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13화
“너무 직선적이야. 움직임이 단순하니 아무리 빨라도 금세 간파되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자라면 나처럼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으니 앞으론 주의 하는 게 좋을 거다.”
이진운은 오른손을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마틴의 주먹질을 하나하나 흘려보냈다. 그의 손길은 느리고도 부드러웠지만, 음속의 세 배를 넘어서는 그의 주먹질을 모조리 빗겨내고 있었다.
대체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대체 이놈은 뭐야? 뭔데 이렇게 강하냐고!?’
마틴은 언제나 충만하던 자신감이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최근 이능을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능력이 크게 성장했고, 그 결과 레벨도 부쩍 올랐다.
그리고 이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면서, 이젠 더 이상 이진운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이렇게 작정하고 시비를 건 거였는데, 설마 이렇게나 큰 차이가 있었단 말인가?
“크··· 이, 괴물 같은 놈이!”
도무지 상대가 되질 않았다. 자신은 어떻게든 한방 먹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놈은 공격을 받아 흘리면서 여유롭게 품평까지 하고 있었다.
“직선적이고 단조로운 공격은 비교적 읽기가 쉽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움직임에 허와 실을 섞어라.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카운터를 얻어맞는다. 바로 지금처럼.”
이진운의 오른손이 어느새 폭풍 같은 난격 사이로 불쑥 파고들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도 같아서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투웅!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마틴의 신형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이진운의 일장(一掌)이 그의 가슴팍을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데미지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마틴의 분노에 찬 시선이 이진운을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챘을지 몰라도, 직접 상대하고 있던 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진운이 손속에 사정을 뒀다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 일격으로 큰 내상을 입고 쓰러졌을 테니까.
이진운이 웃으며 말했다.
“이래 뵈도 난 너희들을 가르치는 교관이다. 가르치는 자가 교육생을 다치게 할 수는 없지. 그리고 지금 상황도 엄연히 교육의 연장이라고.”
“뭐!?”
마틴의 두 눈이 분노로 뒤집혔다. 지금 그 말은 교관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지도대련이라는 뜻이었다.
애당초부터 놈은 자신을 동등한 상대로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네놈이! 네놈이 뭔데 감히 날 네 눈 밑으로 깔아보는 거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틴은 언제나 남들을 주도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항상 남들보다 뛰어났고, 나름대로 리더쉽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소환된 이후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을 입증해보인 강자, 이진운 때문이었다. 온 힘을 다해야 몇 기 쓰러뜨릴 수 있었던 인베이더들을 허수아비처럼 베어버린 것은 물론, 마치 재앙처럼 여겨졌던 알데마란까지 쓰러뜨렸다.
어느 누가 봐도 마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난 몇 달간 숨죽인 채 조용히 지냈다. 이미 구축해놨던 파벌도 더 이상 확장하지 않고 유지만 하면서 내실을 다졌다.
지금은 세력보다는 본인의 역량을 키워야 할 때였다. 제아무리 사람들을 선동하고 정치질 해서 세력을 더 키워봐야, 이진운의 무력 앞에서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고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을 다졌다. 가르치는 교관들도 그의 학습 태도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결과 그의 실력은 믿기지 않을 만큼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타고난 재능이 상당했던 그가 노력까지 하니 성장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현재 마틴의 레벨은 56. 이젠 어지간한 강화병들을 상대해도 압도할 만큼 강해졌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능력을 최대로 활용할 경우, 주먹질 한 번으로 무려 100mm강판을 뚫고, 두 다리로 달려서 무려 시속 500km까지 속도가 나올 정도였다.
비로소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 알데마란을 상대로 싸우던 이진운의 압도적인 모습이 떠올랐지만, 지금이라면 어찌어찌 비벼볼 수 있을 성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교관 자격 가지고 시비를 걸어 맞붙게 되었는데, 이건 자신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 아닌가?
‘이럴 리가 없다! 놈이 이렇게 강할 리가 없어! 그때 알데마란을 쓰러뜨린 건 천외오천의 연정운이었잖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마틴은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진운이 알데마란을 상대로 겨우 버티다가 연정운이 결정타를 가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걸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틴은 이를 악물며 폭풍 같은 공세를 쏟아냈지만, 이진운은 그 모든 것을 피하거나 빗겨내면서 오히려 빈틈을 지적하였다.
“호흡이 거칠다. 호흡이 고르지 않으니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이렇게 빈틈이 생기지.”
