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06화
이진운은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도 이 상황을 아주 예상 못했던 건 아니었다. 클레브를 제자로 받았을 때부터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진전이 없던 클레브는 이진운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 불과 며칠 만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허나 더 놀라운 건 이진운이었다. 비록 하나에 국한되긴 했어도, 지금은 본 모습을 잃어버린 웰라우드 류의 위진을 복원해냈음은 물론 진멸 급인 알데마란을 고작 검 한 자루로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서로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자신이 아리엔이라 해도 이렇게 나왔을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본 이진운이 조용히 답했다.
“일단은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아리엔도 이에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의 말처럼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언급할 사안은 아니었다.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전장만 무려 수km에 달하는 프라이스 호에는 남는 방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남들이 듣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밀실도 여럿 존재했다.
감청이나 감시도 없을뿐더러, 전함의 메인 시스템에도 전혀 기록이 남지 않는 이곳에 이진운과 아리엔은 단 둘이 마주앉았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진운이었다.
“널 내 제자로 받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클레브는 너희 무가의 일개 수련생 신분이라서 받아줬지만, 아리엔 넌 입장이 전혀 다르잖아.”
“예, 알고 있어요.”
그 말뜻을 알아들은 아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웰라우드 가의 일개 문도가 아니었다. 웰라우드 가주의 단 둘밖에 없는 딸들 중 차녀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런 아리엔이 가문을 버리고 타 문파에 몸담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진운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나는 지구에서 발원했던 고대의 무문인 점창의 맥을 잇고 있다. 지금은 일인단맥으로 이어져 내 대에 이르렀지만, 본래는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던 대 문파였지. 그래서 비전의 관리에 대해서도 철저한 편이다.”
이야기가 문파의 비전에 이르자 이진운은 눈빛과 말투도 자연 날이 섰다.
“그래서 미리 말해두겠는데, 혹시라도 내게 배운 것을 가지고 가문을 되살릴 생각이라면 큰 오산이라고 해두마. 난 그런 일은 절대 참고 넘어가지 않는다.”
이건 그가 아리엔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였다.
그렇지만 아리엔도 그런 허튼 짓을 할 생각으로 제자가 되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선 걱정 마세요. 이진운 씨가 절 제자로 받아주신다면 비전을 유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단지 배운 것을 소화한 뒤, 실력을 쌓아서 제 나름대로 본가의 운용법을 복원할 계획이었죠.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복원 과정에 본문의 비전 일부가 섞여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면 제가 복원한 부분을 이진운 씨에게 직접 사전에 검토를 받지요. 그러면 될까요?”
이진운이 슬쩍 우려의 말을 내놓았지만, 아리엔은 모든 걸 숨김없이 드러내놓겠다는 정면 돌파 안을 제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녀를 제자로 받지 않을 명분이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내 제자가 되려는 거지?”
이진운이 이유를 묻자, 잠시 한숨을 내쉰 아리엔이 어렵사리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진운 씨도 클레브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저희 웰라우드 가는 백여 년 전부터 몰락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고요. 비전의 핵심 운용법을 잃어버린 게 문제였죠.”
그녀는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밑바닥을 모르고 한없이 몰락해가는 가문의 현실. 그리고 예전의 명성과 영광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가족들.
윗대의 선조들로부터 시작된 몰락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는 가문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 옛날 웰라우드 가의 명성과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고, 완전치 못한 웰라우드 류를 복원하겠다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수련해왔다.
그 결과 남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정식 오버러가 되었고, 지금은 강화병단의 대장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노력들을 모두가 비웃고 손가락질했다. 타인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몰락한 무가라는 꼬리표만 여전히 따라다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조금씩 가문의 입지가 나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이어진 웰라우드 가의 불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가문의 위세를 되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수련에 매진하던 아버지가 돌연 영맥이 꼬이면서 반신불수에 가까운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그 이후, 겨우 나락에서 벗어나려던 가문은 더욱 수렁에 빠져들었다. 가문을 대표하는 몇 안되는 강자인 아리엔의 아버지가 그렇게 되니, 웰라우드 가에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아리엔은 더 피나는 노력을 쏟았다.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지금의 웰라우드 가를 이끌 수 있는 강자가 되기 위해서.
그렇지만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넘어야 할 경지는 아직도 아득한데 수련에 진척이 없었다.
가문에 남아 있는 비전의 불완전함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재능에 벌써 한계가 온 걸까?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 됐든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아리엔은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다. 수련은 습관처럼 꾸준히 했지만, 진척은 여전히 없었다.
그러던 와중 지구에서 소환된 이진운을 보게 되었다.
시작부터 6급에 이르는 체화스킬을 터득해 사람을 놀라게 한 그는, 모두가 둔재라고 평가한 클레브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검술로 알데마란을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아리엔은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이렇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진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 알겠다. 네 목표는 바로 일대종사가 되는 거였구나.”
