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15화
‘도대체 이 애의 가정교육을 누가 했는지, 어디 한번 보고 싶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이진운은 우회적인 표현으로 충고의 말을 던져주었다.
“앞으론 뭘 하기 전에, 네 친구라는 아리엔에게 먼저 물어보고 행동해라.”
“왜요?”
“······.”
순진무구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되묻는 리스티. 표정을 보니 정말로 왜 그런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내쉰 그는 푸념하듯 대답해주었다.
“여기서 그런 물음이 나오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다. 하는 말투나 행동이 넌 상식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어.”
“예전부터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오오. 헤헤.”
“이건 칭찬이 아니라고!”
여전히 상황 파악 못하고 싱글벙글하는 리스티의 태도에 이진운은 아주 진저리를 쳤다. 고작 말 몇 마디 섞는 것만으로도 벌써 지치는 느낌이었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다양한 성격의 아이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타입은 난생 처음이었다.
“됐다. 더 말해 뭘 하겠냐?”
그렇게 중얼거린 이진운은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무기를 만들어준다면서?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건 아닐 텐데.”
“아이, 성질도 급하셔라. 자, 이쪽으로 오세요오오.”
입술을 삐죽인 리스티가 이진운을 자신의 공방 안쪽으로 안내했다.
공방은 꽤나 어지러웠다. 이것저것 가재도구들이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만 봐도 리스티의 생활상이 어떤지 짐작이 갔다.
‘전형적인 연구 폐인이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일반인들과 동떨어진 사고방식과 성격. 어떤 방면에 대해 어려서부터 외곬수적으로 파고들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더 넓은 공간이 나왔다. 방안에는 각종 연구기재들이 보였는데, 이런 방면에 지식이 없는 이진운으로서는 하나같이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공방 안에서 조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의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이진운과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소환된 NASA소속의 노과학자 듀렌이었다.
그도 이진운의 방문이 뜻밖이었던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엉? 누가 온다고 하더니 자네였었나.”
“그러는 박사님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리스티 양에게 듣지 못했나?”
“못 들었지요.”
이진운이 모른다며 대답하자, 듀렌 박사가 헛웃음을 흘리며 화답해 주었다.
“허허, 거 참. 또 잊어먹은 모양이군. 난 지금 리스티 양에게 아르탈 행성의 과학 지식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네.”
“과학 지식을 말입니까?”
“내 각성 능력이 연구생산 쪽이라서 그러네. 지구에서 쌓아온 지식도 대부분 과학 분야 쪽이고. 그래서 나를 이쪽 방면으로 특화시키기 위해 리스티 양을 통해서 기초 교육을 받게 해 주더군.”
“그렇군요.”
이진운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구에서도 이름난 과학자였던 듀렌 박사였다. 그가 아르탈 행성 연합의 지식을 배운다면 아마도 빠른 시일 내에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아마 상부에서도 그런 점을 고려해 정한 결정이겠지.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저 꼴을 보고도 말릴 생각 안 했습니까?”
이진운은 슬며시 시선으로 저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여전히 바니걸 차림새를 한 채로 바쁘게 움직이는 리스티가 있었다.
“뭐, 어떤가. 자기가 하고 싶다는데.”
어깨를 으쓱하는 듀렌 박사. 지식을 배우는데 지장을 주는 게 아니라면 리스티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지식만 배울 수 있다면 상대의 정신적 미숙 문제 같은 건 신경 안 쓰겠다 이거군. 아니면 저 박사도 리스티와 동류이거나.’
이진운은 후자에 가능성을 두었다. 사실 그가 볼 때, 듀렌 박사도 그다지 정상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무기를 만든다고 했지?”
“예. 리스타가 제게 맞는 무기를 맞춤제작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이쪽으로 오게. 일단은 이것저것 검사부터 해야 하니까.”
듀렌 박사의 말에 이진운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리스티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따로 뭔가를 준비하는 건지, 이것저것 기재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진운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리스티가 아니라 박사님이 만들어 주는 겁니까?”
