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9화 (40/448)

2권-14화

예전부터 리스티는 많은 연구를 해 왔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결실을 맺은 연구들 중 상당수는 그냥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상태.

보통 사람 같으면 그걸로 특허를 내든가, 기업에 팔아서 막대한 이윤을 추구했겠지만, 리스티는 물욕도 크게 없었다.

무언가를 연구하고 파헤쳐서 모르던 것을 알아간다는 것에만 흥미를 느낄 뿐, 그것을 가지고 뭘 할지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요 몇 년 사이 투자로 큰돈을 벌고 다수의 기업을 인수했다고 했는데, 아마 그것도 연구하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였을 뿐. 그 돈으로 뭔가를 누리고 사치하는 데에 써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빛을 보지 못하고 리스티의 공방 안에 그냥 방치된 것들이 상당했다. 그 중에는 세기의 발명이라 할 만한 것들도 여럿 있었다.

아마도 그 중 몇 가지가 소레디안 컴퍼니에게 넘겨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리스티는 그 대가로 막대한 주식을 넘겨받고 그 회사의 실소유주나 다름없는 최대주주가 됐을 테지.

“정말이지···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안 그래도 소레디안의 비약적인 성장에 온갖 음모론이 떠돌 정도였는데, 설마 그 성장에 리스티가 암중으로 관여했을 줄이야. 본래부터 좀 비상식적인 면모를 보이던 리스티였지만, 이건 정말 너무 했다.

아리엔은 이번엔 이진운 쪽을 돌아보았다. 요 근래 리스티와 자주 붙어 다녔던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스승님도 알고 계셨어요? 리스티가 이렇게 부자인 것을요.”

이진운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뭐, 어느 정도는. 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사실 리스티와 손잡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타고난 천재성을 높게 평가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구를 진행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 스케일이 클수록 연구비 지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래서 리스티의 연구능력과 자금동원능력을 보고, 그녀와 손잡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 개인이 가진 부가 이 정도인 줄은 그도 정말 몰랐었다.

지구에서 최대의 국제 기업으로 손꼽는 구글이나 아람코 같은 회사들도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이 넓은 우주에서 두 손안에 꼽힐 정도의 기업이라면 대체 얼마나 막강하단 말인가.

그리고 소레디안 컴퍼니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로 볼 때, 그녀가 소유한 다른 기업들도 상당한 규모일 거라 짐작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리스티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봐야 내 오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이 정도는 진짜 새 발의 피라니까.”

“오빠라면··· 혹시 조나단 오빠?”

“너도 알잖아.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다는 거.”

조나단 프론사이드.

프론사이드 가문의 장자로서 아주 어릴 적부터 대단한 천재로 알려졌던 인물이었다.

대대로 천재적인 인물들이 태어난다는 프론사이드 가문 내에서도 그는 그 어떤 이들과도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역대 급의 천재성을 자랑했다.

그래서 다음 대의 가주 자리를 물려받게 될 거라 유력시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벌써 3년 전이다. 그때의 사건은 지금도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리스티처럼 남들 몰래 강력한 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리스티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스티안 컴퍼니 알지?”

“모를 리가 없잖아. 연합 제1위의 기업인데?”

“거기가 바로 오빠 꺼야. 그 기업의 핵심 인사들 외에는 다들 모르고 있지만.”

“······.”

이젠 더 이상 놀랄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연합 제일이 아니라 우주 제일의 기업일지도 모른다고 평가받는 기업이 아스티안 컴퍼니였다.

그게 자신이 알던 그 오빠의 것이라고? 대체 이 남매는 어떻게 된 인간들이란 말인가. 이건 상식을 벗어나도 너무 한참 벗어나 있었다.

아리엔은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나단 오빠가 대단한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 너도 마찬가지고.”

어렸을 적에 리스티를 따라 그를 몇 번 만난 적 있었던 아리엔은 믿기지 않는 다는 듯 중얼거렸다.

