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05화
숙소로 돌아온 이진운은 몸을 움직여 하는 훈련을 최소로 줄이고 운기조식에만 집중했다.
무리하게 단계를 뛰어넘으면서 내부가 많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전투후유증까지 겹쳤으니 몸 상태는 가히 최악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요상결로 내상을 다스리는 한편, 갑작스럽게 타통한 전신 혈도와 경맥을 조금씩 강화시켜 나갔다.
사실 이번에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제대로 주화입마나 혈맥이 터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혈도 타통에 성공했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타통된 경맥과 혈도들은 너무도 연약했다. 이제부터는 이것들을 단련해 나가면서 차근차근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내공은 일 갑자 수준에 접어들었다. 무위도 절정 초입에 이르렀고. 하지만 아직 멀었어.’
어제 봤던 연정운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시스템 창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갖가지 능력치들이 크게 상승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단계를 뛰어넘으면서 생긴 변화일 것이다.
‘역시··· 레벨 업이 불가능하다 해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군. 수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게 되어 있어.’
덕분에 이진운은 오로라 시스템에 대해 보다 확실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이란 건 영능력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조적 커러큘럼에 가깝다. 자신의 현재 능력을 직관적으로 확인하고, 레벨 업이란 형태로 수련 목표를 제시함으로서 빠르게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해놨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편리하고 직관적인 만큼, 시스템에 대한 의존성도 자연스럽게 높아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아르탈 행성 연합의 사람들이 시스템에 의한 레벨 업이 아니면 강해질 수 없다고 단정 짓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의존하지 않아도 강해질 길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의 나처럼.’
물론 이 길은 시스템의 힘을 빌리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험난하다.
그렇지만 애당초 그는 시스템의 도움 따윈 필요 없었다.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는 전생 시절 그 누구보다 더 높은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때의 경험과 깨달음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지금, 시스템의 도움 따위가 없어도 그 누구보다 강해질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체화스킬 란이 뭔가 달라진 것이 보였다.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공들이 등록되어 있었다.
*만유합원신기(萬有合原神氣)(U급) : C랭크(1성)
*현천진기(玄天眞氣)(4급) : C+랭크(4성)
알데마란과 싸우던 중 처음으로 만유합원신기와 현천진기를 운용했을 때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올랐던 걸 기억했다. 그 당시엔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무시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때 사용한 무공들이 전부 등록되어 있는 상태였다.
‘알아보기 쉬워서 좋군. 레벨 업은 불가능해도, 이런 기능들은 여전히 작동을 한다 이건가?’
문제는 두 무공의 성취였다.
현천진기는 초입 단계를 넘어 단숨에 중반에 다가가고 있는 수준이었고, 내공은 일 갑자를 간신히 넘어섰다. 그 다음부터는 앞으로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반면 만유합원신기는 고작 입문 단계에서 별달리 진척이 없었다.
‘본디 만유합원신기는 중단전을 넘어 상단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신공이다. 그렇다면 그 쪽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본디 만유합원신기는 외부의 기운을 무한정 받아들여서 자신의 힘으로 삼는 신공절학. 그래서 전생 시절의 이진운은 가히 메마르지 않는 막대한 내공으로 적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틀렸어. 운기조식 때 외부의 기운을 더 많이 받아들여서 축기의 효율을 더 높이는 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좀 어렵겠어.’
몇 차례 시험해 봤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부문에서 제어가 불안정했다. 전생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일정 한도 이상 받아들이면 기운들이 제어를 벗어나 폭주할 것만 같았다.
‘이래선 제대로 다룰 수가 없겠어.’
현재 그가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는 양은 일 갑자 남짓. 현재 그의 내공 보유량과 일치했다.
‘이건 마치 수도꼭지 같군.’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외부의 공급을 끊지 않는 한 무한정이지만, 대신 한 번에 나올 수 있는 배수양은 한정되어 있는 법.
이진운의 내공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단전의 그릇이 1갑자인 이상, 제아무리 만유합원신기를 운용한다 해도 그가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은 1갑자를 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아무튼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이니··· 지금으로선 이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1갑자 내에서라면 적어도 내공이 마를 일은 없을 테니까.’
이진운은 아쉬움을 삼키며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숙소를 나선 이진운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내공까지 사용해 청력을 돋우자, 그들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지?”
“맞아. 그때 그 사람이야. 분명해!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 괴물 같은 알데마란과 대등하게 싸워서 쓰러뜨렸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아.”
“정말 우리와 같은 지구인이 맞긴 한 거야? 어디 다른 성계의 외계인 같은 게 아니고?”
“아르탈 행성 연합의 고위층 인사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이야기도 있어.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혼외자식이라서 지구인으로 신분을 위장했다는 것 같던데.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들었어.”
“아아, 그래서 말도 안 되게 강했던 거구나.”
이진운은 하도 기가 막혀서 화도 내지 못하고 헛웃음만 흘렸다. 자신에 대해 온갖 억측과 의혹이 난무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음모론까지 떠돌고 있었다.
‘외계인 취급도 모자라 고아출신인 날더러 이젠 혼외자식이라니···. 기가 막혀서 아주 돌아가시겠군.’
그렇다고 따지기도 뭣해 그냥 못 들은 척 넘어가기로 했다. 저들도 자신의 귀에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맘 놓고 입방아를 찧는 것 같은데, 괜한 시빗거리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이진운 씨, 어디 가세요?”
뒤돌아서보니 말을 걸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아리엔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이진운은 별 생각 없이 답했다.
“누군가 했더니 아리엔 너였구나. 마침 때가 되어서 식사하러 가던 참이었지.”
“그래요? 음···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뭐? 식사를?”
