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8화 (29/448)

2권-03화

프라이스 호는 축제분위기처럼 떠들썩한 상태였다.

인베이더의 습격에 이어 소행성까지 날아올 때만 해도 다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는데, 뜻밖의 구원군의 등장으로 기사회생했으니까.

그 결과, 프라이스 호 내에 있는 강당에서 조촐한 연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프라이스 호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밝고 화기애애했다. 바로 얼마 전 인베이더와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진운은 그런 밝은 분위기 속에서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조금 묘한 느낌이야. 분위기가 아주 묘해.”

“묘하다니요?”

옆을 지나가던 아리엔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투로 물어왔다. 이진운이 혼자 중얼거린 그 말을 무심코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번 사태 말이야. 어찌어찌 간신히 살아나긴 했지만, 죽은 사람도 꽤 있었어. 그런데도 이렇게 밝은 분위기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군.”

이진운도 전생 시절에는 수많은 전장을 경험해 봤었다. 천마신교가 중원무림을 침공하면서 셀 수 없는 전투를 치렀었고, 그 과정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비쳐볼 때, 이건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기계군단 인베이더들에게 죽은 강화병만 42명이었고, 지구인들도 무려 2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헌데 그런 일을 겪고도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다니.

전장에 익숙해진 자들이라 해도 쉽지 않거늘, 보통 사람의 감성을 가진 자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진운이 의문을 품자, 아리엔이 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이상해할 것 없어요. 그것도 시스템이 가진 효과 중 하나니까요. 사람의 정신력을 강화시켜준다고나 할까요?”

“시스템이 사람의 정신까지 관여한다고?”

“예.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 각성한다고 해서 바로 싸움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시스템은 그런 부분도 강화시켜주죠.”

“설마, 슬픔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들을 강제적으로 거세시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내보인 우려에 대해 아리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그런 감정들을 보다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을 갖게 해주는 거죠.”

그녀는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 보이는 저 사람들도 정말로 슬프지 않은 건 아닐 거예요. 연회의 밝은 분위기에 몸을 던져 슬픔을 조금씩 삭이는 거죠. 마음으론 죽은 자들을 추모하면서요. 저도 그랬고요. 그러지 않으면 그 다음 전쟁에서는 견딜 수 없거든요.”

그런 말을 듣고 나자 이진운은 아리엔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녀도 하나의 부대를 이끌고 있는, 엄연한 전쟁 경험자였다. 전쟁 속에서 누군가를 잃는 아픔을 여러 차례 겪어봤을 것이고, 그것을 잘 극복했기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겠지.

‘어떤 식인지 대충은 알겠군. 시스템은 인간의 정신을 직접 강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회복 탄력성을 강화시켜주고 있어.’

[회복 탄력성(Psychological Resilience)]은 인간이 어떤 절망적인 위기에 몰렸을 때 그것을 얼마나 잘 극복할 수 있느냐에 대한 정신적인 회복력을 말한다.

시스템이 사람들에게 별다른 정신간섭이나 개조를 하는 게 아니라면, 이 회복탄력성을 강화시켜주는 것 외엔 떠올릴 수 있는 게 없었다.

만일 시스템이 정신에 직접 개입하는 형태였다면, 지구인들은 인베이더와 싸우기 직전에 전투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세뇌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신력만 강화시켜 준 거라면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에 대한 상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이진운은 연회장 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저쪽은 꽤나 시끌시끌하군.”

“당연하죠. 저 사람은 아주 유명 인사잖아요. 우릴 구해줬고요.”

아리엔이 말한 유명인사는 바로 다름 아닌 연정운이었다. 자신을 마탄의 사수라 소개했던 그의 옆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상황.

그가 사람들의 열렬한 주목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아르탈 행성연합에서도 순위에 드는 유명 인사였고, 소행성으로부터 프라이스 호를 구해준 영웅이었으니까.

이진운은 알데마란이 언급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제게 바로 그 천외오천이란 말이지.”

연정운은 확실히 강했다. 지금의 이진운으로선 상대의 역량을 쉬이 측량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적어도 화경 이상이야.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연정운이 익힌 영능은 이진운의 무공과는 완전히 다른 계열인 만큼, 서로 경지를 비교할 순 없겠지만 단순 강함만 놓고 본다면 그 정도 쯤 되지 않을까 짐작했다.

