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16화 (17/448)

1권-16화

그 이후로 이진운은 온갖 검사를 다 받아가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케이블이 주렁주렁 달린 이상한 장비를 걸친 채 체내의 에너지 반응을 투사해 보기도 했고, 여러 감지센서가 부착된 타이즈 같은 걸 입은 다음 실제로 무기를 휘둘러가며 기본적인 무공시연을 보이기도 했다.

이진운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보기에도 민망한 타이즈 차림이라니! 다른 건 다 젖혀두고라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뭐야? 나보고 이런 남세스런 차림을 하라고? 설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저 지금 제정신인데요오? 그건 왜 물으세요?”

이진운은 일순 어이가 없어 리스티를 노려보았다. 지금 딴청을 피우는 건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아무튼 안 입어. 이 타이즈 같은 걸 입을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럼 대신 이거라도 입으실래요? 이것도 비슷한 기능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좀 전에 자신이 입었던 바니걸 복장을 슬그머니 내미는 리스티. 이젠 타이즈도 모자라 바니걸이냐?

이진운은 하도 기가 막혀 소리를 질렀다.

“안 입어. 못해! 타이즈도 타이즈지만 그딴 걸 날 더러 어떻게 입으라고!”

“정말요? 안 입을 건가요오오?”

“그래 못해. 이런 걸 어떻게 입어!”

그는 딱 잘라 말했다. 리스티의 말에 넘어갔다간 자칫 타이즈로도 모자라 정말 바니걸 모습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진운이 단호히 거부하자, 리스티가 아주 곤란하다는 투로 중얼거린다.

“어라라··· 이러면 안 되는데에에! 그럼 아저씨랑 맺은 거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대로 파토 나는 거지. 거래는 없는 걸로 하고.”

“그럼 아저씬 평범한 무기를 써야 하는데요?”

“상관없어. 조금 불편해도 양산형 쓰지 뭐.”

맞춤 제작 무기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절실한 건 아니었다. 타이즈 따윌 입고 우스운 꼴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질 떨어지는 무기를 쓰는 게 백번 더 낫지.

그렇지만 세상은 언제나 뜻대로만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이대로 잘 끝마무리 될 거라 생각했던 이진운의 예상과 달리,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그의 허를 찔러왔다.

“그럼 계약 불이행에 대한 보상은요?”

“보상? 지금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던져진 보상 문제에 이진운은 황당해서 되물었다. 여기서 갑자기 보상 문제가 왜 나오는 거지?

하지만 리스티는 당연하다는 듯 논리정연하게 따져 들어왔다.

“일방적으로 계약을 깨면 보상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내가 아저씨 때문에 지금까지 낭비한 시간은요? 그것도 보상해 주셔야 되는 게 맞잖아요오오.”

“뭐? 계약서도 없는 구두계약에 무슨 보상은······.”

“계약서는 없어도 당시 계약을 맺을 때 찍은 영상은 있답니다아아. 이게 바로 그 증거죠. 와, 잘 찍혔네에에!”

“그걸 언제!?”

리스티는 놀랍게도 당시 상황을 촬영한 영상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홀로그램 창을 띄우자, 그때 나눴던 대화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났다.

간단한 구두 계약이라고 무시하려 했는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저, 보기보다 중요 인물이라서요. 어딜 가든 제 모습은 상시 촬영 중이랍니다아아.”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 하긴 지구에도 CCTV들이 있는데, 이곳이라고 그런 게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이거 방심했군. 촬영기기 같은 게 전혀 안 보여서 신경도 안 썼는데······.’

과학수준이 지구보다 훨씬 더 높은 만큼 촬영기기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더 작고 은밀했던 모양이었다.

“아저씨이이이, 자꾸 계약을 무시하면 다음에 만날 장소는 법정이에요오오.”

“너, 이 녀석!”

“자, 어떡하실래요? 우리 법대로 할까요오오?”

이진운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제대로 외통수에 걸려든 셈이었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싶지만, 이곳의 법이 자신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니 거래를 깨는 건 위험했다. 그렇다고 계약 파기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를 돈도 없는 처지였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

이렇게 된 이상 선택권은 없었다. 이제 막 지구에서 소환된 자신의 현재 신분은 국외자나 다름없는 상황. 이곳의 법이 리스티에게 더 유리하게 적용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자, 아저씨이이. 그럼 이제부터 우리 즐거운 검사를 시작해 봐요.”

* * *

그 이후로 이진운은 갖가지 검사를 거쳤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타이즈로 타협을 봤다는 것이다. 바니걸 복장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었다.

물론 단순히 시연만 보인 건 아니었다. 거래대로 중원무학에서 아주 기초적인 부분을 겉핥기식으로 알려주었으니까.

그가 가르쳐 준 지식은 호흡을 통해 기운을 체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혈도와 혈맥을 통해 저장하고 운용하는 토납법과 신체의 각 혈도와 경락의 역할.

중원에서 조금이라도 무공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라면 다들 알 수 있는 기초적인 지식이라서 크게 아깝지도 않았다.

“진짜 신기하네요. 예전에도 마나로드, 그러니까 영맥을 활용하는 기술은 있었지만, 이렇게 복잡하고 세분화된 방식은 못 봤어요. 단순히 영력이 흐르고 운행되는 통로 정도로 여겼거든요. 그런데 이걸 포인트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담아서 해석하다니. 확실히 해석부터가 다르네요.”

리스티는 연신 신기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옆에서 같이 듣던 듀렌 박사도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거 중의학에서 많이 듣던 내용 같군. 예전엔 그냥 사이비 정도로 치부했는데, 그게 영능하고도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네.”