퍽! 퍼억!
그가 지적할 때마다 빈틈을 정확히 공격해왔다. 손속에 사정을 둔 터라 별 타격은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틴의 높은 자존심은 사정없이 짓밟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전류의 힘도 그만큼 강해졌다.
파지지직!
막대한 전하가 마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얼마나 강렬하던지 이젠 전류의 단계를 넘어 플라즈마화에 가까워 보일 지경이었다.
“우오오오오!”
짐승 같은 괴성과 함께 마틴의 육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쏘아져왔다. 전자기력을 이용한 신체 가속! 이 정도면 거의 자기 자신을 탄환으로 삼은 레일 건이나 다름없었다.
콰아아앙!
음속을 돌파하면서 생겨난 충격파가 수련장 내부를 뒤흔들었다. 수련생들 중 일부는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수십 미터를 날아갈 정도였다.
전류에 휘감긴 채 공간을 일직선으로 질주하는 마틴의 모습은 마치 한 줄기 벼락같았다.
그리고 가로막는 모든 것을 꿰뚫고 나아갈 것 같은 마틴의 정면에는 이진운이 서 있었다.
그는 아예 피할 생각조차 없는 듯 보였다.
그 순간, 지켜보던 모두가 이진운의 죽음을 확신했다. 음속의 몇배가 넘는 저런 무지막지한 육탄 돌격을 맨몸으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이진운은 조용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정면에서 벼락처럼 쏘아져 오고 있는 마틴을 향했다.
그리고 이진운과 마틴이 서로 충돌하려던 그 순간, 이진운의 오른손이 먼저 마틴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콰아앙!
천지가 떠나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교육장 바닥이 거대한 크레이터를 이루며 내려앉았다.
끔찍한 결과를 예상하던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결과에 믿기지 않는다며 소리 질렀다.
“뭐, 뭐지!?”
“마틴이 멈춰서 있잖아?”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까지 가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그대로 멈춰서다니.”
“뭐야!? 그럼 음속의 몇 배나 되는 운동에너지가 다 상쇄된 거야, 지금!?”
이건 완전히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돌진하던 마틴의 가속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진운의 손이 닿는 순간, 극초음속에 달하던 막대한 관성에너지가 완전히 소실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본의 아니게 질주를 멈추게 된 마틴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어 물었다.
“···대체 뭐냐, 이건?”
“이화접목이란 거다. 이런 간단한 수도 모르면서 무슨 교관 자격을 따지고 들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랬다. 이진운은 마틴의 가슴팍에 손을 얹는 순간, 그의 모든 관성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그렇게 옮겨진 힘은 자신의 발밑으로 흘려보내서 지표면을 내려앉게 만든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괴물이구나, 너는.”
마틴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이 정도로 괴물이라고 불리기엔 아직 멀었지.”
어깨를 으쓱한 이진운은 마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싸울 전의 따윈 없어보였다. 아니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농락당했는데도, 싸울 마음이 든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마틴에게서 관심을 거둔 이진운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도 마틴과 같이 덤비지 그래? 교관 자격을 가지려면 어떤 실력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줄 테니 말이야.”
그러자 교육생들 중 마틴의 선동에 동조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움찔 놀라 물러섰다. 마틴이 저렇게 당하는 모습을 봤는데도 덤빌 수 있다면 정신 상태를 의심해 봐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면,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하지만 이 시간 이후로 내 교관직에 대해 자격 운운하는 자가 있다면 철저히 엄벌할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더 이상의 반발은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선 모두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그럼 이제부터 교육을 시작하겠다.”
사람들의 반발을 찍어누른 이진운은 곧바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가 준비한 교육은 무예에 대한 기초배양이었다.
이제 겨우 이능을 각성한 자들에게 복잡한 검술을 가르쳐 봐야 무의미할 뿐이다. 간단한 동작부터 시작해서, 공격과 방어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게 중요했다.
이것을 통해 공방을 주고받는 전투의 감각을 익힌 다음, 각자의 재능에 따라 좀 더 심화해서 가르칠 생각이었다.
* * *
“자, 조심해서 들여요. 그거 하나 망가지면 얼만지 알죠? 그거 다 아저씨들 책임이에요.”
“조··· 조심하겠습니다.”
교관 일을 마친 이진운은 아리엔과 함께 리스티의 공방으로 향했다. 프라이스 호 뿐만 아니라 관리국 내에도 그녀의 독자적인 공방이 존재하고 있었다.
