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21화
훈련시간이 끝난 뒤, 이진운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하루의 모든 일과가 전부 마무리된 상태였다. 다른 지구출신 사람들은 달콤한 휴식을 누리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진운은 그들과 달랐다. 자신만의 개인 시간이 주어진 지금이야말로 무공을 수련할 때인 것이다.
하지만 그 혼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며칠 전 제자로 들인 클레브도 함께였다.
이진운은 방안에서 수련을 하는 한편, 클레브의 수련도 틈틈이 봐 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좀 이상했다. 이전에는 집중해서 잘 하던 클레브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수련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동작은 정확히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그것을 행하는 클레브의 정신에는 잡념이 가득해 보였다.
아까부터 클레브의 얼굴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을 떠올린 이진운이 물었다.
“클레브, 오늘따라 움직임이 상당히 산만하구나. 하는 동작마다 잡념이 끼어 있어.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거냐?”
그 물음에 일순 흠칫 놀란 클레브가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스승님. 단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거?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봐라.”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클레브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스승님, 아까 그 무례했던 자를 왜 그냥 두고만 보신 겁니까? 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가 했던 이진운은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 너한텐 그게 어지간히도 거슬렸나 보구나.”
“주제도 모르던 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일 텐데 처음부터 상하관계를 확실히 알려줬어야 했습니다.”
이진운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제자인 클레브는 자신이 모욕당한 것 마냥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는 제자의 모습에, 이진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네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런 부류들은 과시가 심해서 자기 위세를 드러내길 원하지. 남이 자신의 발밑에 있길 원하고.”
이진운의 말처럼 남들 앞에 나서서 과시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런 성향을 갖고 있었다. 좋게 말해 리더쉽이지,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집단을 주도해야 성이 풀리는 작자들.
그렇지만 인간 사회가 형성되기 위해선 그와 같은 저열하고 유치하게 보이는 그런 욕망적 구심점이 필요했다. 단지 규모가 크고 작으냐의 차이일 뿐, 마틴을 비롯한 자들이 하는 짓도 집단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의 일부분이었다.
그것이 긴 시대를 거치면서 부족에서 도시국가로 이어졌고, 오늘날의 국가 형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누군가가 남을 주도하고자 하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라는 건 존재하는 법이다.
“클레브, 한 가지만 묻겠다. 너는 하루살이 한 마리가 눈앞에서 날아다닌다고 해서 모욕감을 느낀 적이 있었더냐?”
“그럴 리가요.”
자신에게 되돌아온 그 물음에 클레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같다. 마틴이란 녀석이 날 도발하면서 주도권을 쥐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애당초 그 녀석을 내 상대로 보지 않는다.”
“···그렇군요.”
그랬다. 이진운이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은 것은, 애초부터 마틴이나 다른 자들을 자신과 대등한 선상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낱 개미가 옆에서 알짱댄다고 해서 거기에 진심으로 화를 낸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인 것처럼, 이진운도 그러했다.
마음 내키면 언제든 짓밟아버릴 수 있으니, 그런 도발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딴 생각 말고 지금은 수련이나 열심히 해라. 녀석들 따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지면, 그런 시시한 도발 따윈 웃을 가치조차 없어진다.”
“예.”
그때부터 클레브는 잡념을 지우고 수련에 제대로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수련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함 전체에 알림방송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시간으로 모든 승무원과 탑승자들에게 전한다. 본 함은 곧 워프 아웃 단계 들어간다. 워프 아웃 도중 작은 흔들림이 있을 수 있으니 하던 일을 중단하고 대비하기 바란다.]
방송을 들은 이진운이 클레브에게 물었다.
“워프 아웃이라. 목적지에 벌써 다 온 건가? 아직도 일주일 정도는 더 남은 걸로 아는데.”
“도착한 게 아니라 차원 단층 때문입니다. 차원단층은 워프로 넘을 수 없는 시공간의 뒤틀림이라서, 지금처럼 차원단층을 통상항행으로 지나갈 때까지는 워프를 중단할 수밖에 없죠.”
“그럼 아직도 더 가야 한단 말이군.”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갑자기 굉음과 함께 성대한 진동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콰아앙!
“큭! 뭐야, 이건!”
엄청난 진동이었다. 함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쳤다. 이진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균형을 잡았지만, 클레브는 하마터면 벽 한쪽으로 날아가 처박힐 뻔했다.
이진운이 재빨리 잡아준 덕분에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이건 조금이 아니군. 워프 아웃이란 게 이렇게 요란스러운 건가?”
우주전함을 탄 이후 처음 겪는 격렬한 진동에 이진운이 이상하다는 듯 묻자, 클레브는 강하게 부정하였다.
“아닙니다, 스승님. 이건 절대 정상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워프 아웃 가지고는 이렇게 흔들릴 수가 없어요.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클레브가 심각한 표정을 짓던 그때, 그런 그의 추측을 확인시켜주듯 격렬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위이잉!
[현재 시간부로 모든 승무원들에게 알린다. 제 1급 전투대비태세. 인베이더의 기습으로 본 함은 현재 전투상황에 들어간다.]
“인베이더라고!? 대체 어디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클레브는 경악에 빠졌다. 이 일대 주역은 아르탈 행성연합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다. 제아무리 인베이더라 해도 이렇게 세력권 깊숙한 곳까지 은밀히 들어올 수 있을 리 만무한 일인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가 경악하든 말든 방송은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실전 상황이다. 강화병들은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전투준비를 갖추고, 지구인들은 지시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다.]