단순히 점창의 비전을 노리고 접근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진운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상에 우뚝 설 수 있는 무(武)를 이룩한 다음, 스스로의 힘으로 가문의 비전을 복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은 길이야. 그만한 경지에 오르려면 재능이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려줘야 하지. 게다가 너희 가문에서도 타문파의 제자가 된 널 비난할지도 모른다.”
“상관없어요.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가족들도 그런 절 이해해 줄 거라 믿어요.”
결연하기까지 한 태도.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꺾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눈빛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아리엔의 확고한 각오를 들은 이진운은 결단을 내렸다.
“좋다, 그런 각오라면 나도 널 받아들이겠다. 이제부터 넌 점창의 제자다.”
“저···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제자로 받아준다는 허락에 깜짝 놀란 아리엔은 금세 울 것 같은 얼굴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나름대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허락을 받고 나니 감정이 북받쳐 온 모양이었다.
“아무튼 비전에 대한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자. 본문의 비전을 함부로 유출할 수는 없지만, 명색이 둘 밖에 없는 제자인데 그냥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말한 이진운은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새로운 제자를 받았으니 이젠 가르침을 내려야 할 때였다.
* * *
“예? 대장님이 스승님의 제자가 됐다고요?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이진운의 숙소를 방문한 클레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깜짝 놀라 외쳤다.
설마 아리엔이 이진운의 제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서였다.
클레브는 아리엔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사범님!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가문은 어쩌시려고요.”
“내가 아니더라도 언니가 있잖아. 충분히 잘 해줄 거야.”
“그래도 그렇죠. 저는 그냥 일개 문도에 불과하지만 사범님은 웰라우드 가의 직계인데, 이렇게 타 문파에 몸담아도 괜찮겠어요? 사람들에게 앞으로 무슨 소릴 들을지······.”
클레브가 앞으로 그녀가 듣게 될 비난을 우려했지만, 아리엔의 의지는 변치 않을 만큼 견고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 배신자라 손가락질해도 참고 견딜 거야.”
“휴, 어쩔 수가 없군요.”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클레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결정으로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걱정되기만 했다.
그때, 이진운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문제야 어쨌든 위계질서부터 바로 잡자. 이제부터 클레브 네가 대사형이다. 아리엔보다 먼저 입문했으니 당연한 거지.”
“제··· 제가 말입니까?”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클레브. 이진운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여긴 웰라우드 가가 아니야. 너희는 이제 점창파의 제자들이지. 이전의 상하관계는 아무 상관없다.”
“그래도 그렇죠. 제가 어떻게······.”
클레브에게 있어 아리엔은 자신에게 가르침을 내려준 스승과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사제관계를 맺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사범으로서 문도인 클레브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버렸으니, 당혹스러울만도 했다.
오히려 아리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전 괜찮아요. 사형. 앞으로 사형이라 부를게요.”
“으윽··· 사범님.”
“사범이 아니라 사매에요. 앞으론 그렇게 불러줘요. 아니면 이름을 불러줘도 좋고요.”
클레브가 이번엔 이진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좀 해줬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의 태도는 단호했다.
“클레브, 갑자기 바뀌어서 당황스럽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너도 익숙해져라. 이제 네가 대사형이다. 아리엔의 명백한 윗사람이지. 거기에 적응 못하면, 점창의 제자의 자격이 없다.”
“···알겠습니다.”
결국 클레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점창의 제자로 계속 있으려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런 클레브에게 이진운이 덧붙여 말했다.
“일단 오늘은 너 혼자 수련해라. 나는 아리엔을 좀 봐줘야겠다.”
“예.”
클레브도 어느 정도 기초를 배운 터라 하루 정도는 혼자 수련할 수 있었다. 숙소 한 쪽에 가서 자세를 잡는 그를 뒤로한 이진운은 아리엔을 보면서 말했다.
“일단은 네 상태부터 살피자.”
이진운은 아리엔의 맥문을 잡고 진기를 흘려 넣어 몸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몸 상태는 꽤 좋은 편이었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수련해 와서 그런지, 탁기도 적었고 혈도와 경락도 막힌 곳이 적었다.
게다가 내부에 축적되어 있는 진기의 양도 클레브의 몇 배나 되었다.
‘내공으로 환산한다면 적어도 일 갑자 이상은 되겠군.’
단전 없이 기운이 몸 전체에 분산되어 있어 정확한 측정은 어려웠지만, 적어도 그 이상일 것이다.
‘클레브보다는 가르치는 게 쉽겠는데.’
현재 아리엔의 경지는 일류 수준. 그동안 절정의 벽에 막혀 헤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자신이 조금만 가르쳐도 그 정도 경지는 금방 뛰어넘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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