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5화 (36/448)

2권-10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교관직을 거절하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 이진운의 고민을 눈치 챈 필리스가 슬며시 반대급부를 올려놓는다.

“대신, 검술 교관직을 맡게 되신다면, 저희도 각종 특혜를 제공하겠습니다. 저희 관리국이 제공해드릴 수 있는 특혜는 아주 많지요.”

“특혜? 고작 교관직 하나 맡는 정도로?”

이진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묻자, 필리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희는 이진운 씨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레벨 업을 못하는 반쪽짜린데도?”

“시스템의 레벨 업은 어디까지나 성장을 보조하고 가속화 해주는 거지, 재능 없는 자를 강제로 끌어올려주지는 못합니다. 강함을 보장해주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요.”

그건 좀 의아하게 들렸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대로라면 아르탈 행성 연합 사람들은 레벨 업을 무척이나 중요시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건 좀 뜻밖이군요. 레벨 업 만능 주의인줄 알았는데. 처음 레벨 업 불가라는 걸 봤을 때만 해도 다들 날 폐급 취급하더군요.”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관리국에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역사와 기록이 아직 남아 있지요. 그 때는 이능을 성장시키려면 오직 재능과 노력뿐이었습니다. 물론 체계적인 지식과 훈련도 습득해야 했고요. 시스템은 그런 과정들을 레벨 업이란 형태로 아주 간략화 시켜줬을 뿐, 없는 재능을 주는 건 아니죠. 그래서 일정 레벨 이상은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겁니다.”

“호오, 게임처럼 적들을 때려잡는다고 무조건 레벨 업 해서 성장하는 게 아니었군요.”

“예, 정말 그랬다면 저희 연합은 오래 전에 인베이더들을 격멸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게 안 되니 지금처럼 지지부진하게 밀고 밀리는 전쟁만 하고 있는 거지요. 그만큼 시스템의 레벨 업엔 드러난 장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외에도 보이지 않는 단점들도 꽤나 많지요.”

무겁게 한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만큼 인베이더와의 세력전이 꽤나 힘든 상황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덕분에 레벨 업에 대한 실체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다른 단점이라면?”

“뭐, 간단합니다. 너무 급격히 성장하는 바람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을 무심코 넘겨버리게 되거든요. 그 결과, 깨달음이 필요한 벽에 마주쳤을 때 그걸 자력으로 넘어서지 못하게 됩니다. 시스템의 성장 방식에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생기는 가장 큰 폐단이지요.”

“그건 처음 듣는 소리군요. 레벨 업에도 깨달음이 필요하다니.”

“예, 필요합니다. 제아무리 시스템이라 해도 이걸 강제로 얻게 해줄 순 없으니까요.”

“하긴, 그럴 것 같았습니다.”

이진운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하긴 시스템의 레벨 업이라는 게 그렇게 편리하기만 했다면, 천외오천 급의 강자가 수두룩했을 것이다.

“시스템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지금의 경지까지 깨달은 이진운 씨라면 이미 아시겠지만··· 어느 정도 수련하다 보면 일정 구간마다 성장을 가로막는 어떤 벽이 존재합니다. 레벨 업도 마찬가지지요. 일정 레벨에 도달하고 나면 그 다음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학습과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이걸 넘지 못하면 레벨 업은 당연히 정체되지요. 이 점에 대해선 오히려 이진운 씨가 더 잘 아시리라 생각되는군요.”

그 말에 이진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비슷한 경우는 중원 무림에서도 많이 봐 왔었으니까.

특히 명문가의 후예들이 그랬다. 가문에서 제공하는 수많은 영약과 비급, 그리고 개정대법 등으로 초반에는 빠르고 쉽게 강해질 수 있었지만, 그만큼 기초를 등한시 하면서 오히려 오랫동안 정체되는 경우도 적잖았던 것이다.

아마 레벨 업이란 것도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적당히 이용하면 빠르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여기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안 된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진운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저희는 이진운 씨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흐음, 어느 정도로 보는 거요?”

“적어도 마이스터 급. 최대는 그랜드 급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이스터 급이라면 S랭크였고, 그랜드 급은 그보다 한 단계 위인 U랭크다. 관리국에서는 이진운을 거의 천외오천과 거의 동급의 잠재력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고평가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설마 이 숙소도?”

“예, 이 숙소도 그런 의미로 배정해 드린 것이죠. 다른 교육생들과 달리, 이건 최고급 VIP용 객실입니다.”

“어째 너무 좋고 화려하더라니······.”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역시 필요 이상으로 대접이 좋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원하신다면 많은 것을 지원해 드릴 생각입니다. 수련에 필요한 것이나 재화, 그리고 전용 전함도 제공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전함까지?”

“일단은 중형 전함까지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조금 더 강해지시고, 전공까지 세우신다면 준대형이나 그 이상도 제공해드릴 수 있지요.”