‘소환된 지 고작 10년 정도 지났을 뿐인데 저 정도라니. 게다가 그런 놈들이 다섯이나 된다고? 제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이건 너무 비상식적인 진전이야. 아니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다른 뭔가가 있는 건가?’

이진운이 연정운을 살피던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천외오천한테 관심 있어?”

“누구지, 넌?”

이진운은 먼저 말을 걸어온 상대를 향해 힐끔 시선을 주었다. 다가오는 것은 알았지만, 별다른 적의가 없어 모른 체 하고 있었다.

헌데 자신이 하는 말을 듣고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다.

“난 데릭 마이어. 10년차 소환자야. 너희와 같은 지구 출신이지. 참고로 국적은 미국 텍사스 주야. 만나서 반가워.”

이진운의 경계 어린 반응에도, 넉살 좋게 자신을 먼저 소개한 데릭 마이어는 미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흑인 락스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진운도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상대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으니 이진운도 가만있을 순 없어서였다.

“난 이진운이라고 한다. 보다시피 지구 출신이고.”

“음, 아시아 쪽인 것 같은데, 중국? 아니면 일본?”

“한국에서 왔지.”

“오, 코리아! 나도 알아. 북핵 이야기는 뉴스에서 많이 들었어. 뚱뚱하고 배나온 독재자가 지배하는 곳이라지?”

“···거긴 놀스 코리아고(North Korea.북한). 우린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다.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고.”

“오, 쏘리! 이런 큰 착각을 하다니, 내가 잘 못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실례가 많았네.”

머쓱한 표정으로 바로 사과해오는 데릭의 모습에 이진운은 그저 헛웃음 짓고 말았다. 정말이지 어지간히도 넉살 좋은 작자였다.

“그런데 10년차라면, 연정운하고 함께 온 건가?”

“그렇지. 나도 골드 서퍼 소속이거든.”

연정운은 이곳까지 혼자 왔던 게 아니었다. 그가 이끄는 독립 함대 [골드 서퍼]와 함께 이곳에 도착했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 그가 혼자 나타났던 것은 프라이스호가 처한 위기상황 때문이었다. 그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자신의 함대를 내버려두고는 단독으로 우주공간을 가로질러 와 소행성을 날려버렸던 것이다.

비교적 짧은 거리라 해도 맨몸뚱이로 전함보다 더 빨리 우주공간을 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기만 했다.

“조금 전에 보니 천외오천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같던데? 관심이라도 있어?”

데릭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이진운은 궁금해 하던 것을 꺼내놓았다.

“관심은 있지. 우리와 같은 지구 출신이면서 그렇게 강하다며?”

“흐음, 무지 강하지. 아마 아르탈 행성 연합 내에서도 그만한 강자는 찾기 어려울걸?”

“그러면 천외오천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지?”

“천외오천은 말 그대로 절대강자야. 단독으로도 어지간한 함대 전력과 맞먹지. 그 녀석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전쟁의 판도가 뒤바뀔 정도니 말 다했지. 그래서 아르탈 행성 연합에서도 극진히 대우해주고 있고. 그래서 발언권도 아주 높아.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 거대 세력의 주인들과도 조금 못하거나 비슷할 걸.”

이진운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외오천이 전부 연정운과 동급이라면, 그들은 화경을 넘어 현경에 가깝거나 그에 준하는 강함을 가졌을 터.

그 만한 강자들이라면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이지? 그 작자들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자신과 같은 출신이나 국적의 인물이 자랑스러워하기 마련이었다. 헌데 데릭은 무슨 떪은 감이라도 씹은 듯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제? 뭐 문제라면 문제겠네.”

“무슨 문제인데? 성격이 더럽기라도 해?”

“뭐 그런 건 아니야. 남에게 피해를 주는 녀석들도 아니고. 오히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잘 도와주는 편이지. 지구 출신인 우리가 지금 이 정도 대우를 받는 것도 반쯤은 그 녀석들의 활약 덕분이야.”

“그럼 뭐가 문제인데?”

이진운이 계속 캐묻자, 데릭은 잠시 한숨을 내쉰 뒤 떨떠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문제라는 건 그놈들이 전부 진성 오타쿠들이라는 거야.”