헌데 오늘따라 그녀의 공방이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설비나 기계들을 잔뜩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진운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아! 왔어요, 아저씨!”
“무슨 이사라도 하는 분위기인데? 뭘 하는 거지?”
이진운의 물음에 리스티가 신이라도 난 듯 대답했다.
“고가의 연구설비랍니다아아. 아저씨하고 공동으로 연구하는 걸 만들려면 저런 설비들이 잔뜩 필요하거든요.”
“하긴 그런 걸 만드는데, 보통 설비가 필요한 게 아니겠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진운. 하지만 이런 고가의 설비를 대체 어디서 구입한 것일까?
아리엔도 그 점이 이상했던지 먼저 물어보았다.
“이게 모두 다 얼마야?”
“2억5천만 루벨.”
“뭐어!? 그런 거금이 어디서 난 거야? 설마 사채라도 쓴 건 아니겠지?”
아리엔은 깜짝 놀라 외쳤다. 2억 5천 루벨이면 어지간한 중형 전함 두 척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럴 리가. 내가 사채 같은 걸 왜 써? 내 돈도 충분한데 말이야. 이거 다 내 돈 주고 산 거야.”
“너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부자였던 거야?”
“꽤 오래 됐어.”
“가문에서 따로 물려받은 거라도 있었던 거야?”
리스티의 가문이 어떤 곳인지 잘 아는 아리엔이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리스티는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전부 내건데? 너도 알잖아. 내가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뭐? 그럼 대체 무슨 수로 네가 이 돈을?”
“내가 투자에 좀 재능이 있더라고. 그래서 돈을 좀 벌었어. 그 돈으로 회사와 연구소를 사고, 내가 개발한 것들을 만들게 했는데 그게 또 돈이 되더라. 그렇게 해서 몇 년 지나니까 이렇게까지 커진 거야.”
“······.”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무려 십년 가까이 친구로 지냈는데도, 정작 리스티에 대해 아는 게 이렇게나 없었다니. 그녀의 가문이 막대한 자산을 가진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리스티가 그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재력을 쌓았을 줄은 미처 몰랐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리스티가 이룬 부의 규모였다. 이건 일개 개인이 고작 몇 년 동안 쌓을 수 있는 재산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가진 회사가 큰 것들만 대충 이십여 개 정도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곳이 소레디안 컴퍼니야. 너도 이름 정도는 들어 봤을 거야. 나머지는 그것보다 조금 못한 곳들이고.”
“뭐, 소레디안 컴퍼니!? 말도 안 돼. 거긴 연합의 10대 기업 중 하나잖아!?”
친구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언급되자, 아리엔은 까무러칠 것 같이 놀라 외쳤다.
소레디안 컴퍼니는 10대 기업 중에서 가장 말석에 위치한 기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상까지 낮은 건 아니었다.
무려 일만에 가까운 행성들로 이루어져 연합 내에는 그만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기업들이 난립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10대 기업은 가히 무소불위에 가까운 힘을 발휘한다.
오죽하면 10대 기업들이 작은 기침소리만 내도 어지간한 행성정부들은 다들 벌벌 떤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겠는가.
그런데 그 10대 기업 중 하나가 리스티의 소유라고?
“에이, 그래봐야 고작 연합 내에서잖아. 우주에서 10대 기업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리스티의 간이 유독 큰 걸까, 아니면 가진 게 너무 많아지니 금전감각이 없어진 걸까?
생각하는 것부터가 자신 같은 범인과는 스케일이 전혀 달랐다. 연합 서열 10대 기업의 반열에 오른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투였다.
기막혀 하던 아리엔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시선이 자동으로 리스티 쪽으로 옮겨졌다.
“그러고 보니 소레디안 컴퍼니가 10위권의 기업이 된 건 최근이었지? 설마 너······!?”
본래 소레디안 컴퍼니는 만년 기업서열 1000위권 밖에서만 맴돌던 수많은 기업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최근 5년 동안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며 치고 올라오더니 기어이 10위권 말석의 자리까지 차지하였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발전동력의 핵심에는 근래 5년 동안 쏟아낸 신기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신기술들의 출처는 과연 어디일까?
그녀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던지, 리스티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난 그냥 내 방에 굴러다니던 기술 몇 가지를 던져줬을 뿐인데? 경영에는 크게 관여도 안 했어.”
“···기술 몇 개. 그게 문제였구나.”
아리엔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제야 대충 알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