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17화
“흐음, 골격은 그만하면 됐고··· 탁기도 생각보다 많지 않군.”
클레브의 전신을 살펴본 이진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어려서부터 수련을 해온 덕분인지 육체도 고르게 발달되어 있어서 마보 같은 기초수련은 건너 띄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군. 지금 가진 30년 내공으로는 개정대법 같은 건 해줄 수도 없는데 잘 됐어.’
일단 점창의 기본심공인 열양공부터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클레브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내기의 운용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자들처럼 영력에 대한 친화력이 높지 않은 만큼, 내가심공으로 그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밖에.
“리스티에게 배워두길 잘했군.”
그녀에게 배운 아르탈 행성 연합의 기본적인 영능 운용법이 도움이 되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열양공을 클레브에게 맞게 개조할 수 있었다.
이진운은 열양공을 전수하기에 앞서 경고부터 해 두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한테 배우게 될 것들을 남들에게 함부로 전수하지 마라. 만약 걸리면 나한테 정말로 뒈진다.”
목덜미에 칼날이라도 들이댄 것처럼 섬뜩한 기세에 클레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누군가에게 전수해야 한다 싶으면 그 전에 나한테 반드시 허락받고 해.”
“예.”
본디 한 문파의 비전은 문외불출(門外不出) 비인부전(非人不全)이라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진운도 점창의 비전을 외부로 함부로 내돌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가 리스티에게 알려준 것은 어디까지나 중원 무림에서도 흔해 빠진 잡 지식이었기에 가르쳐 준 것이지, 그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쉽게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클레브가 슬그머니 말문을 열어왔다.
“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앞으로 당신을 뭐라 불러야 됩니까?”
그 물음에 이진운도 잠시 생각해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호칭도 없었다.
“그냥 스승님이라 불러. 제자가 됐으면 당연히 그래야지.”
클레브는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이진운을 스승이라 불러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진운으로부터 곧 험악한 시선을 받고는 쉽게 굴복하고 말았다.
“예, 스승님.”
당연한 말이지만 법은 멀고 눈앞의 주먹은 가까웠다.
* * *
사승관계를 맺은 이후부터 열양공의 전수가 시작되었다.
일단은 체내에 내공을 밀어놓고 직접 진기를 도인해줌으로서 운용경로를 각인시켜줬다. 일일이 혈도와 경락의 위치를 가르쳐가며 전수하기에는 번거로웠기 때문이었다.
그건 차차 가르치기로 하고, 일단 먼저 열양공의 운용법부터 몸으로 체득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처음으로 가부좌라는 것을 튼 클레브는 열양공을 운용해보더니 놀랍다는 듯 눈을 떴다.
“이게 열양공······.”
난생 처음으로 경험해본 운기조식이었다. 전신이 이토록 영력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고작 그 정도로 너무 흥분하지 마라. 이제 겨우 한 발 내딛었을 뿐이니까. 아직 갈 길이 멀어.”
“그래도 놀랍군요. 재능이 없어도 호흡과 영력의 순환을 통해 영력의 총량을 늘려갈 수 있다니. 이런 경험은 정말 처음입니다.”
지금까지 클레브가 알고 있던 운용법들은 전부 재능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영력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친화력이 없으면 제대로 된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열양공은 달랐다. 확실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것도 분명 재능을 따진다. 기감이 뛰어난 녀석은 더 많은 내공을 쌓을 수 있고. 하지만 네 녀석이 익히던 것보다는 덜하지.”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전엔 이마저도 안 됐습니다.”
이진운이 볼 때는 기존의 최대치보다 먼지만큼 늘어난 정도였지만, 그 정도만 해도 클레브에게는 경이로웠던 모양이었다.
“앞으로 해가 뜨기 전의 새벽 시간에 한 차례씩 연공 하도록 해. 하긴 생각해보니 여긴 우주 한복판이라서 새벽이고 뭐고 없나?”
“뭐 그렇긴 합니다만··· 기상시간 전에 일어나 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앞으로 내게 새로운 검술을 배우게 될 거다. 지금까지 익힌 것과는 사뭇 달라서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잘 따라오도록 해라. 혹시라도 뒤처지면 가혹한 특훈이 뒤따를 테니까.”
“예.”
이진운의 엄포에도 클레브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 희망찬 미소는 곧 고통으로 일그러지게 되었다.
“뭐가 이렇게 뻣뻣해? 제대로 동작 안 취해?”
“으으윽!”
이진운의 호통소리에 클레브는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자세를 고쳐잡는다. 하지만 여전히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이런이런, 웰라우드 류인지 뭔지를 익혀서 그런지 몸이 거기에 맞게 굳어져 있어. 그래서 어려운 거야. 앞으로는 유가술도 수련 시켜야겠군.”
클레브의 단련된 몸은 무척이나 강건했지만, 그만큼 단점도 컸다.
현재 이진운이 가르치고 있는 검식은 점창의 기본 검공이랄 수 있는 삼절검. 하지만 그동안 수련해온 웰라우드 류하고는 스타일이 전혀 달라서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응을 못한다기보다는 아니라, 신체의 사용방법과 관절의 가동범위부터가 아예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르쳐주는 검로를 따라 움직일 때마다 전신 근육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견디다 못한 클레브가 하소연하듯 물었다.
“스승님. 이 검술 말입니다. 본래 배우는 과정부터 이렇게 고통스러운 겁니까?”
“그럴 리가. 하지만 네 몸은 웰라우드 류인지 뭔지 때문에 거기에 맞춰져 있다. 그걸 뜯어고치려니 문제가 생기는 거지. 근본부터가 완전히 다른 무예를 배우는 데 그 정도 부작용은 감수해야지.”
“그럼 언제까지 이런······.”