준대형이면 이진운이 이곳까지 타고 온 프라이스 호와 동급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까지 가능하다면 이건 일개 개인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반대급부가 아니었다.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진운씨는 장래의 천외오천 급입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 투자는 사실 별 거 아니죠.”

이진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조건을 제시하는 걸 보면, 그만큼 강력한 전력 충당이 시급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그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계산이 선 이진운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제게 기대를 하신다니, 저도 일단 조건을 내놔 보지요.”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협상의 시작이었다.

* * *

세 시간 뒤. 이진운과 필리스는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야 겨우 협상이 타결된 것이다. 그동안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해온 필리스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절 상대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뜯어 가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과찬입니다. 저는 정당하게 협상에 응했을 뿐이니까요.”

필리스는 시치미 뚝 떼고 대답하는 이진운의 모습이 너무도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만큼 관리국을 상대로 무지막지한 대가를 우려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천외오천에게 제공하는 대가라면 아깝지 않겠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성장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시기였다. 정말로 천외오천급 강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이 시점에서 이만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필리스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베네트가 이렇게 지시를 내렸으니까. 부관인 입장에서는 따르는 수밖에.

“아무튼 급히 필요하다고 요구하신 것들은 며칠 내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밖에 것들은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뭐, 괜찮습니다. 아직 교육 기간도 안 끝났으니까요. 그때까지만 다 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필리스는 이진운의 숙소를 나섰다. 협상도 마쳤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필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 이진운이 문득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군요.”

“얼마든지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로 대답하는 필리스. 또 뭔가 추가로 요구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안감과 달리 이진운은 숙소의 벽 중앙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저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초상화요?”

필리스가 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해 한단 말인가?

이진운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오늘 처음 보는 그림인데, 어디서 많이 봐온 것만 같은 그런 묘한 느낌이랄까.

처음에는 그냥 기분 탓이라고 치부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스가 초상화의 인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그림은 저희 아르탈 행성 연합이 성립할 수 있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신 [제노디안 리피라이터]님이십니다. 저희 이능관리국의 초대 국장이셨기도 하고요.”

“그런가요? 처음 연합을 세운 건 여신 루네리아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여신께서 세우긴 했지만, 그분은 어디까지나 상징이자 구심점이셨지요. 실질적으로 연합의 형태와 체계를 구축하신 건 제노디안 님이셨습니다.”

“그렇군요. 대단하신 분인가 봅니다.”

“예.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지금의 연합이 이뤄낸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행정은 물론 검술, 마법, 정령술, 그리고 마도공학에 이르기까지··· 그분이 손이 닿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만능이셨죠. 신은 아니셨지만, 그에 버금가는 강자이시기도 했고요.”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연합의 실질적인 설립자란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고작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분야를 다 통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최고 수준으로?

무공 하나만으로도 겨우 반선지경에 도달한 이진운으로서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무슨 건국신화에 나오는 과장된 숭배 같은 건가?’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지요. 언젠가부터 조용히 사라지신 뒤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관리국 내에서는 그분이 언젠가 다시 되돌아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거라는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도 제법 많지요.”

“그렇군요.”

필리스의 말에 겉으로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이진운은 내심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런 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안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1000년 전의 인물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았다.

‘제노디안 리피라이터라.’

무척이나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전생 시절은 물론 현생에서도 색목인은 몇 번 본적도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친숙하게 들리는 것일까?

* * *

여신교단은 이능관리국 이상으로 강대한 세력을 가졌으면서도, 오랫동안 은인자중해온 곳이었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활동하는 사제나 신도들과 달리, 교단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아르탈 행성 내에 존재하는 교단의 성지.

아름답게 세워진 교단의 테라스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네리아. 범우주적인 종교단체인 여신교단에 속한 이들로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한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나타났다.

“여신이시여. 그분을 뵙지 않으시렵니까?”

사내의 말에, 여신은 깊게 시름에 찬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좀 더 기다려야 해요.”

“그토록 기다리셨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목소리로 묻는 그 말에, 여신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괜찮아요. 이미 오래 기다렸잖아요. 그래봐야 앞으로 몇 년 정도일 텐데, 그 정도는 충분히 더 기다릴 수 있어요.”

그리고는 저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제 저 하늘 너머의 우주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터.

그녀는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1000년의 기다림이 끝날 날도 이제 머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시련에 대비해야 해요.”

“예,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대비하고 있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여신은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도 베르다인. 그대는 나를 섬기는 영광의 홀. 보이지 않게 그를 도우세요. 제 뜻입니다.”

“모든 것은 여신의 뜻대로 될 겁니다.”

여신을 대신해 교단을 움직이는 사도, 베르다인은 그렇게 화답하면서 그녀의 뜻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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