“아, 조만간 우리 지구인들에게도 무기 배정을 해주기로 하지 않았나. 양산형을 약간 커스텀해주는 거긴 하지만, 나도 그 작업에 참여하기로 해서 말이야. 조금 배워뒀네.”
“그럼 제작도?”
“아니, 어디까지나 난 기초 데이터 수집만 할 것일세. 제작은 리스티 양이 직접 맡을 테니 무기의 성능에 대해선 크게 걱정 말게나.”
이진운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이왕 만드는 무기는 제대로 된 실력자에게 맡기고 싶어서였다.
제아무리 이름난 과학자라 해도 아르탈 행성 연합의 과학 레벨과 비교하면 갓난아이나 다름없는 수준. 그런 듀렌 박사가 벌써부터 영능 전용 무기를 제작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듀렌 박사는 웬 시커먼 막대 하나를 건네주었다. 기다란 것이 그 형태가 어지간한 검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날이 없는 걸 보면 둔기에 가까웠지만, 막대 이곳저곳에 코드들이 길게 이어진 단자가 꽂혀있는 걸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자, 이 막대를 쥐고 힘을 줘 보게. 마치 검을 쥐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건 뭡니까?”
“일종의 본을 뜨는 거지. 무기가 사람의 손의 크기나 형태에 맞도록 말이야. 이 막대를 통해 자네의 손아귀의 힘이나 무기를 쥐는 방식 등이 데이터 형태로 수집된다네.”
“흐음.”
이진운은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 막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검을 쥐듯 막대를 쥐었다.
그러자 막대를 통해 다양한 데이터가 듀렌 박사가 켜놓은 작은 단말기 위에 떠오른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나열되었다.
그가 경악과 탄성이 뒤섞인 외침을 토해내었다.
“허어 ··· 이럴 수가! 손아귀 힘이 정말 놀랍군, 놀라워. 자네 진짜 인간 맞나?”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웬 뚱딴지같은 소리에 되묻는 이진운. 듀렌 박사는 지금 자신이 읽어낸 계측 데이터 결과를 간단히 말해주었다.
“계측된 손아귀 힘이 상상을 넘어섰네. 이 정도면 10mm 강철판도 맨손으로 종잇장 찢듯 찢어버릴 수 있겠어.”
그 말을 듣고 보니 왜 그런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도 외공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오랫동안 수련해 온 게 이젠 내공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외공의 진정한 공능까지 개화된 것이 틀림없었다.
예전에는 강철을 구기거나 휠 정도는 되어도 종이처럼 찢어낼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제아무리 영능을 각성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제 막 각성한지 며칠 안 되는 사람의 힘이 이 정도라니. 이건 리스티 양에게 배운 상식에도 맞지 않는 수준이야. 그 손에 잡히면 평범한 인간은 산산이 찢기고도 남겠어.”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아무튼 조심하도록 하게. 자칫 잘못하다간 애먼 사람을 잡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듀렌 박사의 걱정과 달리, 이진운에게 있어 힘의 제어 따윈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실수로 누군가를 해할 만큼 어설프지 않았다.
“좋아, 검은 어떤 타입을 원하는가? 롱 소드, 아니면 바스타드? 클레이모어나 망고슈? 자네가 즐겨 사용하는 타입을 정하게. 길이나 규격도 말해주고.”
“음, 내가 원하는 건 서양검하고는 거리가 먼데···.”
사용하는 검의 종류를 묻는 질문에 이진운은 뺨을 긁적이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사용한 천룡파마신검은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형태의 검이었다.
“하긴 자네는 동양인이었지. 사용하는 무기도 우리 서양인하고는 다르겠군. 그럼 어떤 종류인지 설명을 해 주게나. 사이즈나 규격, 형태 같은 걸 말해주면 그대로 만들겠네.”
“뭐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전 검이라곤 안 했습니다.”