하지만 이 방송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격렬한 충격이 함 전체를 진동시켰다.
콰아앙!
[적함의 특공에 의해 본 함 좌현 피격! 현재 적함은 좌현에 깊이 박힌 상태. 관통된 구역을 통해 다수의 적군 침투 중이다. 전투준비를 마친 병력들은 즉시 대응하라.]
또다시 이어진 방송에 클레브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적들이 함 내부로 침투해 들어왔다면, 결국 함 내 전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전투는 결국 지구인들을 지켜야 하는 강화병들의 몫이 될 것이다.
“스승님, 서두르죠.”
“그래.”
클레브는 이진운과 함께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단 싸우려면 무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병기 창고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병기를 찾아 장착하고 있었다.
클레브는 자신의 무장부터 챙겼다. 전신을 감싸는 갑옷 같은 형태였다. 마치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강화슈츠 같았다.
이진운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네 무장이냐?”
“이게 바로 아머리 웨폰(Armory Weapon.강화무구强化武具)입니다.”
아머리 웨폰에 대해선 이진운도 교육시간에 들은 적 있었다.
영능이 없거나 그 수준이 미약한 강화병들이 사용하는 전용무구. 초소형 영자 제네레이터가 탑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영력을 다루는 게 가능해진다고 했다.
재능이 없다고 평가받았던 클레브도 아머리 웨폰을 장착할 경우 본래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능에 한계가 있지.’
아머리 웨폰을 아르탈 행성 연합의 주력인 오버러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출력도 출력이지만 오버러들이 다루는 섬세한 운용방식대로 영력을 증폭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구인들에게도 서둘러 개인 무장이 지급되었다. 지구인들의 커스텀 병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미완성 병기라도 아쉬울 때다.
하지만 막상 싸울 무기가 주어지자, 지구인들은 혼란 그 자체였다.
“우리더러 지금 싸우라고?”
“미친! 싸울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젠장, 뭘 어쩌라고! 우린 싸울 줄 모른다고! 아니 안 싸운다고!”
이를 악물고 무기를 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울고불고 하거나 악을 쓰며 안 싸우겠다고 대드는 작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강화병들은 그런 그들을 향해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그럼 그냥 앉아서 죽을 생각입니까? 우리도 당신들을 지켜줄 수 있다고 장담 못하니 알아서 하세요.”
“뭐해? 무기 안 받아? 이대로 그냥 죽겠다고? 너희들이 죽는다고 해도 우리한테는 아무 책임이 없다. 그러니 잘 생각해라.”
“쓰벌, 저것들이 죽든가 말든가. 나도 모르겠다. 내 목숨도 건사 못하는데 앉아서 울고불고하는 저것들까지 어떻게 책임지라고?”
“죽게 놔둬. 그래봐야 시말서 몇 장 쓰면 끝인걸.”
강화병들이 자신들을 반드시 지켜준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지구인들도 결국 결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으으···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이래도 저래도 죽는다면 싸우는 수밖에.”
하지만 모든 이들이 싸울 각오를 세운 건 아니었다. 일부 사람들은 패닉을 일으키며, 싸움 자체를 거부하였다.
지금까지 며칠 훈련을 받긴 했지만, 실전도 경험해보지 못한 자들이 그 정도로 싸움에 익숙해질 리 없었다.
그렇지만 몇몇 이들은 달랐다. 바로 파벌을 주도하는 자들이었다.
특히 마틴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흉악한 표정으로 윽박질렀다.
“뭐 하냐, 이것들아! 죽기 싫으면 일어서! 싸우라고! 안 싸우는 것들은 인베이던가 뭔가 한테 죽기 전에 내 손에 먼저 뒤진다.”
오히려 그런 협박이 더 잘 먹혀들었다. 본보기로 몇 사람이 마틴의 손에 묵사발이 되자, 비칠비칠 일어나 무기를 손에 쥐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진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개똥도 쓸모가 있다더니, 저런 놈들도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
파벌의 리더들이 주도하기 시작하자, 지구인들은 빠르게 무기를 수령해 무장을 갖춰나갔다. 이제야 제대로 질서가 잡힌 것이다.
지구인들이 무구를 수령 받던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이진운을 크게 불렀다. 바로 리스티였다.
“아저씨 여기에요오오!”
황급히 뭔가를 품에 안고 달려온 리스티. 그녀는 가져온 것을 이진운에게 즉시 내밀었다.
“이게 그 무구냐?”
“예, 아저씨 전용 무구요! 완성된 것은 이것들뿐이지만요.”
이진운은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마치 외투를 연상케 하는 전투복 한 벌에, 검과 창 한 자루씩이었다.
이진운은 조금 감탄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르탈 행성 연합의 무구가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명인이 만든 병기보다 더 나은 것 같았다.
“벌써 완성이 되다니.”
“그게 저··· 일단은 프로토 타입인데요. 일단 상황이 급박하니까 그냥 써보세요.”
“미완성이란 말이군.”
“어쩔 수 없잖아요오오, 시간이 너어무 촉박했으니까. 그래도 양산품보다는 훨씬 나아요.”
“알았다. 잘 쓰마.”
이진운은 서둘러 무기를 착용하면서 새삼 놀랐다. 미완성 프로토 타입인데도 이 정도라니.
리스티를 조금 우습게 봤었는데, 이젠 달리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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