리스티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오빠를 보고 배워서 이렇게 한 거야. 연구를 하려면 자금줄이 든든해야 하더라고. 게다가 외부적인 요인으로 연구를 방해받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영향력도 있어야 하고 말이야. 덕분에 하고 싶은 연구는 원 없이 할 수 있었어.”

그녀의 말 대로였다. 연구라는 것은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금 문제도 문제지만, 어떤 특정 연구를 하려면 외부의 방해가 없어야 했다.

누군가 같은 연구를 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해 상대의 연구를 훼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소레디안 컴퍼니를 보유한 리스티의 연구를 방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진운은 그녀의 재력에 꽤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론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우리한테는 나쁠 것 없는 이야기지. 돈이나 권력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네가 그런 기업까지 갖고 있다면 연구나 개발을 방해할 요소는 없겠구나.”

“뭐, 그런 셈이죠. 덕분에 [기간트 프로젝트]도 순조롭네요. 조금만 더 하면 뭔가 보일 것 같네요.”

기간트 프로젝트. 그것이 이진운과 리스티가 합작해서 추진하고 있는 연구였다.

“그리고 지난번에 검술교관 일로 관리국에게 확약을 받아 놨다. 내가 하는 일을 몇 가지 도와주기로 했는데, [기간트 프로젝트]를 이야기 해뒀지.”

“우와, 잘 됐네요. 관리국이 뒤에서 봐주기만 한다면 우릴 누가 건드리겠어요?”

이진운이 전해온 소식에 리스티가 화색을 띠며 기뻐했다.

사실 기간트 프로젝트는 완성만 되면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킬 수 있었다. 지금의 전황을 크게 뒤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결과물을 지켜낸다는 게 쉬운 게 아닌데, 관리국이 뒤에서 협조해준다면 지켜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 * *

볼일을 마치고 공방에서 숙소로 되돌아가던 길이었다. 아리엔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스승님. 저희 가문에서 곧 스승님을 만나 뵙겠다고 했어요.”

“이제야? 너무 늦는군.”

제안을 보낸지 벌써 2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답변이 오다니, 이진운으로서는 영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엔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변명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아무리 망해가는 가문이라 해도 규모가 작지 않으니까요. 장로들과 은퇴한 원로들까지 있는데 가주대리라고 해도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거든요.”

“그럼 날 찾아온다는 건 가문에서도 결정이 났다는 말이군.”

“예.”

과연 웰라우드 가에서 어떤 답변을 가지고 왔을까? 이진운은 그때가 기다려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엔이 말한 것처럼 웰라우드 가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찾아온 이는 놀랍게도 아리엔의 친언니였다.

웨슬린 웰라우드. 웰라우드 가의 장녀이자 현재 쓰러진 가주를 대신해 가주대리직을 맡고 있었다.

사실상 웰라우드 가의 전권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처음 뵙네요. 당신에 대해선 아리엔에게 많이 들었어요. 웨슬린 웰라우드라고 해요.”

“이진운이라고 합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협상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진운의 제안을 웨슬린이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였다.

“저희더러 당신의 문파 밑으로 들어가란 건가요? 우리 웰라우드 가가?”

“그게 좋을 텐데요. 이미 가문의 위세는 예전만 못하니 차라리 제 밑으로 들어오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웨슬린은 이를 악물었다. 한때 연합 내에서도 손꼽는 가문이었던 웰라우드 가에게 있어 이런 제안은 터무니없는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몰락했단 말은 듣고 있어도, 아직 많은 것이 남아 있어요. 계기만 있다면 언재든 다시 재기할 수 있죠.”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진운을 향했다.

“하지만 당신이 가진 것은 몸 하나 뿐이잖아요. 그런 당신 밑으로 뭘 믿고 들어오란 거죠?”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는 아니지요.”

그렇지만 이진운은 여유로웠다. 가지고 있는 패를 생각하면 협상의 주도권은 자신이 쥐고 있었다.

상대의 태연스런 모습에,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웨슬린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냉정을 잃은 채로 협상을 진행할 순 없었다.