“어엉? 그게 무슨 소린가? 리스티 양이 자네 전문 분야가 검술이라고 하던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돌아보는 듀렌 박사. 이진운은 슬며시 입꼬리를 뒤틀며 말했다.
“가장 전문분야는 그렇지요. 하지만 전 검 외에도 다양한 무기를 다룰 줄 압니다. 특기분야가 꽤나 다양하죠.”
점창의 무공은 다양하다. 다른 도가 문파에 비해 실전을 중시하는 터라 검 외에도 창 도, 궁, 편 등 다루지 않는 무기가 없었다.
게다가 중원무림은 천마신교에 대적하기 위해 하나로 뜻을 모아 그를 공동 전인으로 삼기까지 했다. 중원무림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무공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무공들을 전부 활용하려면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이 필요했다.
물론 경지가 높아지면 강기의 형태를 빚어내어 무기를 대신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아직 요원한 일이다.
이것저것 따로 준비하고 있던 리스티는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아저씨, 설마 다룰 수 있는 종류의 무기를 전부 다 만들어 달라는 소리에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 게 아니었으면 거래할 필요도 없었고.”
지금 현재 이진운은 일개 견습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견습생에게 아르탈 행성 연합이 다양한 무기를 제공할 이유가 없으니, 리스티와의 거래를 핑계로 이런 치사한 수를 쓴 것이다.
“와, 아무리 거래라고 해도 그렇죠. 아저씨 정말 너무 하네. 이 기회에 아주 날로 먹겠다는 거죠?”
“싫어? 싫으면 그만 둬라. 거래 안 하면 되니까. 나 아쉬울 것 없다. 그냥 보급용 검이나 쓰고 말지.”
“으으··· 이 아저씨, 진짜 고단수네.”
울쌍을 지으며 고민하는 리스티. 하지만 넘치는 지식욕을 이기지 못했는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제가 졌어요오오. 그러니까 원하는 무기 종류 좀 말해 봐요.”
“말로 하기는 꽤 많은데.”
“으, 그럼 적어 봐요.”
이진운은 리스티가 띄운 홀로그램 창에 무기의 제원을 기입해 나갔다. 종류가 꽤 많아서인지, 입력하는 데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수십 종류의 무기 제원을 본 리스티는 정말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글썽거리고 있었다.
“지식과 맞교환한다고 해도 이건 정말 너무해요오오.”
“본래 가치는 희소성에 따라 매겨지는 법이지. 당연한 결과다”
매몰차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진운에게는 합리적인 결과였다.
자신이 제공할 것은 현대의 지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중원무림의 지식이다. 이건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가치를 가졌다.
“이대로 제작해 줘. 성능은 알고 있지?”
“예, 제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성능으로 만들어드리지요. 반드시.”
말투가 평소와 달리 딱딱한 게 뭔가 악의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녀의 반응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두 사람의 거래는 끝나지 않았다. 이진운이 무기를 받기로 했다면, 이번에는 그가 리스티에게 지식을 제공할 차례였다.
그녀는 이진운 앞에 온갖 복잡한 기기들을 가져다 놓았다. 그것은 영력의 운행을 읽고 계측할 수 있는 관측 기기들이었다.
얼마나 많은지 보는 이진운이 다 질릴 정도다. 심지어 어떤 건 몸 전체에 뒤집어 써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무슨 죽어서 들어가야 할 관짝 같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처음 보는 영력 운용법이잖아요. 그러니 아주 상세하게 데이터를 추출해서 최대한 분석할 수 있을 만큼 해 봐야죠.”
이진운은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듀렌 박사에게 무기 제작을 위한 기초 데이터 수집을 맡겨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던 게 바로 이런 걸 준비하기 위해서였어?
일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이번 거래로 뽕을 뽑으려던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번에는 제 차례랍니다아아.”
아주 해맑게 웃는 리스티. 하지만 이진운은 그 웃음이 전혀 해맑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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