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03화
‘하긴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변화가 생겨나겠지. 지금의 전황을 뒤엎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변화가······.’
기간트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낸 이진운의 눈앞에 어느덧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건물의 문이라고 하기에는 생체 조직이 뒤섞인 듯한 형태라서 너무 그로테스크해 보였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문 앞에서 멈춰선 선별대에게 오르큐스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바로 하이브의 중심인 [코어 룸]이다. 이 안에 있는 코어를 부수면 하이브의 기능은 모두 정지되지.”
교육생들은 새삼스런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이미 숙지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코어 룸을 가로막고 있는 이 문이 더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중요한 만큼 이곳을 지키는 인베이더들도 더 강력할 거다. 아마도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것 이상으로 위험하겠지.”
“······.”
교육생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만큼 긴장과 두려움으로 굳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오르큐스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지구에서 온 여러분들은 조금은 억울할지도 모른다. 이 싸움에 자의로 참여한 건 아닐 테니까. 뭐, 불만스럽기도 했겠지. 애꿎은 남의 전쟁에 끌려와 용병처럼 쓰다 버려진다고 생각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거야.”
안 그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지, 표정으로 금세 드러났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지구에 재앙이 닥쳐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큼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이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일이다. 아직 실감은 안날 테지만 인베이더의 침공권은 이제 여러분들의 모성인 지구마저 넘보고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놈들의 손이 미칠 때까지 고작 해봐야 10년 정도 남았겠지.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고.”
오르큐스의 차가운 시선이 교육생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소환되지 않고 지구에 남았더라면 인베이더의 침공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 이곳 오베른 행성이 20년 전 개척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재앙이 닥칠 거라고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인구도 무려 10억이나 됐었지.
헌데 지금 이곳은 어떻게 됐지? 놈들이 침공해온 지 불과 6개월도 안 되는 시간 고작 5천만 명도 안 되는 사람만 살아남았다. 전체 인구에서 불과 20분의 1에 불과한 숫자지.
내가 알기로 지구의 총 인구가 대충 50억인가 60억인가 했었다. 그럼 여러분과 그 가족들은 그 20분지 1이라는 희박한 확률 안에 낄 자신이 있나? 아니, 실제로는 그보다 더 적을 거야. 지구에는 인베이더에게 대적할만한 수단이 하나도 없으니까. 침공 며칠 만에 지구인 전부가 전멸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그런데도 모든 걸 잊고 지구로 되돌아가고 싶나? 자신의 행성이 멸망하게 될 카운트다운 날짜를 하루하루 세어 가면서?”
신랄하기까지 한 그 말에, 교육생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들 대신 자신만 억울하게 끌려왔다고 원망만 했지,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쯤 말했으면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곳에 끌려온 게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언젠가 여러분도 놈들에게 침공당할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침공 당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먼저 선제공격해서 놈들에게 타격이라도 주는 게 덜 억울하지 않겠나?”
그제야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그냥 죽기 싫어서 마지못해서 싸워왔었지만, 이젠 정말로 자기 자신을 위한 싸움이 된 것이다.
그들의 전의 어린 시선을 맞받으면서 오르큐스는 각오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활약할수록 지구가 침략당할 시기도 좀 더 뒤로 미뤄지게 될 터. 그러니 최선을 다해 싸워라. 나도 여러분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돌려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할 말을 다 마친 그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이제 마지막 싸움이다. 코어 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정비를 해 두도록. 20분 뒤에 들어가겠다.”
“예.”
교육생들은 즉시 정비에 들어갔다. 정비라고 해서 대단할 건 없었다. 무기나 장비의 상태를 확인하고, 자잘한 상처 같은 것을 응급처치 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적진 한가운데나 다름없는 코어 룸 앞에서 정비하는 것은 너무 무모하게 보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대부분 지친 상태였고, 부상자들에게 해두었던 응급처치도 다시 한 번 살펴야 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휴식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지막 싸움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이진운이 다가와 건넨 그 말에 오르큐스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베물었다.
“별 것 아닐세. 선임교관 짓을 제법 오래하다 보니 말재주만 좀 늘었을 뿐이야.”
“싸울 목적을 찾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정도면 훌륭하지요.”
그렇지만 오르큐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보면 저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일도 아니야. 잘 살고 있다가 갑자기 영문조차 모르고 끌려왔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인베이더와 싸워야 한다고 무작정 말해봐야 당위성을 느끼기 힘들지.”
“앞으로 저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을 것 같은가?”
“······.”
“오늘 몇 명이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10년 후에는 저 중에서 1%도 살기 힘들 게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적을지도 모르지.”
그의 읊조림을 들은 이진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어도, 언제든 죽어나갈 수 있는 게 인베이더와의 싸움이었다. 거기에 실력마저 변변찮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괜한 말로 저들을 현혹해서 희망고문 한 것 같아 가슴이 쓰리구먼.”
죄책감이 느껴지는 그 말에, 이진운은 무거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인베이더란 놈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도 조금씩 피어올랐다.
‘알면 알수록 정말 불쾌한 놈들이군. 인베이더란 것들은······.’
