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15화
* * *
이진운은 곧바로 관리국에 공증과 중재를 부탁했다. 그 결과, 관리국에서 협상장에 한 사람을 보내왔는데, 그는 다름 아닌 필리스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불러낼 줄 몰랐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관리국을 철저하게 털어먹기로 하셨군요. 이번에는 웰라우드 가라니.”
“저도 확실한 세력이 필요해서요. 이 정도는 되어야 뭘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저희는 이진운 씨 편이니 열심히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제 이진운도, 웰라우드 가도 이 계약을 무를 수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그렇게 웨슬린과 이진운은 서로 답례를 주고받았다. 개인적인 감정이야 어떻든, 앞으로 서로 잘 협력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진운이 문득 다른 화제를 꺼냈다.
“참, 제가 말한 대로 가주님을 모시고 오셨습니까?”
“예, 원로들이 반대해서 애는 먹었지만 간신히 모시고 왔죠.”
인사불성 상태의 가주를 본가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가주의 치료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헌데도 그걸 무릅쓰고 나선 것이 웨슬린이었다. 고루한 원로들을 하나하나 설득한 끝에 겨우 모셔올 수 있었다.
그 과정을 떠올리면서 웨슬린은 진저리를 쳤다.
“그럼 협상도 다 마쳤으니 가주님부터 치료를 합시다. 그러니 그분을 이쪽으로 모시고 와 주시죠.”
“지금··· 바로 말인가요?”
“예. 지금 당장이라도 치료 가능하니까 모시고만 오시죠.”
협상을 마치자마자 치료하겠다는 그 말에 웨슬린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과 달리, 그녀는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저렇게까지 자신 있어 하는 걸 보면 완치시킬 뭔가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불과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한 사내가 들것에 실려서 왔다.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 그가 바로 웰라우드 가의 당대 가주이자 아리엔과 웨슬린 자매의 아버지인 로이란 웰라우드였다.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바싹 마른 몸에, 전신의 핏줄이 거미줄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이자가 웰라우드 가의 가주로군.’
이진운은 즉시 그의 손목에 있는 맥문을 잡고 진기를 흘려 넣어 그의 내부를 살폈다.
‘분명 의식은 있어. 다만 심마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군. 기혈은 막혔고, 경락은 뒤틀려서 거의 끊긴 거나 마찬가지인데··· 치료하자면 애 좀 먹겠어.’
전형적인 주화입마의 증상이었다. 문제는 몸 상태가 너무 쇠약해졌다는 것이다. 주화입마에 걸린 상태로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 탓이었다.
물론 웰라우드 가에서도 온갖 치료를 안 해본 게 없을 테지만, 이진운의 관점에서는 차라리 치료를 안 하느니만 못했다.
주화입마는 이곳의 치료법으로는 보존치료조차 못 되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이곳은 무예보다는 전부 이능 방면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문제야. 주화입마에 대한 대처법을 전혀 모르는군. 제대로 된 조치만 제대로 취해 줬어도 이정도로 악화되진 않았을 것인데······.’
내심 혀를 찬 이진운은 그 즉시 손을 쓰기 시작했다. 양 손의 검지를 곧게 세운 뒤, 로이란 가주의 전신 대맥과 요혈을 짚기 시작한 것이다.
타다다닥!
놀랍도록 빠른 수법이었다. 옆에 있던 웨슬린은 미처 인지할 새도 없이 타혈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곧 반응이 나왔다.
“끄욱··· 쿨럭!”
지금까지 의식을 잃고 있던 로이란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더니 입으로 기침과 토혈을 하기 시작했다.
웨슬린이 깜짝 놀라 외쳤다. 무슨 위해라도 가한 것 아닌가 싶어서였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죠? 아버지가 왜 피를 토하고 이러세요?”
“잘 봐라. 지금 토한 피의 색이 어떤지를.”
“예? 아!”
그제야 눈치 챈 웨슬린이 탄성을 내질렀다. 로이란이 토한 피는 아주 진한 검붉은 색을 하고 있었다.
“보다시피 죽은피를 토해낸 거다. 기맥을 틀어막고 있던 사혈을 배출시켰으니 조금은 나아지겠지.”
“그럼 이제 회복되시는 건가요?”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묻는 웨슬린. 하지만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이건 그냥 임시방편일 뿐이야. 제대로 된 치료라고 할 수는 없지. 막힌 기맥의 일부를 잠시 강제로 열어서 기가 흐르게 했지만, 조만간 다시 막힐 거다.”
“설마··· 저희 아버지, 가망이 없으신 건 아니겠죠?”
제대로 된 치료가 아니라는 그 말에 웨슬린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제 겨우 붙잡았다고 생각한 마지막 희망이 날아가 버리는 듯해서였다.
그렇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이진운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렇진 않아. 다만 며칠 정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군. 당장 치료하기에는 몸 상태가 말이 아니야. 기맥을 다스려서 어느 정도 건강을 추스른 다음에 치료를 시도해야겠지.”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웨슬린. 그렇지만 이내 뾰족한 목소리로 항의해왔다.
“그런데 이진운 씨. 생각해보니까 왜 저한테 반말이시죠?”
“예절 갖춰가며 할 협상은 이미 다 끝났잖아. 여기서 뭘 더 바라는데? 기분 나쁘면 너도 반말 하던가.”
“······.”
웨슬린이 이진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협상을 끝내자마자 이렇게 태도 돌변이라니!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녀는 작게 투덜댔지만,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상대는 아버지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별달리 불합리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반말 좀 했다고 해서 계속 따지기에도 뭣했다.
“으음···으으으.”
그때였다. 로이란의 입에서 돌연 낮은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웨슬린이 깜작 놀라 외쳤다.
