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11화
“관리국장의 부관이 찾아왔었다고요?”
수련을 위해 찾아왔던 아리엔은 이진운이 말해준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라 외쳤다.
“그래, 날더러 검술교관을 하라고 제안을 해왔었다.”
“놀랍군요. 하긴 스승님의 실력이면 자격은 충분하고도 넘치죠. 그래도 국장 직속 부관이 직접 나서다니··· 관리국에서도 그만큼 스승님을 높게 평가하고 있단 거군요.”
“그래서 몇 가지 조건을 걸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진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관리국으로부터 얻어낸 것들을 아리엔과 클레브에게 간단히 알려주었다.
다 듣고 난 아리엔의 두 눈이 동요에 젖어 크게 흔들렸다. 검술교관 제안을 받아들인 대가로 제공받는 것들이 너무 엄청나서였다. 일개 소환자가 제안 받을만한 대가가 아닌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조건들이군요. 대체 스승님은 그걸로 뭘 어쩌실 생각인 거죠?”
묻는 그 말에, 이진운은 솔직히 대답했다.
“앞으로 난 이곳에서 나름대로 세력을 만들어 키울 생각이다.”
“세력··· 말입니까?”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난데없이 세력이라니!
너무 놀란 나머지 되묻는 클레브의 음성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연합해서 말한 대로라면 이미 지구는 인베이더의 침략 가시권에 접어든 상황이지. 이제 남은 기간이 대충 10년 정도라고? 이런데 내가 공을 세워 지구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 더 도망갈 수도 없으니 결국 놈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날이 다시 찾아오겠지.”
“······.”
“그래서 생각했다. 차라리 여기서 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세력을 일궈서 인베이더에 대적할 힘을 기르자고. 그래서 단순히 일개 개인으로서 싸우는 게 아니라, 내 세력을 거느리고 주도적으로 싸우려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 해도 벅찬 상황이거늘, 이진운은 벌써부터 지금 이후의 먼 장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엄청납니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이미 연합에는 여러 세력들이 중추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지요. 관리국이 돕는다 해도 스승님이 원하는 세력을 키우려면 돈도 돈이지만 막대한 힘이 필요할 겁니다. 기존 세력들의 견제와 반발을 누를만한 힘이 말입니다.”
클레브가 조심스럽게 실현 가능성을 묻자, 이진운은 픽 웃으며 말했다.
“힘이라. 솔직히 나 혼자라면 얼마든지 강해질 자신이 있다. 천외오천?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아니, 그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어. 하지만 혼자서 강해져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적다. 내 몸은 어디까지나 하나니까. 그래서 세력이 필요한 거다. 이 전쟁의 판도를 확실히 뒤바꿀 수 있는 그런 힘이!”
“으음···.”
자신만만한 그 말에 클레브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천외오천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정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기존 세력들의 견제나 반발 따윈 우습게 찍어 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클레브도 이진운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기에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결정했지만, 정말로 천외오천 급의 강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약간의 회의감을 느꼈다.
전황을 뒤흔들 수 있는 그랜드 급의 강자는 재능과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그럴만한 운명을 타고나야 가능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지금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말한 재력 또한 마찬가지다. 관리국도 날 돕기로 했고, 내 나름대로의 계획도 서 있지. 계획대로만 된다면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세상사가 다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이진운의 계획은 너무도 장황하고 방대했다. 설마 그가 이런 스케일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아리엔과 클레브는 전율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생각하는 것부터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알데마란을 상대로 보여준 강함도 놀라웠지만, 불과 이주일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런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치밀함이 더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몇 가지 구체적인 계획이 서 있다. 그걸 너와 리스티의 도움이 필요해.”
“저와 리스티가요?”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아리엔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너희 웰라우드의 도움이 필요하지.”
“저희 가문 말인가요?”
이진운의 입에서 가문의 이름이 언급되자 아리엔의 안색이 살짝 흐려졌다.
“도와드리고는 싶지만, 솔직히 말해 저희 가문은 스승님께 큰 도움이 못될 거예요. 게다가 가문의 일을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고요.”
“잘 알고 있다. 몰락했다는 걸.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구축해온 세력이 단숨에 무너지진 않는 법이지. 기존의 인맥도 어느 정도 살아 있을 것이고, 웰라우드 가에 속해 있던 수많은 분파들도 대부분 건재하고 있을 텐데?”
“음, 그건 그렇죠. 아주 망한 건 아니니까요.”
지금도 웰라우드의 지부들은 연합의 각 행성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예전에 비한다면 몰락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무가들에 비해 접하기 친숙하고, 입문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웰라우드 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한번 너희 본가에 연락을 해 봐라. 내가 새로운 문파를 세우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말이야.”
이진운이 아리엔에게 제안을 던졌지만, 그녀는 짧은 고민 끝에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가 자신의 스승이라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휴, 아무리 제가 스승님의 제자가 됐어도 쉽진 않을 거예요. 웰라우드 가가 반쯤 망하긴 했어도, 단순 규모만 따지면 여전히 크거든요. 비교 대상들이 워낙 거대 세력이라 어렵다고 한 거지, 지금도 그렇게 작은 규모는 아니라고요. 그런 가문인데 저의 개인적인 친분이나 인맥 정도로 가문의 대사를 결정하긴 어려워요. 설령 제가 가주의 딸이라 해도 말이죠.”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가문의 핏줄이라 해도, 거대 세력을 이끄는 자라면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대사를 결정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진운도 웰라우드 가를 움직일만한 반대급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나도 이해한다. 네 말대로 웰라우드 가가 일개 개인인 나와 손잡는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겠지.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아리엔을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은 그가 충격적인 조건을 던져왔다.