그녀의 난데없는 제안에 이진운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식사합석이라니.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무슨 생각인가 싶어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니, 자신에게 어떤 용건이 있는 듯 보였다.
“어차피 저도 식사할 때가 되어서요. 혹시 저하고 같이 가는 게 싫으세요?”
“그런 건 아닌데, 조금 갑작스러워서.”
“싫은 게 아니라면 됐네요. 자, 그럼 가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따로 가자고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자신을 슬그머니 잡아끄는 아리엔의 행동에 이진운은 저도 모르게 이끌려 따라가고 말았다.
* * *
프라이스 호의 구내식당은 모든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직책이 높든 낮든, 긴급한 일이 있거나 거동 못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식사는 무조건 이곳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저녁식사 시간인 지금, 구내식당 내부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진운과 아리엔이 구내식당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리엔 대장이잖아?”
“그런데 오늘은 저 사람이 함께 있어.”
“맞지, 그 사람?”
“그때 그 액체인간 놈을 쓰러뜨렸던!”
이진운은 프라이스 호 내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지구에서 소환된 지 얼마 안됐으면서도, 인베이더들을 단숨에 휩쓸고도 모자라 그렇게까지 강력하던 알데마란까지 쓰러뜨린 모습은 모두에게 인상 깊게 남았으니까.
물론 소행성을 한 방에 날려버린 연정운의 등장으로 그 색이 좀 바라긴 했지만, 그가 세운 공이 단연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괜히 실력을 드러내서 귀찮게 됐군.”
이진운은 작게 툴툴거렸다. 최근 들어 사람들의 불필요한 관심 때문에 여러모로 거북한 상태였다. 어떤 이들은 다가와서 사인을 해달라는 이도 있었고, 강해진 비결이 뭐냐고 공유 좀 해달라고 무례하게 묻기도 했다.
심지어 질투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진운을 연정운과 비교하면서,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놓고 폄하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지금도 그를 얕잡아보거나 연정운이 세운 공에 묻어갔다는 등 말도 안 되는 억지성 비난과 음해도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들려왔다.
‘유명해져봐야 좋은 점보다는 안 좋은 점이 더 많지. 괜히 같잖은 것들의 시기질투까지 한 몸에 받게 되었잖아.’
그래도 이 정도인 게 다행이었다. 천외오천인 연정운이 사람들의 관심 중 상당수를 가져가지 않았으면 더 귀찮아졌을 테니까.
그렇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관점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이진운의 눈치를 보던 아리엔이 슬그머니 말을 걸어왔다.
“조금 아쉽거나 억울하지 않으세요?”
“무슨 소리야?”
“사실 지난번 전투에서 이진운 씨가 세운 수훈은 갑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연정운 씨의 압도적인 모습에 상당수 희석되어 묻혀버렸죠. 그래서 저런 얼토당토 않는 말들도 나도는 거고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정운만 아니었다면 그 모든 조명은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던 이진운이 홀로 받았을 테니까.
‘뭐지, 이 녀석?’
이진운은 조금 묘한 표정으로 아리엔을 바라보았다. 당사자인 자신보다 그녀가 더 분개하는 듯해서였다. 겉으로 크게 드러내진 않았지만, 말투와 눈빛 속에서 그녀의 감정을 확실히 읽어냈다.
‘평소엔 제법 어른스럽더니, 아직 어리긴 어린 모양이군. 내가 조금 불합리한 취급을 당한다고 해서 화를 내는 걸 보면 말이야.’
그래서 그런 아리엔이 한층 더 마음에 들었다. 타인이 처한 입장에 대해 깊게 공감하고 분노해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억울하지 않냐고?”
“예.”
진지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해오는 아리엔. 그래서 이진운도 솔직히 대답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전혀. 그냥 지금 상황이 조금 짜증나고 성가시긴 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어째서요?”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까.”
“예?”
전혀 예상 못했던 답변이어서 일까? 아리엔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이진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이 배신감을 느끼거나 억울해하는 건 바로 뭔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기대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실망감과 분노로 이어지지. 하지만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으면 그럴 일도 없어.”
“······.”
“그래서 난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애당초 남들을 위해서 싸운 게 아니었으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였지. 그 외엔 다 부가적인 것이야. 타인이나 외부의 평가에 대해선 애당초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노골적이면서도 직설적인 그 말에 아리엔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뒤에야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는 다시금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면 이진운 씨는 남들의 시선이 전혀 신경 안 쓰이시나요? 막 헐뜯고 음해를 해도요?”
“내가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먼저 나 자신이 떳떳하고 스스로의 실력에 확신이 있다면, 불특정다수가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평가에 굳이 목멜 이유도 없지. 뭐 정 귀찮게 굴면 짓밟아 버려도 무방하고.”
“···그렇군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요.”
다른 사람들하고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에, 아리엔은 마치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식의 역발상은 처음이었다.
“표정을 보니 너도 누군가에게 분노하거나 실망해본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예. 말로 다 표현 못할 만큼 진저리나게 느껴봤죠.”
꽤나 복잡한 심경이 묻어나오는 대답이었다. 이진운도 그 심정을 헤아리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줄을 서서 각자 배식을 받은 두 사람은 구석지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구내식당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제법 훌륭한 편이었다. 이미 십년 전부터 지구인들을 받아들인 덕분인지, 지구인들의 입맛에도 썩 괜찮게 느껴졌다.
이제 몇 수저 뜬 그때, 식사를 앞에 놔두고 멍하니 있던 아리엔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진운 씨.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이라고? 갑자기 나한테 무슨 부탁을?”
대체 이 와중에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먹던 것을 마저 꿀떡 삼키며 묻는 이진운에게, 아리엔은 자신의 바라는 바를 조심스럽게 꺼내놓는다.
“클레브처럼 저도 제자로 받아줬으면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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