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22화
눈앞의 모든 것이 쓸려나갔다. 광풍노도와 같은 검풍의 해일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이즈 워커는 모든 기운을 다 쏟아내 칠흑빛 검막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것으로 놈이 소멸될 거라고 다들 확신하던 그 순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예상 못했던 이변이 벌어졌다.
그 원인은 저 하늘에 있었다.
구우우우!
갑자기 저 높은 상공이 크게 명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검은 무언가가 드리워지더니 곧 무시무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이건!?”
이진운은 급풍쾌검의 시전을 중단하고는 황급히 물러섰다. 그리고 그가 피했던 자리 위로 거대한 칠흑빛 거검이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지표면이 뒤집혀졌다. 그건 평범한 거검이 아니었다. 레이즈 워커가 다루는 것과 같은 검은 빛의 에너지가 거검의 형태로 응집된 것이었다.
일순간 반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깊이만 해도 수십 미터에 달할 정도였으니, 그 위력이 어떠한지 능히 짐작이 갔다.
이진운은 시선을 돌렸다. 자신에게 소멸 직전까지 당한 레이즈 워커 옆에, 다른 무언가가 출현해 있었다.
그것을 본 이진운이 깜짝 놀라 외쳤다.
“레이즈··· 워커!? 한 기가 아니었다고?”
레이즈 워커 옆에는 똑같이 생긴 녀석이 하나 더 생겨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상대했던 녀석 외에도, 완전히 똑같이 생긴 동형기가 또 있었다는 건가?
“······.”
이진운은 입을 지그시 다문 채 검을 겨누었다. 어쩌다보니 두 기를 동시에 상대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한 놈은 기진맥진한 상태. 여기에 멀쩡한 녀석이 하나 더해진다고 해도 어려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놈들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던 모양이었다.
화아악!
또다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이번 안개를 만들어낸 것은 새로 나타난 레이즈 워커였다.
“쓸데없는 짓을!”
이진운은 즉시 회풍구도로 검풍을 일으켜 검은 안개를 다시 제거했지만, 레이즈 워커 두 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도주한 모양이었다.
놈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난 빈 자리를 바라보면서 이진운은 쓰게 웃고 말았다.
“정말 교활한 놈들이군.”
거검으로 자신을 공격해 온 것도 같은 아군을 구하기 위해서였을 뿐. 놈은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안력에 내공을 더하자, 저 멀리 하늘을 날아 도주하고 있는 레이즈 워커 둘이 보였다.
하지만 뒤쫓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 투창술인 망일비섬창을 사용한다면 놈들을 격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봐야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놈들은 말도 안 되는 복원력을 갖고 있어. 잠깐 격추시켜봐야 금세 회복해서 다시 날아가겠지. 차라리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더 낫다.’
이진운이 추격을 단념한 그때였다. 갑자기 병사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외쳤다.
“그··· 급보입니다!”
“급보? 무슨 일인데?”
이진운이 묻자, 병사가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부대의 지휘사령부가··· 전멸했습니다.”
“뭐, 전멸!?”
난데없이 전멸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에 이진운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일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누구에게 당했어?”
“레이즈 워커입니다. 놈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지휘사령부를 완전히 박살내고 불태웠습니다.”
“레이즈 워커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진운은 낮게 침음하고 말았다.
“양동작전이었군.”
아마도 자신이 상대하던 레이즈 워커를 구해간 개체가 한 짓이 분명했다. 한 녀석이 자신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끄는 사이, 다른 녀석이 지휘사령부를 타격한 게 틀림없었다.
“그럼 바튼 준장은?”
“그분도 놈에게 당하셨습니다.”
“젠장! 일이 꼬이는군!”
저도 모르게 욕지기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주둔군을 담당하고 있는 건 바튼 준장이었다. 구심점인 그가 죽었으니, 부대의 통솔도 쉽지 않을 듯 보였다.
마침, 주둔군을 공격해 왔던 인베이더 무리에게서도 변화가 생겼다.
“아! 적들이 물러가고 있어!”
“놈들을 추격하지 마라! 함정일지도 모른다.”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서둘러 저지시켰다. 놈들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시간도 끌 만큼 끌었으니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는 거겠지.’