“지금은 핵심을 잃어버린 웰라우드 류의 복원. 그 정도면 어떨까? 이걸 거래 대상으로 올려놓지. 거기다가 수련 중에 쓰러지셨다는 네 아버지도 내가 치료해주겠다. 어떠냐, 이 정도면 너희 가문 입장에서도 꽤 괜찮은 조건이지?”
“!!”
아리엔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웰라우드 류의 복원에 대해선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어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적극 협력이라는 제안만 하고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확실한 거래 대상에 올리겠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 문제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무리한 수련으로 영맥이 꼬여 쓰러진 아버지의 증상은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정을 받았는데··· 정말로 그걸 치료할 수 있다고?
그녀가 동요로 가득 찬 어조로 물었다.
“스승님, 지금 그 말 진심이시죠?”
“그래. 거짓말 따윈 일절 없지.”
“그게 정말로 가능한가요?”
“충분히 가능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라면 가능해.”
거듭된 물음에도, 이진운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해주었다.
“아······!”
단언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리엔은 저도 모르게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두 귀로 듣고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눈앞의 현실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승이 허언을 할 사람도 아니니, 그의 제안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때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진운이 당시 내걸은 조건이 바로 웰라우드 가의 적극 협력이었다. 당시에는 왜 이런 애매한 조건을 걸었나 싶었는데, 그때부터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웰라우드 가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게 틀림없었다.
“이미 웰라우드 류의 근본과 핵심은 너를 통해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복원하는 건 말 그대로 시간문제지. 아마 우리가 훈련을 마칠 때면 가능할 것 같군.”
아리엔은 그대로 왈칵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그녀와 가문이 겪은 수모와 고생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떠올라서였다.
그녀는 메어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정말이라면, 가문에서도 스승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충분히 가능해요.”
“그럼 한번 연락을 해 봐라.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언제든 완전한 웰라우드 류를 돌려줄 테니까.”
“예, 곧 그렇게 하겠어요.”
아리엔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머릿속으로 확신했다. 웰라우드 가는 이진운의 제안을 절대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설령 그 대가가 가문을 위태롭게 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잃어버린 웰라우드 류야말로 웰라우드 가의 전성기를 만들어내었던 모든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웰라우드 가의 유일한 마스터 급(A랭크) 실력자인 가주를 다시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잃어버렸던 가문의 위상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 *
지구인들이 관리국의 교육기관에 입소한 다음날부터 교육은 시작되었다.
앞으로 6개월 이후부터는 실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러니 어떤 전투 상황에서든 대응할 수 있도록 철저한 교육이 필요했다.
그래서 관리국에서는 이론과 실전을 병행해 가면서 지구인들을 철저히 스파르타 식으로 가르쳤다.
인베이더와의 전투에서 실수는 곧 죽음이었다.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이기 위해선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육체와 정신적으로 고된 나날이 이어졌지만, 지구인들은 이를 악물고 버텨내었다. 사실 이건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 낯선 곳에 끌려와 영문도 모르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다 보면 정신적으로 미치거나, 이상을 보이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이진운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리엔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스템이 정신력을 강화시켜준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이진운이야 전생의 경험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문제가 생겨도 벌써 생겼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훈련을 거듭하면서 점점 강해져갔다. 괄목상대라는 말이 정말 어울릴 정도였다.
이런 걸 보면 수련과 학습으로도 레벨 업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신기할 정도에 불과했던 이능들도, 이젠 정말 살상력을 가질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래봐야 내 눈엔 여전히 재롱 수준이지만.’
물론 이진운도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몇 번의 수련 끝에 그도 어느덧 다음 단계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가 자연스럽게 검을 늘어뜨리자, 검 끝에 서린 기운이 길게 솟구쳤다.
영롱하기까지 한 예리한 광망!
그것은 바로 검기였다.
검기를 뽑아낸 이진운이 전면에 있던 다수의 표적들을 향해 움직였다.
피리릭!
대기를 가르는 작은 파공성과 함께 검기가 종횡무진으로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가 다시 검을 거뒀을 땐, 손톱만한 금속 구체로 만들어진 표적들이 전부 분쇄되어 있었다.
“이제야 겨우 최절정인가. 아직도 멀었군.”
이진운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기를 뽑아내는 것을 넘어 검기 자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경지. 이쯤 되면, 검기로 사람을 다치지 않고 점혈하는 것조차 가능했다.
지난 2개월 간의 훈련으로 이룬 것치고는 빠른 성취였지만, 이진운의 마음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았다.
원래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초절정의 벽을 넘어섰어야 했으니까.
‘젠장, 영약이 안 먹힌다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본래대로였다면 관리국을 통해 영약을 제공받아 내공을 빠르게 늘린 다음, 경지를 바로 높여버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뭐가 문제인지 영약이 흡수가 되질 않았다. 마치 신체가 영약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시험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영약의 종류를 달리 해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신외지물에 깃든 기운을 몸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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