“물론 이진운 씨가 제안한 조건들이 크다는 건 알아요. 비전의 복원과 제 아버지의 치료. 그 어떤 것도 저희가 바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들이죠. 하지만 웰라우드 가는 수백 년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저력 있는 가문입니다. 본가의 전부를 내놓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인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내놓으란 게 아닙니다. 난 단지 웰라우드 가가 내가 새울 문파와 협력업체 같은 형태로 존속하자는 겁니다.”

“협력업체요?”

“물론 협력업체라 해도 약간 상하관계는 있지만 크게 나쁘진 않을 겁니다.”

이진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중원무림에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속가문파 제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제국과 제후국의 관계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후국은 제국에 신하로서 조공을 바치고, 제국은 제후국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지만 설명을 다 듣고도 웨슬린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조건은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이진운 씨는 지금 혼자잖아요. 아리엔하고 강화병 출신의 인물을 제자로 받았다곤 하지만 3명으로는 작은 무가 수준도 못되죠. 그에 반해 저희 웰라우드 가는 본가만 무려 50만 명이고요. 각 행성마다 존재하는 분가의 인원까지 전부 포함하면 거의 10억 명을 훌쩍 넘어가죠.”

그 말에 이진운은 내심 크게 놀랐다. 무가에 소속된 인원이 무려 억 단위라니! 몰락해간다는 무가 치고는 너무 엄청난 인원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아르탈 행성 연합은 무려 1만개에 가까운 행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행성에 열 명씩만 배치되어 있어도 10만 명인데, 전체 인원 10억이라고 해 봐야 각 행성 당 1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 내에 있는 태권도 도장 숫자만 해도 무려 2만개가 넘는데, 행성 하나에 10만 명이면 진짜 얼마 안 되는 거지.’

하지만 문파의 첫 기반을 닦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수준의 인프라다. 웰라우드 가의 조력만 얻는다면 그들 분파의 도움으로 신생 점창파를 범우주적인 규모로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벌써부터 설레발치긴 아직 일렀다. 아직 협상은 진행 중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웨슬린은 착 가라앉은 눈동자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진운 씨가 가진 잠재력은 잘 알겠어요. 저희 웰라우드 류를 복원할 정도면 능력도 충분하고요. 하지만 고작 3명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뭘 할 수 있을까요? 본가가 속가문파로 들어가면 이진운 씨가 세울 문파에서 저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정말로 가능하긴 할까요?”

그야말로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이진운은 솔직하게 답했다.

“음··· 아무래도 당장은 어렵겠죠. 몇 년 후라면 모를까.”

웨슬린이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상대가 이 문제에 대해 감언이설로 적당히 흘려 넘길 줄 알았는데, 너무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으니까.

“생각보다 솔직하시군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기라 해야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달린 사안인데 대충 얼버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말입니다.”

애당초 문파를 세우려는 것도 바로 이를 위함이 아니었던가.

자신이 제아무리 강해진다 해도,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세력이 없는 이상 커버할 수 있는 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웨슬린은 더 혼란스러워져서 물었다.

“그렇다면 이런 제안을 한 이유가 뭔가요? 이진운 씨가 세운다는 문파가 어느 정도 제구실을 하려면 막대한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일 텐데요. 그럼 저희 본가가 그때까지 그 모든 것은 대신 감당해주길 바라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저도 그 정도까지 바란 건 아닙니다. 필요한 자금도 따로 충당할 방법이 있고요. 단지 웰라우드 가의 인맥과 인프라를 좀 빌렸으면 합니다.”

“인프라를요?”

“예. 이번 기회에 점창파를 우주적인 규모로 한번 키워볼까 합니다. 웰라우드 가가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웨슬린은 퍼뜩 깨닫고 말았다.

“···설마 저희처럼 각 행성에 분가를 만들 생각이신 건가요?”

“예, 맞습니다. 우주를 아우를만한 문파가 되려면 그 정도 규모는 되어야지요.”

느긋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진운의 모습에, 그녀는 결국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정말이지 기가 막힐 노릇이네요. 그건 결국 저희가 가진 모든 걸 내놓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잖아요.”