역시 교활하기 짝이 없는 괴물들이었다. 이론 교육을 통해 인베이더가 어떤 놈들인지 배워 왔지만, 이런 교묘한 양동작전까지 사용하는 걸 보면 인간 이상으로 교활했다.
“미치겠군.”
이진운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였다.
군을 통제해야 할 바튼 중장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이 대부분 죽어버렸으니, 주둔군을 지휘할 지휘관을 찾는 게 가장 급선무일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리엔과 클레브가 무사히 본 자이언트들을 쓰러뜨렸다는 정도였다.
‘둘 다 많이 늘었어.’
예전 실력대로라면 아리엔은 고작 본 자이언트 한 기를, 클레브는 열이 있어도 본 자이언트 한기조차 감당 못할 실력이었는데 이젠 놈들을 둘이서 쓸어버리는 수준에 다다랐다.
이 정도면 진멸 급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어디에 내놔도 쉽게 죽진 않을 것이다.
“우선 뒷수습부터 해야겠군.”
이진운은 먼저 오르큐스부터 찾았다. 그는 현재 지구인 출신 교육생들을 통제해 후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이진운을 반갑게 맞았다.
“역시 무사했군. 자네 실력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된 거요? 지휘사령부가 무너졌다던데.”
“자네가 상대하던 것과 동형의 인베이더가 갑작스럽게 덮쳐왔네. 덕분에 지휘사령부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지. 바튼 준장도 마찬가지고.”
“프라이스 호는?”
“너무 갑작스런 상태라서 대응할 수조차 없었네. 특히 놈이 가진 검은 안개는 일종의 재밍과 스텔스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프라이스 호의 레이더도 놈을 포착하지 못했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제 대충 다 알 것 같았다. 오르큐스의 말대로라면 프라이스 호가 놈의 접근을 막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럼 주둔군을 통제할 사람이 있긴 합니까?”
“딱 한 사람이 남아 있네. 고르드 대령이지. 현장 지휘관으로 최전선에 남아 있던 탓에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가 앞으로 주둔군의 임시 사령관을 맡게 될 것일세.”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군.”
이진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병력을 수습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니 천만 다행이었다.
고르드 대령은 자신이 떠맡게 된 임시 직책에 상당히 부담감을 내보였지만, 그는 생각 이상으로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일단 지휘사령부의 붕괴로 어지러워진 주둔군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 무너진 체계를 다시 세웠다.
그렇게 되기까지 무려 이틀이 꼬박 걸렸다.
그동안 이진운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리엔과 클레브는 이진운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각자 수련에 몰두해 있었다.
“아직도 멀었군.”
운기조식을 마친 이진운은 아쉽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절정의 정점이라는 최절정에 도달하긴 했지만, 절정의 벽을 뛰어넘은 초절정의 경지는 아직도 요원한 상태였다.
가장 우선적으로 내공이 부족했다. 현재 그의 내공 수위는 일 갑자 반을 넘어 이 갑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정도 내공으로는 강기 몇 번 사용하고 나면 순식간에 바닥이 나고 만다.
만유합원신기로 소모된 내공은 즉각 회복할 수 있긴 했지만, 내공의 총량이 커진다는 것은 단순히 많다는 의미만 갖는 게 아니었다. 내공을 가공하고 압축하는 과정을 보다 단축할 수 있으며, 같은 양의 내공을 사용해도 그만큼 더 위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탱크에 담긴 물이 많을수록 수압이 점점 더 강해지는 이치와 비슷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바로 내공심법의 숙련도였다. 제아무리 전생의 경지를 기억하고 있다 해도, 단련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야 달성할 수 있는 법이다.
만일 이것을 지금 이상으로 단축하려 한다면 확실한 플러스 알파의 요소가 필요했다.
‘여기가 전생의 중원이었다면 방법이 아주 없진 않겠지만··· 여기선 무리지.’
아쉬움을 떨쳐낸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때였다. 병사 하나가 찾아와 말했다.
“이진운 님. 지금 지휘사령부에서 급히 찾으십니다.”
“알았다. 곧 찾아가겠다.”
그렇게 병사를 돌려보낸 이진운은 조용히 읊조렸다.