“뭐?”

“좋게 말해 천외5천이지, 완전 흑역사 5인방이라고. 우리 같은 지구 출신들은 다들 그렇게 불러.”

“······.”

거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지구 출신의 최강자들이 그런 존재였다니.

이진운도 더 이상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괜히 관심 가졌다가 사람들에게 같은 오타쿠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관심을 거둔 시점이 조금 늦은 것 같았다. 연정운이 주변의 사람들을 물리고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데릭을 흘기듯 바라보면서 먼저 따지고 들었다.

“어이, 데릭. 흑역사라니. 날 그놈들과 같은 취급하지 말라고. 그런 비상식적인 와패니즈 놈들하고 어떻게 날 비교하나? 난 이래 뵈도 엄연한 상식인이야.”

“그놈들이나 너나 거기서 거기지. 다를 게 뭐 있어? 카우보이 양반.”

“아, 진짜. 다들 왜 서부개척시대 사나이의 매력을 모르는 거야? 얼마나 멋있어. 이 모습이.”

“그래봤자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패션이지.”

“젠장, 그러는 네놈은 예전에 인디아나 존스 따라한다고 채찍까지 들고 다녔으면서.”

“그건 이미 소싯적 얘기지. 소환되고 나서는 그런 적 없다고.”

그들 둘 사이에 오가는 유치한 말다툼을 보면서 이진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데릭이야 그렇다 쳐도, 연정운에게선 절대강자의 면모 따윈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말다툼을 이어가던 연정운은 자신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이진운의 모습에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남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 참. 이진운이라고 했지? 어제 봤었지만, 다시 소개하지. 난 연정운이다. 한국계 미국인이지. 나이는 지구 기준으로 스물여섯이고. 데릭하고는 동갑이야.”

그렇게 첫 인사를 다시 주고받은 이진운은 연정운과 데릭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친구처럼 서로 말을 놓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서로 친해지자 이진운이 먼저 넌지시 물었다.

“이런 질문이 너한테 실례가 될지 모르겠는데··· 천외오천들은 다 너처럼 강한가?”

“글쎄. 나보다 약한 녀석은 없어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을걸.”

“그 정도로 대단한가?”

“대단하지. 남들 보기에는 그냥 멍청한 오타쿠들처럼 보여도, 가진 능력들이 장난 아니야. 취미를 능력으로 승화시켰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미친놈들은 그래서 무서워.”

그렇게 말하면서 진저리치는 연정운의 모습에, 이진운은 내심 생각했다.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연정운도 오타쿠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고.

하지만 그런 속내를 모르는 연정운은 이진운의 전투능력에 관심을 보였다.

“참, 알데마란과 네가 싸우던 전투 데이터는 봤다. 아주 훌륭하더라.”

“그래?”

“우리도 막 소환되었을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앞으로 계속 성장한다면 어쩌면 우리 이상이 될 지도 모르지.”

생각 이상의 고평가에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너도 이미 들었겠지만, 난 시스템 오류로 레벨업이 불가능한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시스템은 절대적인 게 아니야. 직관적인 형태로 성장을 보조해주는 것이지. 없는 재능을 만들어서 성장시켜주진 않아. 레벨업?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중요한 건 재능과 노력이지, 그건 부수적인 것에 불과해.”

그렇게 내뱉은 연정운의 두 눈이 이진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넌 우리 이상의 이레귤러라고 봐, 나는.”

“······.”

이진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론 내색 안했어도 조금 놀란 상태였다.

‘생각보다 예리한 녀석이군. 카우보이 흉내나 내는 얼빠진 놈인 줄 알았더니.’

하긴 그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른 녀석이 이만한 통찰력과 오성도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내심 그를 재평가하던 이진운에게, 연정운이 말을 남겼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도록 해. 도움을 줄 테니까. 같은 지구 출신이니 서로 도우며 살아야지.”

“그럴 일이 있다면 그러지.”

“그래? 그럼 꼭 연락해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연정운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진운은 각오를 세웠다.

‘천외오천이라. 일단 내가 약속한 것이니 언젠가 연락은 하겠어. 우선은 네 녀석과 같은 반열에 오른 다음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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