웰라우드 가를 하나의 기업으로 본다면, 이진운의 제안은 자신들이 구축해 두었던 거래처와 유통망을 타 기업과 공유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당장이야 큰 이득일지도 모르지만, 먼 장래를 내다보면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영역을 야금야금 침범당해 빼앗길 가능성이 컸다. 자칫했다간 웰리우드 가를 오늘날까지 지탱해준 존립 기반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전혀 그럴 뜻이 없다며 말했다.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죠. 잠깐 빌리는 것뿐입니다. 고작 그 정도 대가로 비전을 복원하고 가주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일단 듣기 좋은 말로 후려친 뒤, 나중에 말 바꾸는 게 사기꾼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잖아요.”

웨슬린이 불신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지만, 이진운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하긴 이해합니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니 제 말을 신뢰하기 어렵겠죠.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한 가지 문제를 먼저 해결해 드리죠.”

“뭘 말인가요?”

“지금까지 주변으로부터 많은 견제와 압박을 받아왔을 줄로 압니다. 우선은 그걸 해결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웨슬린은 곧장 냉소로 받아쳤다. 상대의 말이 너무 허무맹랑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수로요? 제가 알기로 당신은 현재 연합 내에서 아무런 명성이나 입지도 확보하지 못한 걸로 아는데요. 무슨 힘이 있어서 그게 가능하다는 거죠? 전 더 이상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네요.”

웰라우드 가는 뿌리 깊은 나무였다. 지금은 비록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지만, 그들이 구축한 영향력과 그물망 같이 엄밀하게 퍼져 있는 분가의 수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들의 견제와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다. 몰락하는 웰라우드 가를 완전히 짓밟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욕 넘치는 세력들은 우주에 얼마든지 널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이진운이 무슨 수로 해결해준단 말인가.

더 이상 헛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던 그때, 이진운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붙잡았다.

“전 관리국으로부터 몇 가지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그 무엇보다 확실한 패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그럴 리가요. 관리국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관리국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말 그대로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제아무리 강성한 세력도 몇 수 접을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관리국이었다. 그런데 그 관리국이 이진운을 돕기로 했다고?

허튼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았던 자들은 관리국에게 하나같이 응징당해 사라졌으니까.

“제가 알데마란을 쓰러뜨린 건 이미 알고 계시겠죠?”

“예,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리엔이 자세히 말해주더라고요.”

애써 침착하게 말을 받는 웨슬린. 이진운은 말을 이어나갔다.

“관리국에서는 절 장래의 천외오천 급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전해오더군요.”

“그런······.”

천외오천 급이라니. 눈앞에 있는 이 상대가 그런 괴물과 맞먹는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관리국의 지원도 확실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관리국에게 이번 협상에 대한 공증을 부탁하도록 하지요. 그러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신 저희 가문의 모든 것을 걸라 이거군요.”

그 말에서 무게감을 느낀 웨슬린이 침중하게 대꾸하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관리국까지 끼어 넣어가며 보증한 제안이다. 이쯤 되면 가문의 명운을 걸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저도 대가 없이 남을 돕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니까요. 그 대신 웰라우드 가가 예전의 위상을 되찾도록 확실한 도움을 드리죠.”

“부디 그러길 바라야겠군요.”

웨슬린은 한숨 섞인 말투로 그렇게 화답하고 말았다. 관리국까지 더해지면서 협상의 스케일이 너무 커져버린 탓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그럼 내일 모레 쯤 해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죠. 관리국 사람에게 말해둘 테니, 그때 와서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그걸로 일단 사전협정이 마무리 되었다. 웨슬린은 지친 얼굴로 그곳을 떠나갔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이제 겨우 스물다섯밖에 안됐으니까.”

가주를 대신해 그럭저럭 웰라우드 가를 운영하고 있다지만, 전생의 기억까지 가진 이진운의 상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가진 패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으니 협상에서 줄곧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제법이야. 그 나이에 벌써 절정 고수라니. 재능만 따지면 아리엔보다 더 위인가.’

웨슬린의 경지를 가늠하면서 이진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째서 그녀가 가주대리가 되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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