“아버지! 아버지! 정신 차려 봐요. 제 목소리 들리세요?”
딸이 부르는 외침이 들리기라도 한 걸까?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드디어 로이란의 두 눈이 힘겹게 떠지기 시작했다.
멍하게 풀린 얼굴로 천장을 응시하던 눈동자의 초점이 조금씩 잡혀갔다.
웨슬린이 눈시울을 붉히며 거듭 말을 걸었다.
“아버지, 저예요. 정신은 좀 드세요? 말 좀 해보세요.”
“에···쉴···린······?”
그제야 딸을 알아본 건지, 그가 메마른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뗐다. 하지만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어서인지, 정신이 맑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 여긴···어디······?”
“관리국 본부예요.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치료하려고 이곳까지 왔어요.”
그러자 몇 차례 두 눈을 깜빡이는 로이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깨달은 그가 곧 탄식하듯 내뱉었다.
“너한테··· 정말···미안···하구나······.”
“뭘요. 아프신 아버지가 고생은 다 하셨죠.”
이진운은 거기까지만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부녀가 오래간만에 회포를 푸는 데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문 밖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아리엔의 모습이 보였다. 치료하는 데 자신이 방해라도 될까봐 지금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 저희 아버지는요?”
당장이라도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흔들리는 그녀의 눈망울을 본 이진운이 괜찮다며 말했다.
“더 이상 걱정 안 해도 되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가 봐라. 너희 아버지 지금 막 정신을 차리셨으니까.”
“저··· 정말인가요?”
“그래. 지금 너희 언니하고 대화중이니까 너도 가서 뵙고 해.”
결국 아리엔은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녀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치료가 다 된 것도 아닌데 감사는 무슨. 어서 들어가 봐.”
그 즉시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리엔. 곧 안에서 기쁨에 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운은 혼자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로이란 가주의 체력이 회복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할 터. 그동안은 가족끼리 함께 지내도록 놔두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마찬가지로 바깥에 나와 있던 필리스가 감탄사를 토해내었다.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계신 건 알았지만, 설마 영맥의 뒤틀림까지 치료해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별 말씀을.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게 한 정돕니다. 진짜 치료하고는 거리가 멀지요.”
이진운의 가벼운 겸양에 필리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결국 로이란 가주를 완치시키실 것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합니다. 제자의 아버지인데 그냥 놔둘 순 없지요.”
그 대신 치료의 대가를 받는 다는 사실이 조금 가슴이 찔리긴 했지만, 그래도 웰라우드 가에게도 손해될 일은 아니니 서로 나쁠 건 없었다.
“아무튼 이번 일로 이진운 씨를 지원하기로 한 저희의 입장도 더 확고해졌습니다. 당신에게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어요.”
“좋게 봐주신다니 고맙군요.”
“그럼 이진운 씨의 활약을 앞으로 더 기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필리스는 이 자리를 떠나 사라졌다.
“관리국이라······.”
그들 덕분에 협상도 무난하게 마쳤고, 리스티와 함께 연구하는 것도 별 훼방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관심이 조금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앞으로 몇 년 뿐이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면 더 이상 그들에게 의존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 * *
이진운은 돌아가기 전에 리스티의 공방에 들렀다. 그녀에게 오늘 일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이야기가 다 끝나자 리스티의 옆에 있던 듀렌 박사가 물었다.
“호, 그래서 그 아가씨의 아버지가 의식을 회복했다고?”
“의식만 회복한 상탭니다. 정상하고는 아직 거리가 멀죠.”
듀렌 박사는 흥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이진운을 응시해왔다.
“진짜 보면 볼수록 대단하구만, 자네. 이젠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짐작이 안가. 알데마란을 그렇게 쓰러뜨리고, 영맥이란 게 꼬인 환자도 치료해? 대체 뭘 얼마나 숨기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영원히 모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에잉, 쌀쌀맞기는.”
어차피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갖고 환생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듀렌 박사의 기대는 말 그대로 쓸데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침 리스티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무튼 잘 됐네요. 아리엔도 이젠 집안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그러니 우리도 이제 하던 연구나 마저 해요.”
“그러도록 하지.”
듀렌 박사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연구실 안에는 온갖 기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10미터를 훨씬 넘는 거대한 무언가가
이것이 이진운과 리스티가 함께 연구하고 있는 주제의 결과물이었다. 아직은 미완성 상태였지만, 이것만 완성된다면 우주의 전황은 물론 시장경제까지 크게 뒤엎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명은 [기간트]. 바로 지금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이족보행로봇의 명칭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이진운이 오늘의 연구 결과에 대해 물었다.
“오늘은 좀 어때?”
“다른 건 다 순항인데 여전히 동기화 문제가 쉽지 않네요. 뭔가 영자 패턴이 안 맞는 걸까요?”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리스티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만들고 있는 기간트라는 이족보행로봇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었다. 아르탈 행성 연합의 과학력은 일반적인 이족보행로봇 따윈 수백 년 전부터 만들어내 왔으니까.
하지만 이족보행로봇은 인베이더와의 전쟁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왜냐면 쓸모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인베이더들에게는 영력을 담은 공격만 통용될 뿐. 순수 물리력으로 작용하는 화력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족보행로봇은 무거운 물자를 나르거나 기타 잡일을 보조하는 데에만 사용될 뿐, 전투방면에서는 사장된 지 오래였다.
“음··· 일단 한번 타 보고 나서 확인해 주지.”
이진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기간트에 올라탔다. 기간트는 영화 속에 나오는 거대 이족보행로봇병기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가 콕핏트에 올라서자, 각종 기기가 움직이면서 그를 감쌌다. 그리고 전방위 홀로그램 스크린이 펼쳐지더니 외부의 전경의 고스란히 비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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