“앞으로 몸을 풀어주는 공부를 같이 병행할 것이다. 한 며칠 하다보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군요.”
아픔을 애써 참으며 동작을 이어나가는 클레브.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인내심 하나는 대단했다.
‘하긴 별 성과 없는 수련을 무려 20년씩이나 해온 녀석이니 이 정도 참을성은 당연한가.’
타고난 재능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지만, 그래도 이런 끈기라면 가르칠만하다고 이진운은 생각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 클레브는 삼절검의 기본형을 배웠다. 물론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완전히 체득하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일단 검로의 형만큼은 숙지한 셈이다.
간신히 수련을 끝낸 뒤 바닥에 널브러진 클레브를 향해 이진운은 다그치듯 말했다.
“갈 길이 멀다. 검로를 완전히 몸에 익힌 후, 내공도 함께 운용할 수 있도록 완전히 숙달시켜야 해.”
“헉헉··· 예.”
힘겹게 답하는 클레브.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진운은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두 주먹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이다.
“윽! 어억! 스승님 갑자기 왜 절 패는 겁니까? 컥!”
갑작스럽게 맞게 된 클레브가 비명에 찬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이진운운 멈추지 않았다.
“패고 싶어서 패는 게 아니야. 주먹에 영력을 실어서 뻣뻣하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거니까 아파도 참고 있어. 지금은 좀 아파도 맞고 난 다음에는 좀 나을 거다.”
중원무학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클레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진운은 열심히 클레브의 전신을 가열차게 두들겨댔다. 마치 달궈진 쇠를 두들겨 정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클레브는 아픈 나머지 막거나 피해보려 했지만, 이진운의 주먹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10분간 먼지 나도록 맞고 난 클레브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굴을 보니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 끝났으니 정신 차려라. 아직 더 맞고 싶은 거냐?”
“에? 예!”
이진운의 엄포 섞인 말에 화들짝 놀라 대답하는 클레브.
그렇지만 그는 곧 자신의 몸 상태를 깨닫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아프질 않아? 그렇게 맞았는데?”
그렇게 엉망으로 두들겨 맞았는데도, 아프기는커녕 몸이 개운하기까지 했다. 좀 점에 무리한 검술 수련으로 무리가 갔던 근육까지 말끔하게 풀려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전 그냥 두들겨 맞기만 했을 뿐인데······.”
“그게 평범한 주먹질인 줄 알았냐? 이게 얼마나 힘든 짓인데.”
이진운은 혀를 차며 물었다.
“이제 좀 낫지?”
“예, 그냥 나을 정도가 아니라 푹 자다 일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군요.”
“타혈법이라고 한다. 영력으로 전신 경락을 자극해서 몸에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 근골을 풀어주는 수법이지. 이렇게까지 했으니 내일 자고 일어나도 몸에 크게 무리는 없을 거다. 그러니 앞으로 열심히 수련해라. 꾀부리지 말고.”
“예.”
사실 이진운에게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해준 타혈법은 개정대법 정도는 아니라도, 상당한 효과를 가진 수법이었으니까.
타혈을 해주느라 30년 내공 중 반절을 허비하고 말았다. 이제 클레브를 돌려보내고 나면 내공을 채우기 위해 잠시간 운공조식을 해야 할 것이다.
* * *
이진운은 다음날이 되자마자 아리엔을 찾아갔다. 클레브가 자신의 제자가 됐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사실을 전하자마자 아리엔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제 막 소환된 지구인의 제자로 들어간다니··· 이런 경우는 너무 이례적이어서였다.
“예? 클레브가 이진운 씨의 제자가 됐다고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리엔 대장. 아니, 사범님. 절 뭐라 꾸짖고 책망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클레브는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진심으로 사죄했다.
당황도 잠시 뿐.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아리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답하였다.
“괜찮아요. 클레브. 웰라우드 류는 본래부터 개방된 무문이었어요. 따로 비전이랄 것도 없고요. 다른 분을 스승으로 섬겨도 문제될 것 없으니까 염려 말아요.”
“그동안 사범님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리엔이지만, 그녀에겐 그동안 많은 걸 배워왔다. 클레브는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스승은 이진운이 됐지만, 언젠가 이 은혜는 어떻게든 되갚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리엔은 일단 허락은 했어도 납득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이진운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진운 씨는 자신 있으신 건가요?”
“무슨 자신?”
“클레브를 가르칠 자신이요.”
추궁하듯 던지는 시선에, 이진운은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자신이라. 자신은 넘치지. 지금까지 배운 어설픈 칼춤보다는 더 그럴듯한 검무를 출 수 있을 테니까.”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자신감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지. 웰라우드 류라고 했던가? 그런 어설픈 무예보다는 내게 배우는 게 더 확실하거든.”
그 말에 아리엔의 안색이 급변했다.
“···지금 저희 웰라우드 류를 모욕하는 건가요?”
“아니, 모욕이 아니라 사실이지. 몰락해가는 무가라며? 웰라우드는.”
웰라우드 무가의 몰락은 아르탈 행성연합 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지구인인 이진운이 벌써 들었을 줄이야.
아리엔은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렇지만··· 웰라우드의 사범 자격을 가진 제 앞에서 대놓고 어설프다고 하는 건 모욕입니다. 잘 아실 텐데요.”
“아아,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그런데 네가 그 무가의 사범이라고? 그럼 잘 알겠군.”
“뭘 말이죠?”
“웰라우드 류의 허점을.”
“허점··· 이라고요?”
그의 입에서 튀어나는 그 말에 아리엔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진운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허점이 아니라 운용법 일부가 실전됐다고 해야 하나? 내가 볼 땐 너희 무가가 몰락한 건 바로 그것 때문인 것 같던데,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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