“또 무슨 일이지?”
* * *
지휘사령부에서 다시 보게 된 고르드 대령은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이틀 동안 밤잠을 새워가며 주둔군을 수습하느라 꽤나 지친 듯 보였다.
그는 홀로그램 지형도를 가운데에 띄우고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적들은 현재 하이브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좋은 조짐은 아니지요.”
“어째서입니까?”
이진운이 묻자, 고르드 대령이 정론을 내놓았다.
“지금도 놈들은 하이브에서 병력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시간을 줄수록 유리한 것은 인베이더 놈들이지요. 지금은 그럭저럭 이곳을 지켜내고 있지만, 이대로 가다간 저희가 먼저 고사될 겁니다. 게다가 이틀 전처럼 놈들이 공격해온다면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놈들의 양동작전에 당해 지휘사령부 전체가 몰살당했다. 그런 일이 한번만 더 반복되고 나면 주둔군의 전멸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제타격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르드 대령은 자신이 고안한 작전을 설명해 주었다. 다 듣고 난 이진운은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꽤 극단적인 작전이군. 이런 수를 꼭 써야만 하는 거요?”
“어쩔 수 없습니다. 놈들은 지금 현재도 우릴 몰아붙일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너무 시간을 끌고 있지요. 그게 좀 불길합니다.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꿍꿍이속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확실히 현재 이곳 주둔군의 전력은 인베이더 놈들에게 크게 뒤처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총공세를 퍼붓지 않고 시간을 끄는 걸 보면, 고르드 대령의 말처럼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오르큐스도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고르드 대령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놈들이 준비하고 있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게 완성되기만 하면 우리 오베른 행성은 물론, 이 인근 항성계 전체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말입니다.”
* * *
긴 회의 끝에, 오베른 주둔군의 총 공세가 결정되었다. 고르드 대령이 언급한 것처럼, 인베이더의 수상쩍은 행태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놈들, 대체 무슨 꿍꿍이속인 걸까?’
현재 인베이더들은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도 하이브 안에 틀어박힌 채 농성중인 상태다.
고르드 대령이 일부로 놈들을 떠보기 위해 소규모 병력을 동원해 두어 차례 가볍게 공격을 해 봤지만, 놈들은 철저히 방어태세로만 일관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만하면 거의 확실했다. 놈들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쯤은, 전술전략을 모르는 어린애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더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이 전쟁, 아마도 이번 총력전에서 결판이 날 테니까.
이진운은 곧장 프라이스 호로 향했다. 그리고는 리스티의 공방으로 찾아갔다.
그녀에게 회의에서 결정 난 소식을 전하자, 리스티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러면 이틀 뒤에 바로 총력전인가요?”
“그런 셈이지.”
“헤에··· 역시 그렇게 되네요.”
묘한 뉘앙스의 말투. 마치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이진운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냐?”
“물론이죠. 저 이래 뵈도 천재에요. 그 정도쯤은 예측할 수 있죠.”
한껏 우쭐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진운은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자. 인베이더 놈들이 몰래 준비하고 있는 게 뭘 것 같냐?”
“흐음··· 글쎄요. 좀 광범위하니까 확실하게 말하긴 어렵네요.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요. 인베이더들이 준비하는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게 이번 전황의 승패를 좌우할거란 거요.”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군.”
기대했던 것과 달리 너무 평범한 답변이었다. 이진운이 실망스럽다는 듯 내뱉자, 리스티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진운을 쳐다보았다.
“흐음··· 그런 평범한 대답으론 불만족스러우시다? 그럼 조금 더 전문적인 용어를 넣어서 말해 볼게요.”
그녀는 자신의 모듈 밴더로 홀로그램 창을 열었다. 그러자 어떤 복잡한 수식의 데이터와 관측 영상이 떠올랐다.
“이건 뭐지?”
“얼마 전에 하이브를 관측한 데이터에요.”
“이런 게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직접 했죠. 제가 직접 만든 스파이 드론으로 어제 측량했고요.”
“······.”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역시 이 소녀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어지간한 비행체는 하이브 근처의 감지 센서에 발각될 텐데도, 그걸 무효화할만한 드론을 만들어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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