하긴 지구에서는 기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했으니, 동양의학이 사이비로 취급당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르탈 행성 연합으로 소환되면서 영능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니, 기존의 동양의학이나 기(氣)에 관련된 지식들도 다시 재평가 받게 될 것이다.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

아무튼 리스티에게 중원무학의 기초를 알려주면서 이진운도 얻은 게 적지 않았다.

아르탈 행성 연합의 영능학의 기본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지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아르탈 행성 연합이 연구해온 영맥 활용은 상당히 직관적이었다. 혈도나 경락의 존재를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운을 이동시키는 통로에 불과했지, 그 이상의 것은 해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원무림은 각 혈도의 다양한 역할을 파악한 것은 물론, 거기에 우주의 섭리와 형이상학적인 의미까지 부여하였다. 그런 의미들을 깨우쳐야 비로소 진의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승 무학들이 하나같이 정신적이고 고차원적인 뜬구름 잡는 듯한 구절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확실히 운용 자체는 쉬워. 간단하고 위력적이지. 하지만 보편적이진 않아.’

어느 정도 영능에 대한 자질을 가진 자라면 쉽게 배우고 활용성도 크지만, 재능이 뒤떨어지는 자라면 성과를 보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클레브란 자가 그렇게 노력하고도 그 수준에 계속 머무는 것도, 아마 이런 체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리스티의 공방에서 나온 이진운은 곧장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자신이 사용할 무기에 대한 제원과 데이터를 제공했으니, 결과물은 며칠 뒤에나 나올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던 중 이진운은 뜻밖의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그와 비무를 벌였던 클레브가 자신의 숙소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진운이 먼저 용무를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

잠시 머뭇대던 클레브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가르침을 원하면 찾아오라고 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아, 찾아오지 않아서 잊은 줄 알았는데, 이제야 찾아온 거군. 생각보다 조금 늦었어.”

그가 찾아올 거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무인이라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조금···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배운 것도 있고 해서요.”

이진운도 그 말에 납득했다. 클레브도 엄연히 한 유파의 무예를 배운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는 다는 결정이 그리 쉬울 리 없었다.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이진운은 클레브를 데리고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단 그의 사정부터 들었다.

“지금까지 배운 게 웰라우드 류라고?”

“그렇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파 중 하나지요.”

하지만 널리 알려진 만큼 수준은 높지 않다고 했다. 수백 년 전에는 아주 높은 명성을 지녔던 무가였지만, 지금은 전승해오던 무예의 일부분이 실전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게 클레브의 설명이었다.

“하긴··· 검술의 운용부터가 뭔가 누락된 것 같이 어설픈 면이 있다 했는데··· 그래서였군.”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진운. 무공이 실전되면서 몰락한 문파나 무가. 중원무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였다.

“자네가 배운 검술 말이야.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내 앞에서 시연해 보여줄 수 있겠나?”

“예. 제가 배운 것들 한해서라면.”

클레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수련용 검을 들었다.

중원무림에서는 타인에게 자파의 무공을 노출하는 것이 금기로 취급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인베이더인지 뭔지 하는 괴물들을 공동으로 상대해야 하는 판국이니, 비전에 대한 중요성도 생각보다 높진 않겠지.’

이진운은 클레브가 시연하는 검술을 찬찬히 살폈다.

검술 전반이 위력적이고 강맹한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변화에 대한 수법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어딘가 파탄된 부분을 발견하였다.

‘···그렇군. 대충 알겠어.’

일단 진기의 운용부터가 문제가 많았다. 위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 단순하면서도 강맹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에 세세한 운용의 묘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내공이 필요했다.

‘아마도 진기의 위력이나 양을 크게 증폭하는, 뭔가 특수한 운용법이 존재했던 것 같은데, 그 부분이 누락됐어.’

그렇지 않고선 지금과 같은 검술 형태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리고 검술 자체도 대인보다는, 거대한 괴물이나 인간을 벗어난 괴수를 상정한 것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강맹하면서도 직선적이고 위력적인 수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대인수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검의(劍義) 자체가 인베이더를 상대하는 데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건 분명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점창의 기본공을 전수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이걸 뜯어 고쳐서 , 제대로 된 걸 만들어줄까.’

웰라우드 류의 검술 자체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실전된 부분을 감안하면 어지간한 상승무공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배우던 걸 배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복원부터 해야겠군. 그 전에는 일단 점창의 무공도 조금 가르치고.’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이진운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천년 중원의 무학지식 대부분을 가진 일대종사인 그에게 이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됐어. 충분히 봤으니까 그만해도 좋아.”

이진운이 외치자, 클레브도 그제야 시연을 멈췄다.

“앞으로는 내가 가르치는 걸 배우도록 해. 지금까지 배운 검술은 잊고.”

“완전히 새로운 걸 배우는 겁니까?”

조심스럽게 되묻는 클레브. 그렇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던지 크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일단은. 내가 익힌 무예를 조금 가르쳐 줄 테니 그걸 수련하도록 해. 그동안 난 네가 배운 검술을 복원할 테니까.”

“보··· 복원이라니, 그게 정말 가능한 겁니까?”

클레브는 크게 놀라 외쳤다. 지금 그 말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래, 가능해. 나라면.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믿을 수가 없군요. 벌써 백여 년 동안 긴 세월을 쏟아 붓고도 제대로 복원을 못해서 웰라우드 가가 몰락했는데······.”

“본래 이런 분야는 들인 시간보다는, 그럴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자화자찬 같긴 하지만, 실제로 이진운은 무학에 관해선 천재였다. 그렇지 않다면 불과 40세도 되기 전에 현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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