틔운 정도랄까?]

거기서 뭔가 심상찮음을 느낀 이진운은 즉시 코어를 공격하려 했지만, 레이즈 워커는 철통같이 경로를 막아섰다.

제아무리 이진운이라 해도 속도에서 한참 뒤떨어지는 이상, 놈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레이즈 워커는 이진운을 막아서면서 여유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까.]

“젠장!”

끝없이 훼방하는 레이즈 워커의 움직임에, 이젠운은 욕설을 터뜨렸지만 코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코어의 묘목은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마치 시간을 가속한 듯한 광경이었다. 손바닥 만했던 작은 나무는 어느새 거목이 되었고, 그것은 더더욱 자라나 마치 고층 건물마냥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더욱더 자라나고 있었다.

이진운은 자신이 막기엔 때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만큼 자라난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하이브의 천장마저 뚫고 자라나고 있는 나무를 배경으로, 레이즈 워커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자, 이제 모든 게 시작된다. 자라나라 세계수여! 더욱더 커져서 이 행성에 악몽을 흩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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