20분의 정비 타임은 말 그대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던 교육생들은 즉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이제 코어 룸의 문만 부수고 들어가면 이번 사태를 종결지을 마지막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콰아앙!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코어 룸의 내부 전경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코어 룸은 거대한 홀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코어로 여겨지는 붉은 색의 둥근 무언가가 코어 룸 바닥에 반쯤 파묻혀 있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저게 그 코어인가? 징그럽게 생겼군.”
이진운이 표현한 것처럼, 코어는 이질적이었다. 생체적인 부분과 식물적인 부분이 뒤섞인 형태였는데, 중간 중간에 튀어나온 혈관 같은 것이 주기적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생겼다.
교육생들도 그건 마찬가지였고, 비위가 약한 몇몇 사람들은 아주 메스껍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경험 많은 오르큐스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니, 뭔가 달라. 저게 코어라고?”
그는 낯선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하이브에 들어올 때부터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연합이 상대해온 하이브는 일종의 생체조직에 가까운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의 하이브는 뭔가 달랐다. 알 수 없는 식물성 조직이 뒤섞인, 전례가 없던 형태였다.
‘설마···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타입이란 건가?’
식별명조차 지어지지 않은 언노운 타입!
연합은 지금까지 수많은 하이브들을 다운시키면서 모든 데이터를 축적해왔고, 지금은 어느 정도 정형화 된 대응 매뉴얼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그 매뉴얼이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가 짐작한 대로 이곳의 하이브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언노운 타입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코어 룸을 지키고 있어야 할 적들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코어를 빼고는 텅 빈 내부를 보고 있던 교육생들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지요, 교관님. 저 코어를 부술까요?”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묻는 교육생의 질문에, 오르큐스는 긴장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조심해라, 적이 튀어나올 거다.”
바로 그때, 코어 앞에 있는 바닥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마치 갑주를 연상케 하는 외피로 빈틈없이 둘러싸인 검은 신형!
불길한 저주의 기운을 흩뿌리는 존재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낯익었다.
이곳에서 본 유일한 진멸 급 언데드 타입 인베이더였으니까.
이진운은 그 개체명을 입에 담았다.
“···레이즈 워커.”
하지만 크게 놀라진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놈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 코어 룸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레이즈 워커의 반응은, 그가 상정하던 경우를 벗어나 버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양동작전에 강습이라··· 이곳 내부까지 침투하느라 여러모로 고생이 많더군. 보는 내가 다 안타까울 정도였어.]
“말을··· 해?”
이진운의 얼굴 위로 일순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놈은 인간의 언어로 유창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인베이더들 중에서 말을 하는 개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난번에 붙어봤을 땐 괴성만 내지를 뿐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때는 일부러 내 앞에서 말을 못하는 척 했던 거냐?”
이진운이 질문을 던지자, 레이즈 워커의 안광이 그쪽을 향했다. 그는 이진운을 잠시 훑어보더니,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대꾸했다.
[아아 그래, 한번 본 적이 있었던 녀석이군.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지? 그때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
“한번 본적이 있었다고? 나한테 패해서 쌍둥이처럼 닮은 녀석이랑 도망쳤던 녀석이 날 기억 못한다는 듯 지껄이는군.”
이진운의 날카로운 반박에, 레이즈 워커는 별 감흥없다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미안하지만 널 직접 본적은 없었다. 분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널 봤었을 뿐이지. 조금 인상은 깊었지만, 그리 기억할 정도는 아니어서 말이야.]
“그게··· 분신이었다고?”
전생과 현생을 거치면서 다듬어져 온 그의 날카로운 직감이 경종을 울려댔다. 사전에 세운 작전대로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순간 모든 것이 다 헝클어져 버렸다.
레이즈 워커 녀석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이건 완벽한 함정이었다. 놈은 오베른 주둔군의 양동작전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고, 선별대가 하이브로 강해해 침투해 올 것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심지어 레이즈 워커에 대한 능력에 대한 정보조차 한참 어긋났다.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레이즈 워커는 본체의 분신에 불과했다니···.
그렇다면 본체인 녀석은 얼마나 더 강하단 말인가?
그 덕분에 깨달았다. 이곳은 극상의 사지(死地). 놈이 만들어낸 죽음의 덫이었다.
[그럼 슬슬 끝내기로 하지. 그동안 준비할 것이 많아서 직접 나서지 못하고 분신만 보냈었지만, 이곳에서라면 쉽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군.]
놈은 아주 오만한 모습으로 단언했다.
[이곳에 온 너희들이야말로 오베른 행성에 남은 마지막 전력. 네놈들만 없애고 나면 나머지 것들을 청소하는 건 쉬운 일이지.]
딱!
레이즈 워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놈이 처음 나타났던 방식으로, 지면에서 다수의 인베이더들이 솟구쳤다.
대체 어떻게 이 많은 숫자가 땅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이진운이 조금 혼란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지면에서 튀어나왔다고 해서 땅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럼 어디에 있던 거지?”
[공간의 틈 사이에 숨겨져 있었지. 네놈 실력이 제법이긴 하다만 공간의 틈 안에 감춰진 걸 무슨 수로 감지하겠나? 그런 구시대적인 기척 감지 따윈 다 무소용이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이진운에게 대답해준 레이즈 워커.
놈은 여유롭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 하찮은 지성체들아. 어디 마음껏 발버둥 쳐봐라.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즐겁게 관람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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